2014년 4월 육군 제28사단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병사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 군은 병사의 가족에게 냉동 만두를 먹다 기도가 막혀 사고가 난 것이라 설명했다. 병사는 이내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병사의 몸에는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할 만큼 멍 자국이 많았는데 헌병(현 군사경찰)은 병원을 방문해놓고도 상부에 단순 질식사라 보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 병사가 선임들이 망자를 구타한 사실을 증언했고 가해자들이 긴급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망자의 사인은 기도폐쇄에 의한 뇌손상이었다. 가해자들은 상해치사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난 7월 말 군인권센터의 폭로로 진짜 사인이 드러났다. 진짜 사인은 좌멸증후군 및 속발성 쇼크였다. 모두 구타로 인한 내·외상에 의한 것이었다. 폭행 후 음식을 먹다 죽은 것과 맞아 죽은 것은 명백히 다른 일이다. 후자는 엄연한 살인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사인을 조작했다. 이것이 윤 일병 사건이다.
이후 가해자에게는 살인죄가 적용되었고 모두 처벌받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양심선언과 인권단체의 폭로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윤 일병의 진짜 사인은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아야 진실에 닿을 수 있는 이 이상한 구조 속에서 윤 일병이 떠난 뒤로 6년이 지나도록 사건을 축소·은폐하고 사인을 조작하는데 일조한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았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들과 싸우고 있다.
▲ 고개숙인 "윤일병 사망사건" 가해 병사들 16일 오전 "윤일병 사망사건" 재판이 열리는 경기도 용인시 3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가해 병사들이 피고인 석에 앉아 있다. 2014.9.16 | |
ⓒ 권우성 |
그해 11월 국회는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특위가 마련한 대안 중에는 군 옴부즈맨 제도 도입이 있었다. 국민의 불신과 불안을 해소하고 구타·가혹 행위를 일소하려고 장병 인권침해 구제를 위한 독립 기관을 설치하자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국회는 2015년 7월 24일 군 옴부즈맨(군인권보호관) 제도 도입을 포함한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 혁신 과제의 조속한 이행 촉구 결의안'을 여야 합의에 따라 재석의원 222인 중 216인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반대 의원 2명, 기권 의원 4명 중 지금도 국회에 남아있는 사람은 군 장성 출신인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뿐이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7월 30일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황영철 의원이 국가인권위원회에 군인권보호관을 설치하는 내용을 골자로 국가인권위원회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에는 여야 의원 27명이 골고루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제정된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에도 군인권보호관 설치가 명기됐다(제42조). 그러나 19대 국회 임기 만료로 국가인권위원회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폐기됨에 따라 군인권보호관 설치는 좌절된다.
그렇게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몇 년이 흐르자 군인권보호관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은 뚝 떨어졌다. 20대 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이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제출했으나 회의 테이블에도 못 올려보고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대선에서 군인권보호관 설치를 공약으로 내세웠는데도 그랬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이성호 전 위원장과 최영애 현 위원장이 나란히 군인권보호관 설치 추진을 공표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군인권보호관 설치를 가로막는 복병은 곳곳에 있었다. 군인권보호관 문제를 둘러싼 쟁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조직, 인력, 권한.
조직 문제는 군인권보호관의 지위와 관련된 것이었다. 황영철 의원과 백혜련 의원은 국회가 추천하는 인권위 상임위원을 2명에서 3명으로 늘려 늘어난 자리를 군인권보호관으로 하고자 했다. 인권위도 그렇게 추진해왔다.
인력 문제는 군인권보호관의 업무를 지원하기 위한 조사관을 충원하는 일이었다. 현재 인권위에는 군 관련 문제를 전담하는 군인권조사과가 있는데 인력은 8명뿐이다. 황영철·백혜련 의원은 직제상 군인권본부를 두고 인력을 확충하고자 했다.
권한 문제는 불시 방문 조사권과 자료 제출 요구권에 관한 것이었다. 제도 도입 배경을 되짚어 보면 군인권보호관이 부대에 통보하지 않고 조사를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자료 제출 요구권도 마찬가지다. 황영철·백혜련 의원 안은 전시·비상사태를 제외한 불시 방문 조사권을 명시했고 자료 제출 요구권도 부여했다. 방문 조사 시에는 전문가도 동행할 수 있게끔 했다.
