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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감동적인 장면 뒤에 펼쳐진 또 다른 장면 2. 대미굴종이 불러온 정신착란 3. 되돌이현상을 일으킨 결정적 원인 4. 통일방안논의에서 제기된 새로운 쟁점
1. 감동적인 장면 뒤에 펼쳐진 또 다른 장면
2000년 6월 3일 오전 6시경 판문점에서 조선인민군 소속 헬기 한 대가 아침햇살을 받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금 승용차를 타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선 남측 인사 세 사람이 그 헬기를 탔다. 그들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 김보현 당시 국정원 대북전략국장, 서훈 당시 국정원 정보관리실장이었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방문을 열흘 앞두고 파견한 특사단이었다. 판문점에서 헬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한 특사단은 다시 북측 특별기를 타고 신의주로 날아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신의주 근교에 있는 초대소에서 대북특사단을 접견했다. 2008년 서울에서 출판된 임동원의 회고록 ‘피스 메이커: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에 따르면, 임동원 특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제기할 여러 의제들에 관해 근 한 시간 동안 길고 자세하게 설명했는데,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은 조국통일방안과 주한미국군문제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임동원 특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남과 북이) 상호 긴밀히 협조하는 기구인 ‘남북연합’을 제도화하여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민족경제공동체를 형성, 발전시키는 한편 군비통제를 실현하여 냉전의 잔재를 청산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등의 중차대한 당면과제들을 시행해나가자는 것이 대통령의 뜻입니다. (중략) 대통령께서는 주한미군의 위상에 대해서도 북측이 전향적으로 사고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균형자와 안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주한미군이 현재뿐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날 김대중 대통령은 위와 같은 자신의 견해를 대북특사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한 것인데, 이것은 11일 뒤에 열릴 남북정상회담이 그리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징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보다 앞서 2000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은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을 통해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에게 평양방문의사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했고, 장쩌민 주석은 2000년 3월 5일 황쥐(黃菊) 당시 상하이 당서기를 특사로 평양에 파견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의사를 전달했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이후 어느덧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남북공동선언이 세 차례 더 발표되었다.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북남)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발표되었고,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한(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이 발표되었고, 2018년 9월 19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된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될 때마다 삼천리강산에 통일열망이 물결쳤지만, 남북공동선언 합의사항들은 이행되지 않았고, 잠시 개선된 듯하던 남북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반목과 대결로 되돌아갔다.
왜 이런 되돌이현상이 지난 20년 동안 반복되었을까? 그 원인을 찾으려면, 원초적 경험을 분석,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원초적 경험이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을 뜻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당시 텔레비전실황중계방송을 통해 방영된 남북정상회담의 감동적인 장면들이 남아있지만, 그 감동적인 장면들 뒤에서 또 다른 장면들이 펼쳐졌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장면들을 분석, 고찰하면, 지난 20년 동안 반복된 되돌이현상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진 1>
첫째 장면은 2000년 6월 6일 웬디 셔먼(Wendy R. Sherman) 대조선정책조정관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 검열단의 서울방문이다.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서울을 방문한 검열단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고, 당시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총괄하고 있었던 임동원 국정원장도 만났다. 그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을 연달아 만난 목적은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검열하기 위해서였다.
임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은 웬디 셔먼은 임동원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임 원장께서 보스워스 대사(당시 주한미국대사-옮긴이)를 통해 사전에 모든 것을 솔직하게 미국 측에 알려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모두 신뢰하고 있으며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셔먼이 그렇게 말한 것을 들어보면, 당시 청와대가 임동원-보스워스 연락선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에 관한 “모든 것”을 백악관에 “솔직하게” 보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어느 나라에서나 정상회담준비는 비밀리에 추진되는 법이다. 그런데도 대미굴종이 체질화된 청와대는 남북정상회담준비에 관한 모든 기밀사항을 지속적으로 백악관에 보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악관은 남북정상회담준비에 관한 청와대의 자세한 보고를 받아보았으면서도 우려와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백악관은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일주일 전에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을 직접 검열하기 위해 클린턴 대통령이 지명한 검열단을 서울에 급파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 6월 당시 백악관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앞두고 무엇을 그토록 우려했던 것일까? 임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백악관은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몰래 주한미군철수라든가 평화협정체결과 같은 과감한 합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지 (중략) 우려와 의혹을 줄곧 제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0년 6월 당시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에 조성된 분위기를 분석,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백악관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회유, 설득하여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을 밀약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면서 의혹의 눈총을 보냈지만, 그것은 백악관의 고질적인 의심증이 빚어낸 촌극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이 반대하는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을 밀약하려는 생각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는데, 의심증이 도진 백악관은 자기들이 직접 검열하기 전에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은 검열단을 서울에 급파했던 것이다.
