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7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재앙 불러온 포츠담의 검은 그림자’ (http://www.jajusibo.com/52040)를 읽은 어느 애독자가 <한겨레> 2020년 8월 13일부에 실린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글 ‘일본 대신 우리가 분단된 까닭’을 나에게 전송해주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들어있다.
“7월 포츠담 회담에서 미, 영, 중, 소 연합국은 일본분할점령에 합의했다. 미국이 간토와 간사이, 소련이 홋카이도와 도호쿠, 영국이 규슈와 주고쿠, 중국이 시코쿠를 각각 차지하고 도쿄는 베를린처럼 4개국이 분할통치하는 점령계획이 논의되었다. 8월 13일 미 국무부는 ‘일본 점령을 위한 국가별 무력구성안’을 마련했다.”
나는 ‘재앙 불러온 포츠담의 검은 그림자’라는 제목의 글을 집필하고 있었을 때, 정병호 교수가 그 글을 <한겨레>에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글에서 미국의 일본렬도분할점령안에 관해 거론하지 못했다.
정병호 교수가 ‘일본 대신 우리가 분단된 까닭’이라는 그의 글에서 일본렬도분할점령안에 관해 서술한 자료근거는, 1945년 8월 미국 트루먼 행정부에서 회람되고 있었던 두 부의 1급 비밀문서들이다. 1급 비밀문서들 가운데 하나는 비망록이고 다른 하나는 통보문이다.
2000년대 초, 일본 도꾜에 있는 국립국회도서관은 이 1급 비밀문서들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내 그 복사본을 보관하고 있는데, 원본을 촬영한 영상자료를 국립국회도서관 웹싸이트에 올려놓았으므로, 인터넷을 통해 그 영상자료를 읽을 수 있다. 그 1급 비밀문서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작성했는지, 미국이 왜 그 안을 만들어놓고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첫 번째로 주목되는 1급 기밀문서는 ‘대통령을 위한 비망록(Memorandum for the President)'이라는 제목 아래 ‘패망 이후 시기에 일본을 적절히 점령하기 위한 국가무력구성(National Composition of Forces to Occupy Japan Proper in the Post-Defeat Period)'이라는 주제가 붙어있는 문서다.
이 비망록의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는 임무와 책임을 소련, 영국, 중국(장졔스 국민당 정부)과 적절히 분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절히 분담한다는 말은 4개국이 균등하게 분담한다는 뜻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고 다른 3개국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불균등하게 분담한다는 뜻이다. 비망록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미국은 일본의 점령당국(군정을 뜻함-옮긴이)에서 지배적인 발언권(controlling voice)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자국의 주도로 다른 3개국과 함께 일본을 공동점령하고, 그 점령지에서 자기들이 주도하는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이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의 골자다.
‘대통령을 위한 비망록’이라는 제목은 국무장관이 대통령에게 제출한 비망록이라는 뜻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제출된 문서에 관한 비망록이라는 뜻이다. 1945년 8월 13일 국무부 공식문서양식에 작성된 이 문서의 상단 왼쪽에는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공식통보문(ADDRESS OFFICIAL COMMUNICATION TO THE SECRETARY OF STATE)”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이것은 이 비망록이 대통령에게 제출된 비망록이 아니라 국무장관에게 제출된 비망록임을 말해준다.
또한 이 문서의 상단 왼쪽에는 “국무장관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음을 던 씨가 확인함. 45년 8월 18일 H. W. 모슬리(Mr. Dunn has ratified the Secretary of this approved by the President. H. W. Moseley 8/18/45)”이라는 육필문장이 쓰여 있다. 이 육필문장에 나오는 던이라는 사람은 제임스 던(James C. Dunn)이고, 모슬리라는 사람은 해럴드 모슬리(Harold E. Moseley)다. 제임스 던은 외교장관협의회(Council of Foreign Ministers) 미국측 부대표였고, 해럴드 모슬리는 국무성 동북아시아국 특별보좌관이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해럴드 모슬리는 이 비망록을 작성하여, 1945년 8월 13일에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James F. Byrnes)에게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모슬리가 비망록에 써넣은 육필문장에 따르면, 국무장관은 “이것에 관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승인을 받았다는 말만 가지고서는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가 이 문서와 같은 내용으로 작성된 또 다른 1급 기밀문서를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냥 구두로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구두승인을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구두로 설명하고 구두승인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국무장관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제임스 던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만일 국무장관이 대통령에게 구두로 설명하지 않고 문서로 제출하여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면, 제임스 던이 대통령의 승인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해럴드 모슬리가 이 비망록을 자기의 직속상관인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에게 제출한 날은 일왕 히로히또가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조서(詔書)를 발표하기 이틀 전인 1945년 8월 13일이었다.
