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창의문(자하문) 근처에 세워진 최규식 총경 동상.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께, 당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은 남파된 북한의 124부대원들을 제지하던 중 순직했다. ⓒ 전상봉
1968년 1월 16일 밤 10시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원 31명이 황해북도 연산군 제6기지를 출발했다. 청와대 습격을 명령받은 이들이 휴전선을 넘은 시간은 1월 18일 자정 무렵이었다. 얼어붙은 임진강을 포복으로 건넌 이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에서 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로 이어지는 능선을 타고 1월 20일 서울 잠입에 성공했다.
북한산 비봉과 승가사를 지나 이들 게릴라부대가 자하문검문소에 도착한 시간은 1월 21일 밤 10시께. 검문하는 경찰에게 CIC 방첩대라고 둘러대고 자하문고개를 넘어선 이들을 가로막은 사람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자 이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군경합동수색진에 의해 1월 31일 사태가 종료되기까지 남파된 124부대원들 중 28명이 사살되었고 2명은 도주했으며 1명(김신조)은 생포되었다. 북한의 도발로 우리가 입은 인명 피해는 사망 32명(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 부상 52명이었다.
1.21사태의 여파는 컸다. 육군3사관학교와 특수부대인 684부대가 창설되었고, 유격훈련이 도입되는 한편 군복무기간이 육군과 해병은 30개월에서 36개월로, 공군과 해군은 36개월에서 39개월로 늘어났다. 향토예비군과 전투경찰순경(전경)이 창설되었고,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교련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해 5월에는 간첩 식별을 용이하게 한다는 이유로 주민등록법이 개정되어 18세 이상의 국민들에게 12자리 번호가 새겨진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현재와 같이 13자리의 번호가 발급된 것은 1975년 7월 주민등록법이 개정되면서다).
북악스카이웨이가 건설된 것도 이때였다. 청와대 방어를 목적으로 건설된 북악스카이웨이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창의문에서 미아리고개를 지나 성북구 종암동에 이르는 7.1km의 2차선 도로로 1968년 9월 28일 완공되었다. 북악스카이웨이가 완공되고 달포가 지난 10월 30일에는 울진삼척무장공비사건이 발생하여 남북 간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서울요새화계획은 이런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발표되었다. 서울시장 김현옥은 1969년 1월 19일 남산을 요새화하고, 강북에 집중된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강남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서울요새화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서울 남산에는 전시에 30만~40만 명이 대피할 수 있는 남산 1,2호 터널이 건설되었다.
영동지구 개발계획
남북이 대치하는 가운데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해방 당시 90만 명 정도였던 서울의 인구는 1950년 169만 명, 1959년 200만 명을 돌파한데 이어 1960년에는 244만 명, 1965년에는 347만 명이 되었고, 1.21사태가 발생한 1968년에는 433만 명을 헤아렸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강남개발의 또 다른 요인이었다. 영동지구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강남개발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68년 시행된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영동1지구)은 경부고속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1971년 시행된 영동 2지구 사업은 강북에 밀집된 인구 분산에 초점이 맞춰졌다.
- ▲ 1968년 시행된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영동1지구)은 경부고속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1971년 시행된 영동 2지구 사업은 강북에 밀집된 인구 분산에 초점이 맞춰졌다. ⓒ 김정은
영동지구 개발의 전체적인 윤곽은 1970년 11월 5일 서울시장 양택식이 남서울개발계획안을 발표하면서 드러났다.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된 남서울개발계획은 인구 60만 명이 거주하는 신시가지를 영동지구에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① 과밀화되고 있는 구시가지의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하고, 서울의 균형발전을 추진한다.
② 남서울의 영동1지구와 2지구를 합한 837만 평의 지역에 1972년까지 167억 원을 투입, 60만 명이 거주할 신시가지를 조성한다.
③ 효과적인 인구 유치를 위해 제1단계로 삼성동 5만 평 부지에 상공부와 한국전력 등 12개 국영기업이 입주할 2만8천 평 규모의 종합청사를 신축한다.
④ 영동지구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다른 정부기관 및 사회단체를 적극 유치하며, 상공부와 산하기관 공무원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용지 30만 평과 별도의 3만 평의 부지에 총무처가 주관하는 공무원 타운을 조성한다.