위에 인용한 임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검열단 단장 웬디 셔먼은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준비사업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우려가 말끔히 해소되었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도대체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이 웬디 셔먼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미국 검열단의 우려가 말끔히 해소되고, 감사인사까지 받은 것일까? 임동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은 미국 검열단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주한미군은 통일 이후에도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안정자, 균형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민족이익에 부합한다는 기조로 북측을 설득하겠다”고 미국 검열단에게 말했다. “그리고 한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우방은 미국이며, 굳건한 한미동맹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이 김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그들(미국 검열단-옮긴이)을 안심시켰다.”
2. 대미굴종이 불러온 정신착란
위의 인용문은 청와대의 대미굴종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말해준다. 그들의 대미굴종은 우리나라가 통일된 이후에도 주한미국군이 동북아시아의 균형자로 계속 주둔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궤변으로 표출되었다. 청와대의 대미굴종은 궤변을 진리로 믿어버리는 정신착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1) 주한미국군은 우리 민족의 조국통일운동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주한미국군은 평양에 침투하여 최고지도부를 제거하려는 이른바 ‘참수작전연습’을 계속할 뿐 아니라, 선제핵타격으로 북을 파멸시키려는 북침전쟁연습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한미국군이 남아있는 한 조국통일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다. 그러나 백악관에 굴종하는 청와대는 주한미국군이 주둔해야 통일이 실현될 것이라는 궤변을 진리로 믿고, 통일이 실현된 이후에도 주한미국군이 계속 주둔할 것이라는 궤변을 진리로 믿는다. 이 정도라면, 오판이 아니라 정신착란이다.
2) 지금 미국은 대만문제와 남중국해문제를 비롯한 중국의 내정에 부당하게 간섭하면서 위협적 군사행동을 증가시켜 중국을 극도로 자극하고, 동아시아정세를 무력충돌계선으로 끌어가고 있다. 그런 무력충돌을 불러일으킬 촉발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한미국군이다. 예를 들면, 전라북도 군산공군기지에 주둔하는 미국태평양공군 제7공군 제8전투비행단은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의 최강, 최대함대인 북해함대가 주둔하는 산둥성 칭다오(靑島)에서 560km 떨어져있다. 군산공군기지에 상시주둔하는 미국 제7공군 F-16 전투기가 이륙하면 14분 만에 북해함대 상공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급박한 정황은 주한미국군이 중국인민해방군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주한미국군을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규정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현실이 이런데도, 백악관에게 굴종하는 청와대는 주한미국군이 동북아시아의 안정자이며 균형자라는 궤변을 진리로 믿는다. 이 정도라면, 오판이 아니라 정신착란이다.
3) 주한미국군의 장기주둔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이 실현되지 못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것은 우리 민족의 이익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인데, 백악관에 굴종하는 청와대는 주한미국군의 장기주둔이 우리 민족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궤변을 진리로 믿는다. 이 정도라면, 오판이 아니라 정신착란이다. <사진 2>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30일 원산초대소에서 재미동포 언론인 문명자 주필과 진행한 단독회견에서 “통일 후에도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 (중략) 등이 보도되어 사실 김 대통령에 대한 인민들의 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균형자론’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중에 주한미국군의 즉각적인 철수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설명을 듣고 부분적으로 납득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물은 문명자 주필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 동안 미군더러 나가라고 했지만, 그들이 당장 나가겠습니까? 우선 미국 스스로가 생각을 달리 해야 합니다. 그들은 분단에 책임이 있는 것만큼 통일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날 닉슨도 카터도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는데, 주한미군문제는 우선 그들 스스로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돕는 방향에서 알아서 결정해야 합니다.”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면 주한미국군이 반드시 철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미국에게 철군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라고 촉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을 수행하여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과 박지원 현 국정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의 ‘균형자론’에 동의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했다.
