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고조선 역사](5) 단군릉의 진실 |
한국 고대 사학회가 출판한 <우리시대의 한국 고대사 > 8강 ‘단군릉, 대동강 문명론과 북한의 선사고고학’에는 북한이 주장하는 단군릉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밝혀 놓았다.
그 저자는 여기서 “설령 무덤에서 발견된 뼈가 정말로 5천여년 전의 유해라 해도, 이 무덤에 단군이 묻혔다는 기록이 있다 해도, 어째서 이 무덤이 단군의 무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해야만 하는지 그 설명의 논리적 근거는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무덤이 고구려 사람들이 개축한 단군의 무덤이 되기 위해서는 무덤이 원래 5천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다시 3천년 뒤에 개축되었음을 말해주는 독립적이며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할 텐데, 최소한의 형식논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이러한 필요조건은 전혀 제시되지 않은 채 그저 결론 만으로서의 주장만을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설령 무덤에서 발견된 뼈가 정말로 5천여년 전의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연대 자체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못한다. 무덤에 묻힌 사람이 5천년 전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단군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단지 예전부터 이 무덤을 단군의 무덤이라고 해왔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립할 수 있는 주장은 아니다”라고도 주장했다.
또 “단군릉에 대한 주장의 논리적 결함과 증거의 부재는 소위 단군릉이란 고구려 때 개축된 단군과 그 부인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끔 해준다. 단군릉의 주장은 논리 구성과 증거 제시에서 설득력이 없다. 이것은 단지 신빙할 수 없는 구전과 문헌기록을 토대로 해당 무덤을 단군릉이라고 설정한 다음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거기에 꿰어 맞춘 억지주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소위 단군릉이라 전해져 오던 이 무덤을 아무 선입견 없이 발굴했다면 이것은 500년 전 후한시기의 어느 고구려 유력자의 무덤이라고 보고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단군릉 입증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
단군릉 가짜설을 주장하는 위 견해의 주창자는 북한이 발굴한 단군릉에서 5천년 전의 뼈가 발굴되었고, 단군이 묻혔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해도 단군의 무덤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야만 하는지 그 논리적 근거는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 무덤이 고구려 사람들이 개축한 단군의 무덤이 되기 위해서는 무덤이 원래 5천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다시 3천년 뒤에 개축되었음을 말해주는 독립적이며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의 주창자가 필요하다는 5천년 전에 만들어졌고 3천년 뒤에 개축되었다는 독립적이며 객관적 증거란 무엇일까? 5천년 전의 뼈와 고구려 양식의 무덤이야말로 독립적이며 객관적인 증거가 아닐까? 무덤에서 나온 뼈가 5천년 전의 것이라면 이 무덤이 처음에 5천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독립적이며 객관적인 증거로 된다(물론 다른 장소로부터 이장되었다고 해도 어쨌든 피장자의 첫 번째 무덤이 5천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즉 유골(뼈)의 연대 측정이야말로 무덤 첫 번째 조성시기의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로 된다. 그리고 이 무덤이 고구려 양식의 무덤이라면 무덤의 조성 시기가 고구려 시대인데, 그 무덤에서 나온 뼈가 고구려 시대인 2천년 전이 아니라 5천년 전의 뼈라면 그 무덤은 개축된 무덤일 수밖에 없다. 결국 피장자의 뼈의 연대 측정이야말로 두 조건을 충족시키는 독립적이며 객관적인 증거로 된다.
이처럼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북한의 단군릉 발굴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단군릉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발굴한 무덤이 단군릉이라는 객관적인 근거를 밝혀야 하며, 왜 무덤양식이 고구려 양식인가를 해명해야 하며, 발굴된 뼈의 연대 측정의 과학성을 입증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점을 명확히 밝히면 단군릉 확정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발굴한 무덤이 과연 단군의 무덤일까?
평양 단군릉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역사책에 나온 것은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 권 55 ‘강도현 고적조’에 “현의 서쪽 3리에 둘레가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민간에서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사가 적혀 있다. 또 1626년 편찬된 <강동지>에도 이와 똑같은 기록이 적혀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도 단군릉 관련 기사가 여러 군데 나온다. <숙종실록> 1697년 7월14일(임오)조에는 숙종 임금이 강동의 단군묘와 평양의 동명왕묘를 새마다 수리할 것을 상주한 이인엽의 제의를 승인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영조실록> 1739년 5월23일(무진)과 1763년 4월22일(계유)조에도 영조 임금이 평양감사에게 단군묘를 잘 보수 관리하라는 지시를 내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조실록> 1786년 8월9일(기유)조에는 정조 임금이 평양감사에게 단군묘를 순시하고 부근의 백성들로 묘지기를 정하며 강동원은 매해 봄과 가을에 직접 묘를 돌아보는 것을 제도화하도록 지시한 내용이 실려 있다.
