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현의 영 케어러 ①] 가족 해체 후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돌보게 된 성희씨 이야기
'가족 돌봄'을 말할 때 떠오르는 얼굴들은 '중장년'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국 사회에도 아픈 부모나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효녀', '효자'로 불릴 뿐 사회적 주체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직접 돌본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작가가 자신과 같은 한국의 영 케어러들을 찾아나섭니다. 돌봄이 형벌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청년들의 경험담을 기다립니다. (제보 - youngcareer90@gmail.com, jeor23@ohmynews.com) [편집자말] |
▲ 돌봄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다. | |
ⓒ 고정미 |
돌봄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실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치기' 전까지 실감하지 못한다. 누군가 쓰러지면 그를 곁에서 돌보고, 그와 관련된 일을 책임지고 결정하며, 병원비나 간병비 등을 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역할은 대개 가족이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입원 절차나 수술부터 가족 동의가 필요하다. 진단서나 의무기록부 등 의료기록도 항상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할 수 있는 사람만 수월하게 뗄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울려대는 휴대전화 벨소리에서 이런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19년 5월, 일요일 저녁에 난데없이 김성희(가명)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낌새가 이상했다. 지역 번호 '051'의 부산 발신 전화였다.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계속 울리는 전화를 두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아니, 가만히 있었다기보다 머릿속을 뒤지고 있었다. 성희씨는 지난 세월을 통틀어 지금의 평온을 깰 만한 위기가 무엇이 있는지 되짚었다. 혹시 '아빠는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 남고, 오랜만에 친척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 나긴 난 모양이었다. 문자가 왔다. '너희 아빠가 뇌출혈로 의식 불명이야. 전화 받아봐.'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 아빠가 쓰러졌구나' 그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며칠 전, 성희씨는 직장에서 7년 동안 쌓은 디자이너 경력 덕분에 강의 요청을 받았다. 한 주 전에는 일에 쏟은 에너지를 보상이라도 하듯 회사에서 해외 워크숍을 보내줬다. 내일 직장에서 먹을 점심 도시락을 미리 싸뒀고, 아직 남은 주말 저녁을 즐기며 쉬던 참이었다. 커리어도, 일상도 모난 데 없이 잘 굴러가던 보통 날이었다. 그날, 3년 만에 아빠 소식을 들었다. 성희씨는 당장 짐을 싸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
▲ 지난 5일 저녁, 조기현 작가가 서울 영등포구 독립서점 "일단 불온"에서 김성희씨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 |
ⓒ 김예지 |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쓰며, 나는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 모임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20살 때 아빠가 쓰러지고 돌보며 겪은 일들을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가두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들을 만나서 '청년'과 '돌봄'이라는 각각의 과제가 어떻게 현실의 무게를 만들어내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만 유별난 상황이 아니라 모두가 가족 돌봄과 부양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돌봄과 부양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확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 모임을 만들지 못했다. 그런 청년들은 이 세상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어렵게 찾아도 쉽게 말문을 트지 못했다. 부침을 겪으면서 지난날 아빠를 돌보면서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던 '자기 검열'이 떠올랐다. 마치 '잘' 돌보는 효자나 효녀만이 돌봄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같은 압박이었다. 하지만 나는 돌봄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막대한 병원비 앞에서는 아빠가 그만 죽어줬으면 좋겠단 생각도 했다. 아빠를 돌보지만 돌보고 싶지 않은 양가적인 태도가 '말'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조차 못 했다.
성희씨를 만난 건 올해 3월이었다.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출간하고 진행한 북 토크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32살의 여성이었다. 난생 처음 아픈 가족을 돌보는 내 또래와 대면한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겪은 그대로를 검열 없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그를 다시 마주했다.
재회
"그날 아빠를 봤어요. 누워있는 아빠를. 정말 오랜만에."