3. 되돌이현상을 일으킨 결정적 원인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은 백악관이 결정할 문제이지 청와대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며, 조미정상회담에서 해결할 문제이지 남북정상회담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청와대는 그 두 가지 문제를 결정할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에 관해 논의하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2007년 10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두 문제를 논의하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2015년 10월 1일 보도에 따르면, 2007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평화협정문제를 꺼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화협정문제는 조미정상회담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하면서 그 문제를 논의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 대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미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사전조치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권유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지 부쉬(George W. Bush) 대통령을 설득해서 종전선언을 발표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권유했던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렇게 권유했다는 사실은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3년 7월 25일 국회 정보위원회는 국정원이 전날 배포한, 2007년 10월 3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언론에 공개했는데, 회의록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권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얼마 전에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화할 때 종전선언문제를 언급했다는 말이 지금 돌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종전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작으로 될 수 있다고 보면 어떻겠는가 나는 생각합니다. 조선전쟁에 관련 있는 3자나 4자들이 개성이나 금강산 같은 데서 분계선 가까운 곳에 모여 전쟁이 끝나는 것을 공동으로 선포한다면 평화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께서 관심이 있다면, 부시 대통령 하고 미국 사람들과 사업해서 좀 성사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그런 조건이 될 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완전히 바꾸는 게 어떻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진 3>
노무현 - “각하께서 조금 전에 말씀하실 때 한반도 평화체제 내지 종전선언에 대해서 말씀을 빠뜨리신 것 같습니다.” 부쉬 - “나는 (종전선언문제가) 김정일 북조선 지도자에게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검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핵무기와 핵무기개발사업을 없앤다면, 미국은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이나 한국 국민들은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부쉬 - “대통령 각하, 나는 더 이상 말할 게 없습니다. 우리는 코리아전쟁을 종식시킬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핵무기와 핵무기개발사업을 검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없애야 (코리아전쟁이) 종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은 그는 통역관이 자기의 말을 통역하자마자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노무현 대통령과 악수하고 퇴장해버렸다.)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부쉬 대통령의 전략방침은 조선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해야 종전선언을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백악관에게 있어서 종전선언발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조치가 아니라 조선을 핵포기로 이끌어가려는 한낱 유인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쉬 대통령의 그런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종전선언발표로 평화체제가 수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부쉬 대통령에게서 종전선언문제에 관한 언약이라도 받아보려고 하다가 무안만 당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바랐던 종전선언이 평화협정과 분리된 고립적 사안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분리시킨 까닭은, 평화협정체결로 주한미국군이 철수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군만이 아니라 감군도 반대했다. <조선일보> 2016년 12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2003년 6월 당시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였던 리처드 롤리스(Richard P. Lawless)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김희상 당시 국방보좌관과 반기문 당시 외교보좌관에게 주한미국군 37,500명 중에서 12,500명을 2006년까지 단계적으로 감축하겠다고 통보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감축문제를 통보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였고, 2003년 7월 부쉬 대통령에게 그해 10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협의할 때까지 감축문제를 일절 논의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과 똑같이 ‘균형자론’을 주장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똑같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분리시켰다. 이를테면,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26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 뉴스>와 대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전선언이 이루어진다면 유엔사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거나 또는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된다는 어떤 압박을 받는 것이 아니냐 라는 의심이 일부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전선언은 지금 한국이 65년 전에 정전협정을 체결하고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채 정전상태로 65년이 흘러왔기 때문에 이제라도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전쟁을 종료하겠다는 하나의 정치적 선언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평화협정이 되려면 다시 평화협상이라는 과정을 거쳐 평화협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는 정전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엔사의 지위라든지 주한미군의 지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화협정이 체결되더라도 주한미군은 전적으로 한미동맹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평화협정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지금 주한미군은 남북관계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대북억지력으로 큰 역할을 하지만 나아가서는 동북아 전체의 안정과 평화를 만들어내는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래서 나는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심지어는 남북이 통일을 이룬 이후에도 동북아 전체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했으며, 남북교류협력을 추진했다. 이런 경험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가 대북적대감에 사로잡혀 광분했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와 다르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뇌리 속에 새겨주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는 대북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면서도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와 똑같이 북침전쟁연습에 집착했으며,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와 똑같이 미국에게 굴종했다. 북침전쟁연습과 대미굴종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침전쟁연습과 대미굴종이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가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의 중대한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고, 남북공동선언을 불이행으로 몰아갔으며, 일정기간 추진되던 남북교류마저 중단시켰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일시적으로 개선되던 남북관계를 반목과 대결로 돌려세운 되돌이현상의 결정적 원인이다.