⑤ 영동지구 면적의 72%에 해당하는 600만 평에 상하수도의 완비와 도로 포장, 전신 전화 가스 공동구 설비, 구릉지대에 자연풍경을 살린 공원녹지 조성하고 학교와 시장, 위락시설의 유치로 현대적인 신시가지를 조성한다. - 손정목, <서울도시계획 이야기3>, 126쪽 요약
영동지구의 전체적인 골격은 격자형 도로망을 구축하면서 짜여졌다. 도로율이 24.6%에 이르는 영동지구는 동쪽의 영동대로와 서쪽의 강남대로를 경계로 몇 개의 슈퍼블록으로 구획되었다. 영동대로(50~70m)와 언주로(40m), 강남대로(50m)는 남북을 잇는 간선도로였고, 도산대로(50m), 테헤란로(50m), 사평로(40m)는 동서를 잇는 간선도로였다. 당시 을지로의 폭이 20m임을 감안하면 너비 40~70m의 광로로 설계된 간선도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이듬해인 1971년 서울시는 영등포구 신동출장소 관할인 반포동과 잠원동 일대의 1백만 평을 개발하기 위해 영동종합개발계획을 수립했다. 재정이 부족했던 서울시는 1971년 4월 24일 거점개발 방식으로 논현동 22번지 소재 7194평의 부지에 12개동의 공무원아파트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12평형과 15평형으로 지어진 360세대의 공무원아파트는 착공 8개월만인 1971년 12월 28일 완공되었다.
해가 바뀐 1972년 5월 서울시는 영동지구에 단독주택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단독주택은 땅값이 저렴하고, 공사하기 용이한 지역에 건설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72년 10개단지 753호와 1973년 4개 단지 181호의 시영주택이 건설되어 분양되었다.
영동지구에 지어진 아파트단지와 단독주택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분양되었다. 공무원아파트의 경우 무상 지원과 융자를 끼면 72만 원이면 입주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교통, 수도, 교육 등 생활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를 팔고 강북으로 되돌아갔다.
서울시는 강남으로 주거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 1972년 4월 '도시개발촉진에 따른 서울특별시세의 과세면제에 관한 특별조례'를 제정했다. 특별조례의 제정으로 주택공사 등 공공기관이 영동지구에 지은 건물에 대해서는 취득세가 면제되었다. 그해 12월에는 특정지구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영동지구에 대한 추가적인 세제 혜택이 더해졌다. 또한 서울시는 거점 개발 단지를 중심으로 시내버스 노선을 배치하여 주거 여건을 개선하였다. 이런 가운데 점차 민간주택이 지어지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청와대와 서울시의 '부동산 투기'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투기 바람을 일으켰다. 부동산 투기는 영동지구 개발 방식과 무관치 않았다.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행했다.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정부는 체비지(替費地)를 확보했고 이중 도로, 공원, 학교 등의 공공용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매각하여 개발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영동지구 사업을 주관한 서울시나 체비지를 내놓은 토지 소유자들 모두 땅값이 오르기를 바랐다.
"예컨대 내가 강남에 땅이 1000평 있을 때 내 땅 500평을 도로용지로 내놓는다면 재산의 50%가 감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도로가 난 뒤 땅값이 두 배 뛰었다면 땅값을 기준으로 볼 때 절반을 내놓고도 나는 손해 본 것이 없게 된다. 만약 땅값이 열 배 올랐다면 나는 땅 절반을 내놓고도 큰 이익 보게 된다. 정부나 시가 도로를 내는 데 내가 내놓은 땅 500평을 다 사용하지 않고 250평만 사용했다면 나머지 250평이 체비지인데, 개발 사업의 시행자는 이 체비지를 팔아 개발 비용을 충당한다. 강남 개발의 다른 이름인 '영동 구획정리 사업'은 체비지 매각대금을 재원으로 하는 특별회계로 추진된 사업이었다." - 한홍구, <유신 - 오직 한사람을 위한 시대>, 317쪽
재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 같은 구획정리사업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런데 체비지를 수용하는 비율인 감보율이 매우 높은 영동지구에서 투기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는 것은 심각한 후과를 초래했다. 더구나 청와대와 서울시가 개입하여 조직적인 투기를 일삼은 것은 도시개발을 왜곡시키고, 사람들에게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아주 나쁜 선동이었다.
청와대와 서울시의 조직적인 투기는 1971년 4월 대선과 5월 총선에 필요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0년 1월 서울시장 김현옥은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를 대동하고 헬기로 영동지구를 순찰하면서 투기하기 좋은 땅을 물색했다. 당시 윤진우가 투기 유망지역으로 지목한 곳은 강남구 삼성동 일대였다.