성희씨가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16년이었다. 그해,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다. 아빠는 늘 집 밖을 나돌았다. 그리고 쉽고 빠르게 돈을 수중에 넣고 싶어 했다. 한동안 운송회사를 다니다 회삿돈을 만질 수 있는 위치에 올랐을 무렵 횡령을 했다. 집안의 위기였다. 당시 성희씨는 서울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향 집으로 향했다.
아빠는 시종일관 엄마 탓만 했다. 엄마가 해결해주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고 여기는 듯했다. 함께 잘 헤쳐 나가보려던 성희씨의 마음이 싹 가셨다. 무책임한 아빠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합심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의 정답은 '가족 해체'였다. 성희씨는 엄마를 고생시키느니 각자 살길 찾자고 아빠를 설득했다. 그래야 엄마도 더 고생하지 않고, 아빠도 스스로 살기 위해 노력할 것 같았다.
부모의 이혼 후, 아빠가 교도소에 수감됐다는 소식으로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나 병상에 누워 있는 아빠를 다시 만났다. 전주에 사는 그는 연고도 없는 부산의 한 모텔에서 홀로 쓰러진 채 발견됐다고 했다.
"예전에 아빠는 잘생기고 키도 작지 않고 마르고 옷도 늘 항상 잘 입었어요. 깔끔한 사람이었어요. 향수도 뿌리고 다닐 정도로."
뇌출혈로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있는 아빠는 지난날처럼 깔끔하지 못했다. 그저 옅은 숨을 내뱉으며 힘없이 누워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미움만큼이나 연민이 밀려들었다. 헤어져 지내던 3년간 아빠는 어떻게 지냈던 걸까? 그리고 아빠는 왜 거주지인 전주가 아니라 부산에 있는 걸까? 혹시라도 '억울한 사고'를 당해 누워있는 건 아닐까? 아빠와 성희씨 사이에 비어있던 시간만큼 채워야 할 질문들이 생겼다.
하지만 그 질문들에 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병원비를 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빠의 통장 잔고를 정리하던 중, 성희씨는 많은 걸 알아버렸다. 카드 사용 내역이 그가 지난 날 어떻게 지냈는지, 부산에는 왜 왔는지 답해주었다. 그는 유흥과 도박에 빠진 듯했다. 대출을 받아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곧바로 유흥업소에서 썼다. 그렇게 쌓인 빚이 2000만 원쯤 됐다. 아빠에게는 아빠의 병원비를 낼 돈이 없었다.
성희씨는 회사에 이틀간 휴가를 썼다. 딱 3일만, 아빠 일을 해결할 참이었다. 아빠 일로 금쪽같은 휴가를 다 쓰기 싫었고, 구구절절 회사에 사정을 말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아빠를 돌보는 딸에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위로는 쾌유를 비는 말뿐이다. 성희씨는 친밀하고 유대가 넘치는 부녀로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첫째 딸
▲ 지난 5일 저녁, 조기현 작가가 서울 영등포구 독립서점 "일단 불온"에서 김성희씨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 |
ⓒ 김예지 |
밤 11시가 가까워진 병원 로비는 우주처럼 고요했다. 듬성듬성 켜진 형광등 불빛 아래 친척들이 모였다. 모두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실질적인 돌봄과 병원비 앞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모두 아빠라는 '폭탄'을 돌리고 있었고, 그걸 떠맡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큰아빠였다. 이것저것 조언을 하나 싶더니, 결국 성희씨에게 "자식이니까 네가 해야지"라고 말하며 슬쩍 발을 뺐다. 고모는 자신이 맡고 싶지는 않지만, 도움을 청하면 도와줄 기세였다. 이혼한 엄마는 딸들이 고생하니 뭔가 해주고 싶어도 직접 나서서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성희씨도 엄마에게는 아빠 일이 전가되지 않기를 바랐다. 아빠와 함께 살면서 엄마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번 일까지 맡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할머니와 동생, 그리고 성희씨가 총대를 메야 했다. 세 사람은 무엇보다 아빠와 관련된 복잡한 행정 절차를 비교적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가족관계증명서'가 부여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아직도 얼떨떨해하며 한발 물러서 있었다. 성희씨도 동생이 그러길 바랐다. 동생만은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고 왜 부산에 있는지 몰랐으면 했다. 동생에게는 아빠가 '한심한 사람'이기보다 그저 아빠로 남길 바랐다.