4. 통일방안논의에서 제기된 새로운 쟁점
지난 20년 동안 되돌이현상이 반복된 원인을 찾으려면, 2000년 6월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을 분석, 고찰해야 하는데, 그 원초적 경험의 두 번째 장면은 2020년 4월 7일 <연합뉴스>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보도기사에는 2000년 6월 당시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상임연구위원이었던 김달술이 노환으로 별세하였음을 알리는 부고내용이 담겼는데, 부고내용과 함께 들어있는 회고담에 시선이 집중된다.
보도기사에 들어있는 회고담에 따르면,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9일 전인 2000년 6월 4일 청와대에서 남북정상회담 모의회담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4시간 동안 진행된 모의회담에서 김달술 당시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상임연구위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역을 맡았고, 정세현 당시 통일부 차관은 김용순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장의 대역을 맡았다고 한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모의회담이 진행된 까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제기할 중대한 의견들에 맞서는 반대의견을 미리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별세한 김달술을 추모하는 발언을 하던 중에 2000년 6월 4일 청와대에서 모의회담을 마치고 고인이 “DJ(김대중을 지칭하는 영어대문자-옮긴이)가 빨갱이가 아니구먼. 김정일(국방위원장)한테 안 밀리겠어”라고 말했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제기할 중대한 의견들에 맞서는 반대의견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청와대에서 모의회담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와대가 모의회담에서 준비한 반대의견들 가운데는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위에 서술한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그 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은 모의회담에서 준비한, 주한미국군철수에 관한 반대의견을 굳이 꺼내놓았다. 자기들 몰래 철군문제를 밀약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한 백악관을 안심시키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은 굳이 꺼내놓지 않아도 되는 문제를 일부러 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주한미국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최대 쟁점으로 제기될 것으로 보았던 청와대와 백악관의 예상과 달리, 회담에서 가장 큰 쟁점으로 제기된 것은 조국통일방안에 관한 문제였다. 임동원의 회고록에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주고받은 다음과 같은 대화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번에는 첫째로 민족자주의지를 천명하고, 둘째로 통일문제와 관련해서는 연방제통일을 지향하되 ‘낮은 단계의 연방제’부터 하자는 데 합의하십시다. 그리고 셋째 항에는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즉각 개시하여 정치, 경제, 사회문제를 함께 풀어나가자는 정도로 합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2체제 연방제 통일방안은 수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남북연합제’라는 것은 ‘2체제 2정부’의 협력형태를 의미하는 겁니다. 어쨌든 통일문제는 앞으로 더 논의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통일 이전 단계에서 남과 북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지금 당장 할 일이 무엇인가를 합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제’가 바로 제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같은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완전통일은 10년 내지 20년은 걸릴 거라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완전통일까지는 앞으로 40년, 50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말은 연방제로 즉각 통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냉전시대에 하던 얘기입니다. 내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건 남측이 주장하는 ‘연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하자는 개념입니다.”
“통일방안은 여기서 합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남북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대해 앞으로 계속 논의하기로 합의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뜻이 같은 것이니까, 낮은 단계 연방제로 남북이 협력해나가자고.”
“북이 낮은 단계 연방제를 제의했고 남이 남북연합제를 제의했는데 말씀하신대로 양자 간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함께 논의해나가자는 것으로 합의합시다.”
“좋습니다. 그럼 그 정도로 합의합시다.”
