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이 ‘선거제도 개혁’을 좌초시키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기상천외한 지연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다른 정당과 정치 협상은 뒷전으로 미루고 무작정 시간부터 끌겠다는 꼼수인데 그동안 자유한국당이 어떤 방해 공작을 펼쳐 왔는지 들여다보면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기득권 집착의 속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막장 대치’ 서막, 육탄저지
지난 4월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에서 선거제도 개혁안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유한국당은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은 보좌진과 당직자를 총동원해 회의가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회의장들을 불법 점거했다.
회의장을 차지하는 방법도 갖가지였다. 회의실에서 의원총회를 연 뒤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아예 그곳의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샘 농성을 했다.
회의장 안을 봉쇄하는 것만으로 부족했던 자유한국당은 회의장 밖도 점령했다. 인간 띠를 만들어 문 앞을 가로막거나 대놓고 드러누웠다. 비켜 달라 요청하는 다른 정당 소속 정개특위 의원들에게 “헌법 수호” “독재 타도” 등 구호를 외치거나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합창하는 수법으로 응수했다. 당시 회의장 점거를 위해 물리력을 행사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고소·고발당해 총선 전 검찰 출석 압박을 받는 상황에 처해있다.
29일 밤 시작된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가 자정을 넘겨 종료됐다. 자유한국당 김재원 의원은 이날 기표소에서 10분가량 투표를 고민했다. 2019.04.30ⓒ뉴스1
◆표결 끝자락까지 ‘진풍경’ 연출, 기표소 점거한 김재원
선거제도 개혁안은 4박 5일의 동물 국회 끝에 패스트트랙에 안착했다. 심상정 당시 정개특위 위원장은 자유한국당의 회의 방해에 맞서 질서유지권까지 발동해 전체회의를 개의했다. 회의장 기습 변경에 허를 찔린 자유한국당은 마지막까지 총력을 다해 지연술을 펼쳤다.
그중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자유한국당 김재원 의원의 ‘기표소 점거’였다. 김 의원은 패스트트랙 찬반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기표소에 들어갔다가 10분 동안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심상정 위원장이 김 의원에게 “손이 떨리셔서 (투표를) 못하시는 모양”이라고 질타하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김 의원이 무엇을 찍을지 장고 중’이라며 감쌌고, 같은 당 장제원 의원은 “비밀투표를 하고 싶다”며 기표소를 하나 더 설치해달라는 황당 요구까지 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자유한국당 장제원 간사가 28일 국회에서 브리핑을 열고 정개특위 안건조정위에서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선거법 개정안을 표결 처리한 것과 관련해 비판하고 있다. 2019.08.28ⓒ정의철 기자
◆정치 협상 불응하고 ‘법적 대응’ 들어간 자유한국당
선거법이 패스트트랙에 오른 뒤에도 자유한국당의 몽니는 계속됐다. 지난 6월 정개특위 시한을 볼모로 특위 해산을 촉구하거나 국회가 정상화될 때까지 정개특위 소위원회를 열지 못하도록 어깃장을 놓았다.
이후에는 정개특위 위원 구성을 쟁점화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당시 원내대표는 정개특위와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 구성이 잘못됐다며 돌연 위원장 교체와 소속위원 수 조정을 요구했다. 이는 선거제도 개혁을 주도한 심상정 정개특위 위원장을 끌어내려는 작전으로도 풀이됐다.
위원장 문제가 일단락된 뒤에는 정개특위 선거제 개혁 논의를 주도하는 ‘1소위원장’ 자리를 놓고도 “자유한국당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선거법 표결처리를 앞둔 8월에는 돌연 긴급 안건조정위원회를 신청해 또 다른 시간 끌기에 나섰는데 안건조정위가 구성되면 최장 90일까지 이견 조정을 위한 안건 심사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개특위에서 선거법이 의결된 날에도 자유한국당의 소동은 계속됐다. 나 전 원내대표는 자당 의원들을 정개특위 회의장에 이끌고 나타나 홍영표 신임 정개특위 위원장에게 고성을 치며 거세게 항의했고, 의결에 반발한 자유한국당은 헌법재판소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권한쟁의 심판 청구로 으름장을 놓았다.
장제원 의원은 이제 와 “선거법안 내용을 검토할 시간을 달라” 요구했고, 뜻대로 되지 않자 국회법 해설서를 내던지기까지 했다.