할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면서도 돈 얘기가 나오면 바로 돌아섰다. 거기에 아빠의 거주지인 전주와 입원해 있는 부산을 여든의 할머니가 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폭탄은 '첫째 딸' 성희씨에게로 넘어왔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 그냥 눈 한 번 꼭 감고 "나쁜 년"이 될까 고민했다.
아빠는 쓰러지면서 모두에게 불행을 선사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이기 시작했을까? 왜 아무도 이 불행을 예견하지 못했을까? 성희씨는 대학생 때 일을 떠올렸다.
"아빠가 자기 살아왔던 얘기를 그때 처음 해줬던 거 같아요. 자기가 고등학교 때 유망한 축구 선수였는데 다쳐서 축구도 못 하고 대학도 못 갔다, 그래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큰아빠랑 어떤 일들을 했었다, 이런 것들을 다 얘기했어요."
매번 밤늦게 술에 잔뜩 취해 햄버거를 사 오던 게 유일한 자기표현이었던 아빠가, 술도 마시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를 내보였던 때다. 하지만 성희씨는 그때 아빠의 생애가 시시해 보였다. 마치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신을 합리화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혹시, 그때가 지금과 같은 불행을 막을 수 있는 순간이었을까. 만약 다른 반응을 보였다면, 아빠는 어땠을까. 부산의 유흥가를 떠도는 일도, 그래서 쓰러지는 일도, 가족들에게 불행을 선사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성희씨는 생각했다. 분명 아빠가 쓰러진 건 가족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한때 딸과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성희씨의 발목을 잡았다. 성희씨는 쓰러진 아빠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떠안기로 했다. 그게 성희씨의 '마지막 도리'였다. 그리고 성희씨는 다시 예전처럼 아빠가 없는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병원비
다시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아빠의 머리 왼편은 부풀어있었다. 의사는 왼편 두개골 반쪽이 없는 상태이고 뇌수술은 잘 진행됐다고 전했다. 큰 수술을 마쳤으니 대학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길 차례였다.
700만 원 가까운 병원비가 수납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정보를 샅샅이 뒤졌다. 인터넷에 검색하기도 하고, 먼저 부모를 돌본 경험이 있는 아는 언니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서류를 떼고, 신청서를 작성하고, 접수하고,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빼먹는 게 없는지 잘 확인하면 될 것 같았다.
"저는 계속 배낭을 메고 다녔어요. 아빠 서류, 가족관계증명서 다 준비하고. 주민센터가 9시에 여니까, 아침 8시 50분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첫 시도는 '긴급복지 의료지원' 신청이었다. 병원비 300만 원을 지원해주는 제도였다. 신청하지는 못했다. 아빠 앞에 실비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아빠의 통장이 모두 빚 때문에 압류된 상태였다. 결국 아빠의 재산을 처분해야 했는데, 이마저도 재산 처분에 필요한 인감 증명서를 떼지 못해 말썽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의료급여 신청이 남아있었다. 병원비의 90%를 보장받을 수 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커다란 산이 있었다. 부양의무자 기준이었다. 부양의무자란 수급권자의 1촌 직계혈족이나 배우자 같이 부양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 아빠에게는 성희씨와 동생이 부양의무자였다.
국가는 아빠를 부양할 수 있는 기준을 월 165만 원으로 정해두었다. 딸들의 월 소득은 합쳐 2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둘이 합쳐 200만 원을 겨우 버는 두 딸을, 국가는 '아버지를 부양할 여력이 있다'고 봤다. 샛길을 택해야 했다. '가족관계해체'를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가족관계해체사유서'를 쓰는 것마저도 지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가족이 어떻게 해체됐는데요?"