위의 대화록을 읽어보면,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려고 하였으나, 김대중 대통령은 조국통일방안을 합의하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텼음을 알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통일의지가 없으므로 그가 통일방안논의 자체를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통일의지가 없어서 통일방안논의 자체를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 연방제에 대해 설명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낮은 단계 연방제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설명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 4>
1)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행사하는 외교권과 군사권을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급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낮은 단계 연방제를 실현한 후에 외교권과 군사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하게 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2) 남측 자본주의체제와 북측 사회주의체제를 하나로 만드는 체제단일화문제와 관련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 연방제를 실현한 이후에 오랜 세월에 걸쳐 남북의 체제가 점진적으로 단일화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상이하고 대립적인 두 사회체제를 급진적으로 단일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점진적으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과 북의 외교권과 자주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문제, 그리고 남과 북의 사회체제를 점진적으로 단일화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견해와 김대중 대통령의 견해는 일치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기한 남북연합제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기한 낮은 단계 연방제에서 위와 같은 점진적 통합과 점진적 단일화는 공히 수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견이 상충되는 지점은 어디였을까? 김대중 대통령의 주장대로, 만일 남과 북이 두 국가로 분렬되어 남북연합제가 실현되면, 두 국가의 외교권과 군사권은 언제가도 통합될 수 없다. 두 국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한다는 말은 국가의 자기중심적 성격을 모르는 무지의 발로다. 외교권과 군사권은 두 국가로 분렬되지 않은 낮은 단계 연방제 안에서만 점진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주장대로, 남과 북이 두 국가로 분렬되어 남북연합제가 실현되면, 두 사회체제가 점진적으로 단일화되기는커녕 두 사회체제는 끝없이 대립할 것이다. 두 국가가 상이하고, 대립적인 사회체제를 점진적으로 단일화한다는 말은 궤변이다.
위와 같은 맥락을 이해하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조국통일방안이 합의되지 못한 것은 통일국가건설문제에 대한 견해가 상충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 연방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그 통일국가 안에서 남과 북의 외교권과 자주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하고, 남과 북의 사회체제를 점진적으로 단일화하는 조국통일방안을 제시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국가건설을 반대하고 남과 북이 두 국가로 분렬된 남북연합제를 세우는 분리독립방안을 주장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주장한 남북연합제방안은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게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조국통일방안을 논의하는 데서 제기된 쟁점은 남과 북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문제도 아니었고, 남과 북의 사회체제를 점진적으로 단일화하는 문제도 아니었다. 쟁점은 남과 북이 낮은 단계 연방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할 것인가 아니면 두 국가로 분렬되어 남북연합제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쟁점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남북관계는 일시적으로 개선되다가도 얼마 가지 않아 반목과 대결로 돌아가는 되돌이현상을 반복해온 것이다.
남과 북이 낮은 단계 연방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민족사 최고, 최대의 과업은 결코 점진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통일국가건설은 민족의 생사존망을 좌우하는 역사적 위업이므로, 건설과정에서 2~3년씩 시간을 끌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앞으로 남측에 통일의지를 가진 새로운 정부가 세워진다면, 남과 북은 통일과정에 진입한 후 6개월 안에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열망하는 조국통일의 실체는 통일국가건설이며, 통일국가는 급진적으로 건설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통일학의 정세전망이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분석] 차기 총리, 스가 관방장관 가능성 있어...한일 관계는 크게 바뀌진 않을 것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사임 이후 한일 관계 개선 가능성에 대한 여러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후임자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아베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됐다.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는 30일 <프레시안>과 통화에서 "지금 아베 이후에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정치 노선이나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아베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강제 동원 문제 등 한국과 과거사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일본의 원칙을 변경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내다봤다.
남 교수는 "다만 아베가 굉장히 강압적이고 여러 다른 수단을 동원해 한국을 압박한다는 방침을 보였는데, 이러한 외교 수법 등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점에서는 변화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은 한국과 관계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며 "그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일이 있으면 고민해보자는 모습은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남 교수는 "우리는 일본을 상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 예컨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해석을 어떻게 우리 쪽에 가깝게 끌어올 것인지에 대해 항상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에서는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9일(현지 시각) 미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아베 총리의 후임자가 직면하게 될 도전 중 하나로 한일관계 악화를 꼽으면서, 국제관계 전문가들이 "일본의 다음 총리가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길 바란다"는 희망을 표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호주 국립대의 로런 리처드슨이 한일 간 갈등이 길어질수록 "오직 중국과 북한만이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 간 약화된 동맹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일본과 한국 모두 자유주의 지역 질서 하에서 공통적으로 가지는 이익이 있다"고 말했다며 한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차기 총리는 누구?