이처럼 조직을 넓히고, 인력을 확보하고, 권한을 확충하는 일이다 보니 정부 부처 곳곳에서 반대가 터져 나왔다.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 그리고 국방부가 그랬다. 한 국방부 관계자는 "국방부가 인권 관련 부서를 신설하려 하면 행안부와 기재부는 '인권위에 군인권보호관을 설치할 텐데 왜 예산과 인력을 중복으로 쓰냐'라고 하고, 인권위가 군인권보호관을 설치하려 하면 '국방부에 인권 부서가 생길 텐데 왜 예산과 인력을 중복으로 쓰냐'라고 하며 반대했다"라고 말했다.
권한과 관련해서는 당연히 국방부의 반대가 심했다. 박근혜 정권 때에는 아예 국방부 관료들이 대놓고 여당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군인권보호관을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닌 국방부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 공약사항에 국가인권위원회에 군인권보호관을 설치하는 것이 포함되자 국방부는 불시 방문 조사권과 자료 제출 요구권을 무력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이런 이유로 군인권보호관은 여야 합의로 설치를 결의한 시점으로부터 5년이 지나도록 설치되지 못했다.
안 만드느니만 못한 법
그러던 중 지난 8일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의원이 군인권보호관 설치를 골자로 하는 국가인권위원회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하지만 내용은 19대, 20대에 발의된 법안과 사뭇 달랐다. 결론적으로 세 가지 쟁점에서 모두 후퇴했다. 군인권보호관은 기존 인권위 상임위원 중 한 명이 겸직하고, 조직 확대에 대한 조문은 사라졌으며, 불시 방문 조사권도 수사 중 사건에 대한 자료 제출 요구권도 삭제되었다.
조승래 의원 안이 보장하는 군 인권 보호를 위한 인권위의 권한이란 이미 지금껏 인권위가 수행해온 역할과 다를 것이 없다. 사실상 기존 상임위원 한 명에게 군인권보호관이란 감투를 하나 더 얹어준 것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셈이다.
제일 황당한 것은 조사의 대상이 되는 국방부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불시 방문 조사권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법안에 따르면 군인권보호관은 군부대 방문 조사 시 부대장에게 취지와 일시, 장소를 통지해야 하고 미리 통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면 국방부 장관에게라도 통지해야 한다. 게다가 국방부 장관은 국가기밀에 관한 사항, 국가 안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항, 심지어 작전 임무 수행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사항 등의 갖가지 모호한 이유로 진행 중인 방문 조사를 중단시킬 수도 있다.
법안이 황영철·백혜련 안과 비교해 퇴보하다 못해 기존 인권위법에는 없는 조사대상 기관의 자의적 조사중단권까지 부여하고 있다. 세계 어디에도 옴부즈맨을 설치해 놓고 조사 대상 기관이 옴부즈맨의 조사를 중단시킬 수 있는 권한을 마련해 둔 나라는 없다. 이 법이 탄생하게 된 연원을 따져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군인권보호관은 군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다. 그런 제도를 군의 입맛대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윤 일병의 어머니는 "승주(윤 일병)로 인해서 군대가 많이 좋아졌다고 해서 그것을 위안으로 삼는다"라고 말한다. 군의 인권 상황이 그 시절에 비해 상당히 개선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끔찍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할 제도 장치가 촘촘하게 잘 갖추어지지 않는 한 언제 건 비극은 반복될 수 있다. 누가 죽어야 법과 제도가 개선되는 상황은 그만 보고 싶다.
조직도, 인력도, 권한도 갖추어 주지 않고 감투만 하나 얹어둔 채 군인권보호관이 폐쇄적인 군을 상대로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신뢰할 만한 결과를 만들길 바란다면 큰 오산이다. 이런 제도라면 안 만드느니만 못하다.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6년이 지나도록 옴부즈맨 하나 제대로 설치를 못 하다 엉망 법안을 빚어낸 국회는 윤 일병과 또 다른 수많은 윤 일병들의 영전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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