비망록의 제1항에는 “본 정부는 대일전쟁에 참전한 동맹국들과 (일본점령문제를) 협의하게 된다(This Government is committed to consultation [on the issue of occupying Japan] with those of its Allies at war with Japan)"고 명시되었다. 이것은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소련, 영국, 중국과 협의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살펴보면, 정병호 교수가 <한겨레> 2020년 8월 13일부에 발표한 ‘일본 대신 우리가 분단된 까닭’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미국의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이 포츠담회의에서 채택되었다고 서술한 것은 착오다.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은 포츠담회의가 끝난 뒤, 미국 국무성이 작성하여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
두 번째로 주목되는 1급 비밀문서는 미국 국무성-전쟁성-해군성조절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on Committee, 이 글에서는 3성 위원회로 약칭함) 사무국에 소속된 비서관 3명이 1945년 8월 18일에 작성하여 트루먼 행정부 고위관리들에게 회람시킨 통보문(note)이다. “장관들이 작성한 통보문(Note by the Secretaries)"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국무장관, 전쟁장관, 해군장관의 지시로 3성 위원회 사무국 소속 비서관 3명이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통보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 1945년 8월 11일 3성 위원회는 국무성이 작성하고, 합동참모본부가 수정한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승인했다. - 국무성은 8월 11일 3성 위원회로부터 승인을 받은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대통령에게 제출했고, 대통령은 8월 18일 이 방안을 승인했다.
위에 서술한 내용을 보면, 국무성은 자기가 작성한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3성 위원회에 제출하기 전에 먼저 합동참모본부에 보내 군부의 의견을 듣고 일부 내용을 수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3성 위원회는 국무성으로부터 받은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8월 11일에 승인했고, 트루먼은 그 안을 8월 18일에 승인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국무성이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작성한 시기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1945년 8월 6일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국무성이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작성했던 1945년 8월 초는 소련이 대일전쟁참전준비를 완료한 직후다. 당시 미국 국무성은 대일전쟁에 참전한 소련이 남사할린을 급속히 탈환하고 곧바로 일본 홋까이도(北海道)를 점령하고, 일본 혼슈(本州)로 남진할 것으로 예견했었다. 당시 일본제국은 미국군이 오끼나와(沖繩)를 점령한 다음 일본렬도 남쪽에 있는 규슈(九州)에 상륙할 것으로 예견하고, 상륙을 저지할 방어력을 규슈에 집중시켰으므로, 홋까이도와 혼슈 북부지역에 강력한 방어력을 배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소련군은 홋까이도를 쉽게 점령하고 혼슈로 남진할 수 있을 것으로 예견되었던 반면, 미국군은 ‘본토사수’를 결의한 일본군의 방어력에 가로막혀 규슈에서 격렬한 공방전을 벌이는 바람에 혼슈로 북진하기 힘들 것으로 예견되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미국은 일본렬도를 단독으로 점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소련군이 남사할린을 탈환한 이후 계속 남진하여 홋까이도와 혼슈까지 점령하지 못하게 만드는 저지방책을 세워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만들어놓았으면서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소련군의 사할린전투가 미국이 우려했던 것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사할린전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씨야제국은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일본제국과 벌인 전쟁에서 패전했다. 패전한 로씨야제국은 1905년 9월 5일 미국 매사츄세츠주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체결된 포츠머스조약에서 남사할린을 일본제국에 넘겨주기로 했다. 승전한 일본제국은 사할린섬 중부를 지나가는 북위 50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하였고, 점령지를 가라후또현으로 편입시켰다.