한편 아베 총리의 후임으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자민당 정조회장, 고노 다로(河野太郞) 방위상 등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가운데 아베 총리가 이시바 전 간사장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기 않기 위해 사임 타이밍을 잡은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남기정 교수는 "이시바는 아베와 사사건건 대립해왔던 인물이다. 그런데 자민당 총재가 되면 그동안 입혀졌던 아베의 색을 수정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아베는 총리를 그만두지만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서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을 텐데 이시바가 들어오면 바꾸려고 할 것이므로 이시바가 되기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아베가 임기를 1년 정도 남겨 두고 도중에 하차했다. 이럴 경우 새로운 총리는 자민당 전당대회에서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양원(참의원, 중의원) 의회에서 뽑게 된다"며 "양원 총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아베가 공천을 준 소위 '아베의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바에게는 이러한 형식의 투표로는 총리가 되기 굉장히 어렵다"고 분석했다.
남 교수는 "지금 총리의 잔여임기가 1년이고 그 이후에는 전당대회를 하게 된다"며 "이시바는 그 전당대회에서 승부를 보고 이번에는 무리하지 않는 전략을 취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 이시바 전 간사장의 경우 과거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 아베 총리와 맞서기도 했으며 여론 조사에서도 차기 선호도 1위에 꼽히는 등 당원 및 대중 지지 기반이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의원 지지 기반이 약해 양원 의회에서 차기 총리를 선출하면 불리한 상황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남 교수는 총리의 잔여 임기를 채우는 이른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총리로 스가 관방장관이 선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스가 장관에 대해 "본인은 누구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왔고 당내 파벌도 따로 없다"며 그가 중간 역할을 할 총리로 선출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아베 총리와 가까운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에 대해 남 교수는 "기시다는 자민당 정조회장이라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는데도 존재감이 굉장히 약하다. 정치가의 능력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만일 지휘봉을 잡았을 때 자민당이 다음 선거에서 잘할 수 있을 것이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라며 후임 총리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평가했다.
일부에서는 아베 총리의 장기집권 이후 이렇다 할 구심점이 없어진 일본 상황에서 1~2년에 한 번씩 지도자가 교체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아베 총리의 후임자 중 누가 충분히 권력을 오래 가져갈 수 있을 것인지가 가장 큰 우려"라며 "2012년 아베 총리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일본의 정치지도자는 매우 자주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셰일라 스미스 미국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신문에 "심지어 워싱턴에서도 '맙소사, 일년에 한 번씩 총리가 돌아가는 거야?'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 정계가 혼란스러운 시간으로 접어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남 교수는 "아베 집권 시기 소위 '2인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키우지 않았다. 도전하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며 지도자의 잦은 교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83014262257583#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문재인 정부 철학 없이 부동산 대증요법 반복…“노무현 트라우마 이해하지만 매우 실망스러워, 이낙연·김부겸·이재명 누구든 국토보유세+토지배당 공약 필요”
“문재인 정부에선 부동산·토지 정책의 철학을 볼 수 없어요. ‘부동산 문제=아파트값 상승’으로 보고 시장 상황만 잠재우고, 잠재우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의 지적은 매서웠다. “철학이 없고, 때문에 정책이 모호해졌으며, 결국 개혁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현상만 좇다 보니 대책을 남발하고 역대 정부에서 볼 수 없던 유동성 압력 속에서 온갖 풍선효과가 따라왔다는 게 전 교수 생각이다.
전강수 교수는 대표적인 조지스트다. 토지를 개인이 소유하면 불로소득이 발생하고 부의 집중에 원인이 되니,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해 공공 이익에 쓰자는 19세기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헨리 조지를 연구하는 국내 대표적 경제학자다. 전 교수는 부동산 전문가이자 실천적 지식인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위원장,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지난 25일 <민중의소리>와 만난 전강수 교수는 “이번 정부에선 개혁적인 부동산 정책이 나오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문재인 정부가 재산세는 올리지 않고 종부세 선별적 강화나 대출 규제 등 기존 정책 조합에 집중하는 한, 지금 투기판을 뒤엎을 새로운 정책은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 전 교수 판단이다.