주민센터의 담당 공무원은 성희씨에게 눈을 흘겼다. 가족관계해체사유서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 묻던 참이었다. 마치 '어디 한 번 네 가족이 어떻게 망했는지 설명해보라'는 압박 면접 같았다. 이 압박 면접을 통과해야만 가족의 해체를 증명할 수 있는 걸까. 성희씨는 자신의 인생을 무심하게 주무르려는 공무원의 태도에 언성이 높아졌다.
"평생을 여기서 다 말해요? 그러면 해주는 거예요?"
주민센터를 오가던 그 많은 사람이 성희씨의 언성에 집중하는 듯했다. 모멸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사람들의 시선과 집중을 어서 털어내고 싶었다. 공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 일로 주민센터에 와있는 것만으로 가족 해체 사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2020년 8월 10일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2021~2023)'이 발표됐다. 문 대통령은 한 사람의 빈곤을 가족에게 떠맡기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임기 내에 완전히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이번 종합계획에는 의료급여의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계획이 담겨있지 않았다.
의료비가 없는 아픈 사람을 지원하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 긴급복지 의료지원, 차상위계층 의료지원 등의 정책이 있다. 하지만 그마저 받지 못할 때 의료비를 내야 하는 첫 번째 책임은 가족에게 있다.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은 그렇게 작동한다. 최소한 2023년까지는 말이다.
이후
▲ 요양원을 알아볼 때의 메모들. | |
ⓒ 김성희씨 제공 |
성희씨의 아빠가 쓰러진 이후 1년 3개월이 지났다. 수술 등을 거친 그는 현재 간단한 일상 생활이 가능한 상태로, 요양병원에 머물고 있다. 매달 5일이면 요양병원 입원비를 내라는 문자가 온다. 이따금 아빠를 찾는 고모가 부기가 빠진 아빠의 두개골이 움푹 패여 보기 흉하다고 말해준다. 성희씨는 그런 아빠의 모습에 어떤 감정이 밀려들지 두려워서 병원을 찾지 않는다. 아직도 그때 겪었던 것들이 소화불량이다. 아빠를 향한 원망과 연민이 뒤섞여있고, 의료나 복지 행정 과정에서 겪은 무력감과 모멸감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때때로 거리에서 아빠와 비슷한 체형의 사람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그럼 그 사람의 걸음이나 몸짓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마치 아빠가 나타난 듯하고, '아빠가 잘살았다면 저렇게 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빠는 왜 저 사람처럼 살지 못했을까? '최소한의 책임'을 다 한 뒤, 성희씨는 1년 3개월 동안 아빠를 마주하지 않았지만, 매일 거리에서 아빠를 발견한다. 어느새 성희씨의 일상은 '흙탕물'이 됐다. 지금은 맑고 투명한 것 같지만, 또 아빠 일이 터지면 가라앉았던 흙이 다시 떠오른다.
"제가 거기 간 이유는 아빠 핸드폰에 '첫째 딸'이라고 저장돼 있어서예요. '네가 가족이니까 무조건 해야 돼'라는 기준 때문에 아빠를 더 미워하게 된 것 같아요. 만약에 선택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아빠가 아니라 내가 갑자기 '사고'를 당한 기분이에요."
혹자는 돌봄을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성희씨도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를 돌봤다면 기꺼이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을 강제로 떠맡는 경우는 없다. 대등한 관계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사랑이다. 돌봄을 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맡는 것은 그런 의미다. 내가 온전히 선택할 수 있어야, 돌봄은 서로가 떠넘기는 '폭탄'이나 일상을 뒤흔드는 '사고'가 아닌 사랑이 된다.
우리는 일상에 가라앉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흙탕물을 만들 수 있는 '흙'에 주목해야 한다. 모두, 누군가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돌봄과 부양의 책임이 가족에게만 전가되는 게 온당할까? 어떻게 사회가 돌봄과 부양의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성희씨와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찬찬히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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