식민지조선에서는 사할린을 가라후또(樺太)라는 한자표기에 따라 화태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은 식민지조선의 수많은 청장년들을 남사할린에 있는 화태탄광으로 끌어갔다. 화태탄광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은 일본제국의 차별과 억압, 굶주림과 임금착취를 받으며 노예처럼 살았다. 소련군이 사할린전투에서 승리한 뒤, 남사할린에 살던 일본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화태탄광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들 가운데는 영영 돌아오지 못한 나의 외삼촌도 있다. 외삼촌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화태탄광에 끌려갔기 때문에 나는 외삼촌의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한다. 어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외삼촌은 자기 고향인 충청남도 논산으로 돌아가려고 마지막 귀국선에 올랐으나, 불행하게도 귀국선은 항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소련군 태평양함대는 남사할린 해상봉쇄작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어떤 배도 항구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소련군은 사할린전투에 병력 100,000명을 동원했고, 일본군은 병력 19,000명을 동원했다. 일본군 예비병력 10,000명도 사할린전투에 동원되었지만, 전투력이 거의 없던 그들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보다 5배 이상 많은 병력을 동원한 소련군은 사할린전투를 10일 안에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소련군이 사할린전투를 개시한 날은 1945년 8월 11일이었으므로, 아무리 늦어도 8월 21일까지는 승리할 것으로 타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의 낙관적 예상은 빗나갔다. 사할린전투에서 일본군이 뜻밖에도 완강히 저항하는 바람에, 소련군은 1945년 8월 15일에야 ‘가라후또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그날은 도꾜에서 일왕 히로히또가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항복의사를 표명한 날이었으므로, 일본군은 즉각 소련군에게 항복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할린전투에 동원된 일본군 제88보병사단은 8월 15일 이후에도 계속 저항했다. 전황이 자기들의 낙관적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소련군은 8월 16일부터 태평양함대를 동원하여 사할린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상륙부대가 사할린 최남단에 있는 항구도시 코르사꼬브(Korsakov, 일제제국이 붙인 지명은 오또마리[大泊])에 상륙하여 그 항구도시를 탈환한 날은 1945년 8월 25일이었다. 오또마리에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던 일본군 제88보병사단 병력 3,400명은 오또마리항에 상륙한 소련군 1,600명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원 항복했다. 그로써 사할린전투는 소련군의 완전한 승리로 결속되었다. 2주간 동안 계속된 사할린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1,200명이 전사했고 약 845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군은 약 2,000명이 전사했고 약 18,2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위에 인용된, 미국 3성 위원회 사무국이 1945년 8월 18일에 작성하여 트루먼 행정부 고위관리들에게 회람시킨 통보문에 따르면, 트루먼이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승인한 날은 1945년 8월 18일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 필리핀 마닐라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일본제국 육군참모차장 가와베 도라시로(河邊虎四郞)를 단장으로 하는 16명의 비밀협상대표단을 태운 미국군 수송기가 필리핀 마닐라 남쪽에 있는 니콜스비행장에 착륙한 것이다. 연합군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 그의 참모들은 마닐라로 날아온 일본제국 비밀협상대표단과 19시간 동안 협상했다. 그들은 비밀협상에서 일본제국의 항복절차를 밀약했다.
이처럼 일본제국이 소련에게 항복하지 않고 미국에게 항복하겠다고 밀약했으므로, 미국은 일본렬도분할점령안을 실행에 옮길 필요가 없었다. 미국은 소련을 배제하고 단독으로 일본렬도를 점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45년 8월 19일 맥아더가 가와베에게서 받아낸 마닐라밀약에 따라, 일본제국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미국군 선발대 150명을 태운 수송기가 8월 28일 도꾜에서 50km 떨어진 아쯔끼비행장에 착륙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8월 30일 오끼나와에서 이륙한 전용기편으로 당일 오후 2시 5분 그 비행장에 도착했다.
1945년 8월 25일 사할린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여세를 몰아 일본 홋까이도에 상륙했더라면, 일본렬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홋까이도를 소련에게 넘겨주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토야심이 없었던 사회주의국가 소련은 사할린전투에서 승리하고 진격을 멈췄다. 동아시아를 점령, 지배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간과한 소련의 전략적 오판이 소련군의 진격을 멈춰세운 것이다.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여 38도선 이남지역을 영구히 점령, 지배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간과한 소련은 1945년 7월 25일경 포츠담회의 중에 미국이 제시한 38도선분할점령안을 수락했다.
영토확장야욕에 사로잡힌 제국주의국가 미국은 일본제국이 소련에게 항복하지 않고 자기에게 항복하겠다고 언약한 마닐라밀약을 틀어쥐고 일본렬도를 단독으로 점령하였을 뿐 아니라, 38도선을 경계로 조선반도를 분할점령하는 포츠담회의 합의사항을 실행에 옮겼다. 지난 75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헤아릴 수 없는 불행과 재난을 안겨준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이 저지른 분할점령만행이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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