7·10대책에서 일부 보유세 강화 방안이 나왔지만 종부세 납부 대상자가 워낙 제한적인 데다 1주택자의 보유세는 오히려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정부 감지되고, 사금융인 전세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규제가 나오지 않았다고 전 교수는 지적했다.
8·31 공급대책이 수도권에 있는 국공유지를 대거 민간에 분양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공공임대주택 등 정책을 펼쳐야 할 땅을 민간에 넘기는 것은 절대로 집값 안정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전강수 교수는 “다음 대선 후보가 누가 되든, 정공법인 보유세 강화 정책이 강력하게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전 교수가 2000년대부터 제시한 정공법은 ‘국토보유세’다. 국토를 소유한 사람과 법인 모두에게 세금을 공평하게 걷자는 것이다. 국토는 사람이 만들지 않았고 생산할 수 없다. 하지만 국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물과 공기처럼 국토의 권리를 모든 국민이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국토보유세 신설을 위해 극소수 부동산 거부들에게만 부과하는 종부세를 폐지하고, 모든 토지를 용도 구분 없이 인별 합산해 일괄 과세하자는 게 전 교수 주장이다. 보유한 토지는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과세표준을 산정하고 과세표준 금액에 따라 세율 구간을 0.1~2.5%까지 신설해 ‘공평과세’ 하자는 구체적 계획도 나와 있다. 이 경우 현행 종부세보다 약 15조5천억원의 세금이 더 걷히는 것으로 계산된다.
토지를 보유하는 세금이 무겁게 매겨지고, 가격이 높아지는 만큼 세금도 따라 오른다. 취득·보유·양도 등 각 단계에서 매겨지는 온갖 종류의 감면 혜택 등은 모두 폐지한다. 땅을 가져서 생기는 불로소득이 원천 차단되는 것이다. 투기 세력이 기대하는 수익률을 대폭 끌어내리고 자연스럽게 수요를 차단한다.
혁신적 과세 개혁이라 반발이 예상된다. 전 교수는 “거둬들인 국토보유세는 1/n로 나눠 전 국민에게 ‘토지배당’하면 조세 저항이 현저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극히 일부만 내는 종부세 세율을 조금만 올려도 ‘세금 폭탄론’이 등장하는 지금 여론 지형에선 조세 저항이 광범위하게 확산하지만, 국토보유세로 거둬들인 세금이 국민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가면 저항이 낮아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최근 코로나19사태를 거치며 긴급재난지원금이 전 국민에게 지급되면서 ‘기본소득’에 대한 효과와 인식이 변화된 것도 국토보유세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 교수는 보고 있다. 그는 “이낙연이든, 김부겸이든, 이재명이든, 차기 대권 주자의 대선공약에 꼭 포함돼 이 문제가 공론화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토보유세가 집값을 잡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전 교수는 “세금 하나로 집값이 잡힐 것이란 것 완벽한 환상이다. 다만, 토지와 이에 따른 불로소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철학을 분명히 하고, 보유세 강화라는 정공법으로 가면, 집값은 잡힐 수밖에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세간에서 우려하는 ‘부동산 거품 붕괴’나 ‘경착륙’ 우려에 대해서는 “이미 수십 년간 부동산 시장과 씨름한 베테랑 관료 역량이 있다. 시장 경색을 푸는 다양한 정책 패키지를 고려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7·10 대책 효과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효과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아파트를 제외한 나머지 상가와 오피스텔·빌라 등의 가격이 오름세를 보이지 않나. 유동성 압력은 어디로든 튀어 나가려고 한다. 어떻게든 투기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부동산감독원’에 대해서는 “정공법은 두려워서 못하고, 다른 곳에서 답을 찾으려니 엉뚱한 정책이 나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20-20 / 음주운전 ①] 윤창호법 시행 후 음주운전 사고 1000여 건 줄었지만
창간 20주년 기획 '지나간 20년, 앞으로 20년(20-20)'을 선보입니다. 2020년 현재, 2000년을 돌아보며 2040년을 그리려 합니다. 사회 각 분야별로 지난 20년 동안 성과는 무엇인지, 그럼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또 무엇인지, 전문가와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가 마흔 살이 됐을 때 좀 더 나은 사회가 되려면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 기대하겠습니다. [편집자말] |
"회식 후 택시를 탔는데 술 냄새가 상당히 났다. 궁금증은 곧 풀렸다. 내가 탄 택시 기사가 '상당한 음주'를 한 때문이었다. '음주운전하는 택시는 처음 본다'고 말하자, 기사 아저씨는 '기분 상한 일이 있어 조금 마셨다'는 설명이었다. 집에 오는 내내 불안했다. 차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정도였다."