국회 곳곳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월권행위도 포착됐다. 자유한국당 소속 여상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은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선거법에 “중대한 법률적 하자가 있다”며 국회 본회의 자동 부의를 딱 하루 앞두고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부의 연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3일 청와대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2019.11.23ⓒ정의철 기자
◆황교안의 독자노선, 협상 대신 무조건 ‘투쟁’ 일변도
패스트트랙 사태를 기점으로 자유한국당은 국회 일정을 보이콧한 채 ‘전국 순회 장외투쟁’에 나섰다. 국회를 벗어나 시민들에게 패스트트랙의 부당함을 알리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이 때문에 국회 분위기는 경색됐고 장기간 개점 휴업상태에 머물렀다.
자유한국당 장외투쟁의 주축은 황교안 대표이다. 황 대표는 정국이 자당에 불리하게 돌아갈 때면 협상 대신 삭발 투쟁, 단식 투쟁, 연좌 농성 등으로 일관했다. 8개월이 다 되도록 자유한국당이 국회 안팎에서 외치는 주요 구호는 “패스트트랙 원천무효”이다. 황 대표는 현재도 국회에서 ‘나를 밟고 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본회의장 문 앞을 가로막은 채 무기한 연좌 농성 중이다.
황 대표를 따르는 강경파 의원들 사이에서는 패스트트랙 법안 통과를 지켜보고 있을 수 없다며 총선을 4개월 앞둔 상황에서 또다시 ‘의원직 총사퇴’ 카드도 거론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오른쪽)와 김재원 정책위의장이 13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견을 나누고 있다. 2019.12.13ⓒ정의철 기자
◆‘4+1’ 협의체 단일안 도출될까 노심초사, 딴지 걸기 절정
패스트트랙 법안을 처리할 본회의 개의가 임박하자 자유한국당은 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자신들을 제외한 여야 ‘4+1’(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당권파, 정의당, 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가 선거법 단일안을 도출할까 조마조마한 모양새다.
자유한국당은 ‘4+1’ 협의체를 “불법 조직” “좌파 야합 세력” “국회 유린 반민주주의 세력”이라며 매도하고 있다. 민주당에 ‘4+1’ 협의체를 해체하고 자신들과 협상할 것도 요구했다. 나아가 심재철 원내대표는 18일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에게 ‘선거제도를 왜 개정해야 하는지’ 논의할 TV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4+1’ 협의체의 선거법 단일안 도출을 경계해 계속해서 새로운 술책을 꺼내 드는 모양새다.
심 원내대표는 문희상 국회의장이 주재한 교섭단체 여야 3당(민주당·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원내대표 회동에는 불응으로 일관하는 상태다. 그는 문 의장이 선거법이 처리될 임시국회 회기를 민주당의 요구에 따라 3~4일로 짧게 연다면 직권남용과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엄포하고 있다.
본회의가 열린다고 해도 선거법 상정의 길은 깜깜하다. 자유한국당은 아직 민생법안에 신청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철회하지 않았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심재철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이 13일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여당의 패스트트랙 법안 상정 시도를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9.12.13ⓒ정의철 기자
◆막다른 길 ‘자유투표’ 제안, 최후에는 위성 정당 ‘비례한국당’ 창당
자유한국당은 현재 선거법 개정의 ‘부결’을 희망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한국당 원내지도부가 고안한 방법이 ‘4+1’ 협의체의 틈을 벌리는 것이다.
이들은 선거법 개정안을 ‘4+1’ 협의체 단일안 대신 패스트트랙에 오른 원안대로 상정하고, ‘자유투표’를 보장한다면 본회의 표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심 원내대표는 지난 16일 “선거법을 원안으로 상정하면 무기명 투표를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원 정책위의장도 “의원들의 자유투표가 보장되면 (선거법 원안으로) 당내에서 표결 참여를 설득할 것”이라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4+1’ 협의체가 선거법 단일안 도출에 어려움을 겪는 틈을 타 이들 사이를 벌리고 선거법 개혁으로 의석을 위협받는 민주당 의원들의 이탈표를 자유투표로 포석하겠다는 발상이다.
아울러 최근 자유한국당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선거법 저지 최후의 카드는 ‘비례한국당’ 창당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반영되는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지역구는 자유한국당을 찍고, 비례대표용 정당투표는 위성 정당인 ‘비례한국당’에 하도록 하겠다는 꼼수인데 선거제도 개혁의 본래 취지를 깎아내리는 것과 다름없다.
김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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