- ▲ 1970년대 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는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조계종 소유의 봉은사 주변의 땅 10만평을 5억3천만원에 사들였다. 이때의 부지 매입으로 주변의 땅값이 들썩였다. 이때 매입한 부지에는 한국전력, 무역센터(COEX) 등의 건물이 들어섰다. 2014년 한전 본사 부지가 매각되자 조계종 소속의 일부 승려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한전부지 환수를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였다. 2016년 7월 촬영. ⓒ 전상봉
윤진우는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가 제공한 12억8천만 원의 자금으로 1970년 2월부터 8월까지 24만8368평의 땅을 사들였다. 이렇게 사들인 땅은 해가 바뀐 1971년 1월에서 5월까지 일부(6만5천 평)만을 남기고 되팔아 18억 원의 시세 차익을 남겼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의 저자 손정목은 당시 18억 원은 1997년을 기준으로 5천억이 넘는 거금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이즈음 상공부 장관 이낙선도 서울시장 김현옥에게 상공부와 상공부 산하 기관이 입주할 종합청사 건립 부지를 매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도 윤진우가 나서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조계종 소유의 봉은사 주변(삼성동 159, 167, 308번지)의 땅 10만 평을 5억3천만 원에 사들였다. 이때의 부지 매입으로 주변의 땅값이 들썩였다. 정부 부처는 서울시 밖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상공부는 경기도 과천 정부청사로 입주하였고, 상공부 청사 터로 매입한 강남구 삼성동 부지에는 한국전력, 무역센터(COEX) 등의 건물이 들어섰다.
강남 개발에는 청와대와 서울시의 투기 말고도 정부 부처 장관이 정치자금을 상납 받고 민간기업에 개발을 허가해 주는 비리도 있었다. 1971년 잠실지구 매립사업의 경우 경제기획원 부총리 김학렬이 정치자금을 받고 공유지 매립공사를 서울시가 아닌 민간 건설사에 허가하여 투기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말죽거리 신화,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민낯
- ▲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에 위치한 말죽거리(馬粥巨里)는 한양에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지금도 양재역 주변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강남대로와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교통요지다. ⓒ 전상봉
"1624년 인조 임금님은 이괄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지금의 양재역까지 황급히 내려온 터라 배고픔과 갈증이 매우 심했다. 마침 이곳에 있던 김씨 등 유생 6~7명이 황급히 죽을 쑤어 바치자 임금님이 말위에서 그 죽을 마시고 다시 피난길을 떠났다.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셨다'는 뜻에서 '말죽거리'라고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 역마에 말죽을 먹이던 곳이었으므로 이곳을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언주초등학교 정문 들머리에 새겨진 말죽거리(馬粥巨里)의 유래다. 말죽거리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으로 한양에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지금도 양재역 주변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강남대로와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교통요지다.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자 말죽거리 일대의 땅값이 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말죽거리에 가서 땅을 사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일었다. 말죽거리에 투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강북에 사는 복부인들은 새벽밥을 먹고, 버스 종점인 동작동 국립묘지 앞에서 말죽거리까지 걸어 다니며 투기 대열에 합류했다.
말죽거리의 땅값은 1966년 초 평당 200~400원 선이었으나 1968년 말에 이르면 4천 원에서 6천 원으로 뛰어올랐다. 땅값이 뛰자 정부는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세법(법률 제1972호)을 제정하였다. 정부의 부동산투기억제정책 덕분에 투기붐은 잠시 진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1970년이 되자 땅값이 다시 요동쳤다. 말죽거리에 불어 닥친 투기붐은 윤진우가 청와대 비자금으로 사들인 땅을 처분하고 난 1971년 하반기가 돼서야 잦아들었다.
- ▲ 양재역 4번출구 인근에 세워진 말죽거리 표석. 2000년대 초 강남구와 서초구는 말죽거리의 역사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 전상봉
투기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영동지구의 땅값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1963년 땅값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1970년 현재 강남구 학동은 2000, 압구정동은 2500, 신사동 5000이었다. 7년 동안 학동은 20배, 압구정동은 25배, 신사동은 50배의 땅값이 오른 것이다. 같은 기간 중구 신당동이 10배, 용산구 후암동이 7.5배 오른 것에 비해 엄청난 상승이었다.
1968년에서 1970년 사이에 벌어진 '말죽거리 신화'는 '강남 부동산 불패'의 서막이었다. 이때를 시작으로 1970년대 베트남 전쟁과 중동발 건설 특수에 따른 달러 유입으로 강남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사회적으로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과 함께 투자 여력이 있는 부동산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고, 이들은 개발 독재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뿌리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말죽거리 신화는 마약처럼 대중들의 의식을 마비시켰다. 부동산 투기는 불로소득과 일확천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비뚤어진 사회 풍조를 조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말죽거리 신화는 천민자본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할 무렵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민낯이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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