2000년 4월 14일 <한국경제>에 올라온 경험담이다. 그랬던 시절이다. 2000년 한 해에만 2만8074건의 음주운전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1217명이 사망했다. 매일 하루에 3.3명씩 음주운전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20년이 지난 현재는 하루에 한 명꼴로(2019년 사망자 수 295명) 음주운전 교통사고 사망자가 집계되고 있다. 사고도 절반 수준인 1만 5708건으로 감소했다.
[윤창호법 시행 전후] 9676건 → 8645건으로 줄어... 사망자도 31명 감소
▲ 2018년 11월 10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부산국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윤창호씨 빈소에서 윤씨 친구들이 아버지 품에서 오열하고 있다. | |
ⓒ 연합뉴스 |
일단 법은 강화됐다. 2018년 12월 18일 '제1윤창호법(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시행됐다. 음주운전 사망 사고를 내면 최소 3년에서 최대 무기징역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처벌 강화가 골자였다. 2019년 6월 25일부터 시행된 '제2윤창호법'인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통해서는 음주운전 기준(음주 기준인 혈중 알코올 농도를 0.05%에서 0.03%로 낮춤)을 강화했다.
20대 청년 윤창호씨의 사고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윤씨는 2018년 9월 25일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졌고, 그 해 11월 9일 끝내 숨지고 말았다. 윤창호씨의 친구들은 음주운전 관련 법 개정을 호소했고,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렸으며, 하태경 미래통합당 의원(부산 해운대구갑, 당시 바른미래당 소속)이 대표 발의해 일명 '윤창호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음주운전은 실수가 아닌 살인 행위입니다.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위법이 음주사고라 하여 가볍게 처벌되어서는 안 됩니다. 음주운전 사고에 대한 양형 기준을 높임으로써 국민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가 담긴 답변과 대책을 청원합니다. (2018년 10월 2일, 윤창호씨 친구들이 올린 국민청원 중)
그들의 구체적인 호소가 시민을 움직이고 국회를 움직였다. 법 시행 이후 변화 또한 명확해 보인다.
<오마이뉴스>는 제2윤창호법까지 시행된 2019년 6월 25일을 기점으로 시행 전후 사고 및 사망 건수를 경찰청에 정보공개 청구했다. 그 결과 같은 시기 사고는 1031건, 사망은 31건 줄었다. 2018년 6월 25일~2018년 12월 31일 사고 건수는 9676건이었으나 2019년 6월 25일~2019년 12월 31일까지 발생한 사고 건수는 8645건이었다. 2018년 하반기에는 178명이 사망했으나 2019년 하반기에는 147명이 사망했다. 높아진 음주운전 기준과 처벌 강화가 이뤄낸 성과로 보인다.
21대 국회의원 중 음주운전 경력은 누구?
▲ 2018년 11월 29일 음주운전 처벌 강화 방안을 담은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이른바 "윤창호법"이 재석 250인 중 찬성 248인, 기권 2인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 |
ⓒ 남소연 |
그러나 음주운전 사고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처벌 강화뿐 아니라 음주운전 예방을 위한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 또한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국회에서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지난 3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음주운전을 잠재적 살인미수라 여기는 분위기와 함께 2018년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윤창호법이 통과됐지만 다수의 후보자가 음주운전으로 인한 전과 경력을 갖고 있었다"라며 "단적으로 유권자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라고 꼬집은 바 있다.
그 결과는 21대 국회에 어떻게 나타났을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공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모두 23명이 음주운전 전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민주당 소속은 12명, 통합당 소속은 11명이었다. 특히 이용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양천구을), 김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안산시 상록구을), 허은아 미래통합당 의원(비례대표) 등은 음주운전 전과가 각각 2회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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