자 이렇게 1차 사료에 속하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기사들이 ‘단지 신빙할 수 없는 구전과 문헌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조선왕조에서 공식적으로 단군릉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적으로 관리해 왔다면 이 묘를 단군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근거로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다 단군릉에서 발굴된 뼈의 연대 측정결과 그것이 5천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면 단군릉이라고 확정할 수 있지 아니한가? 더군다나 고구려식 묘제라면 고구려 왕조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묘를 관리하고 개축했다는 확실한 근거로 되지 아니한가? 또한 단군릉을 발굴할 당시 그 근처에서 고려의 기와조각들이 발굴되었다면 고려시기에도 국가적으로 관리해 왔다는 것을 말해주지 아니한가?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단지 신빙할 수 없는 구전과 문헌기록이 아니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문헌기록에 단군릉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왜 고구려 무덤양식으로 되어 있을까?
우리 학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무덤양식을 보고 단군릉의 실재성에 대해 의심한다. 이는 무덤 안에 안치된 유골에 대한 연대 측정 결과를 신뢰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유골의 연대 측정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이 묘는 고구려 때 처음 만들어진 묘가 아니라 개축한 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대에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이 묘를 개축했을까? 이 묘가 개축된 연대는 무덤양식으로 볼 때 4~5세기인데 이 당시는 고구려가 고조선의 옛 땅을 모두 수복하고 평양으로 천도를 준비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으면서 단군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심을 갖고 있었던 고조선 유민들을 끌어안고, 삼국통일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단군을 민족의 원시조로 내세울 필요가 제기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정세적 요구에 따라 단군릉을 고구려 무덤양식으로 개축하고 국가적으로 관리했다. 이러한 점들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라는 국가의식을 고구려 지배층들이 강하게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 인용한 단군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인 단군지 또는 단군고기에 의하면 부여나 고구려 사람들은 자기들의 건국시조 고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단군을 자신들의 원시조로 인정했다고 한다. 또 제왕운기에도 고구려 사람들은 자기들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발굴된 뼈의 연대측정을 신뢰할 수 있을까?
단군릉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위 주장은 무덤에서 발견된 뼈가 5천여년 전의 것이라 해도 그러한 연대 자체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틀렸다. 무덤에서 발견된 뼈가 5천여년 전의 것이라고 확증된다면, 그 무덤의 주인공은 단군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증거이다. 단군이 아니라면 고구려 왕조가 그 묘를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국가적으로 개축했을 리 만무하며 국가적으로 관리했겠는가? 무덤에 묻힌 사람이 5천년 전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단군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역시 핵심은 단군 유골의 실체성과 연대 측정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단군 유골의 실체성 역시 연대 측정 문제와 직결된다. 연대 측정 결과가 맞다면 그것은 단군의 유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북한 역사학계에서 사용했던 연대 측정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보통 인골의 연대 측정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방식인데 북한에서는 왜 수만년 혹은 수십만년 전의 유적 유물 연대 측정에 활용되는 전자상자성공명(EPR) 연대 측정 방식을 썼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연대 측정 방법을 5천년 전의 유골을 측정하는 데 쓰게 되면 오차범위가 너무 커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어느 학자는 자기 논문에서 “이론적 제약과 기술적 한계로 인해 기본적으로 500년 정도의 오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며 단군릉의 연대 측정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 정도의 오차라면 사실 단군릉의 실체성과 고조선 건국 연대를 확증하는 데에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발표한 5011±267년이라는 측정치에서도 오차범위를 500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측정방법에는 불가피하게 오차 범위가 발생하며, 그 범위가 5% 정도라면 신뢰성 있는 측정치로 본다. 단군릉 유골의 연대 측정방법으로 쓴 전자상자성공명 연대측정방법은 200만년 전 지질학적 대상, 몇 만년 전 고인류학적 대상 등으로부터 몇천년 전 혹은 몇백년 전 인골과 토기 등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최신 과학적 연대 측정방법이다. 따라서 연대 측정방법에 대한 이러한 문제 제기는 타당성이 없다.
북한 단군 유골 연대 측정팀에서 밝힌 사연에 따르면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대 측정실에서 24번 측정한 결과 5011±267(측정 당시 기준)이라는 측정치를 얻어냈다고 한다. 이를 상부에 보고하자, 보다 신중해야 한다며 최신형 전자상자성공명기를 다시 수입하고 외부 전문가들을 보강해 연대 측정팀을 꾸려 또 다시 30회를 측정해 같은 답을 얻어냈다고 한다. 북한의 설명에 따르면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국내외적 파장이 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견지에서 신중에 신중을 더해 이같은 결론을 도출했으며, 자신들도 기원전 2333년보다 600년이나 앞선 수치가 나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같은 북한 역사학계의 설명을 불신한다면 그것은 이미 역사학이나 고고학이라는 과학을 벗어난 분단의식에 기초한 반북의식일 수밖에 없다. 북한에서 한 것은 무조건 틀렸고 유치하며 조작이라고 보는 관점과 견해는 합리적인 학문적 토론과 논쟁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역사학의 영역에 살벌한 이데올로기적 맹목성이 판치도록 한다. 이러한 비합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역사학에서 남북의 교류와 협력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위 단군릉 가짜설론자는 “소위 단군릉이란 고구려 때 개축된 단군과 그 부인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끔 해준다”라고 주장했지만, 단군릉에서 발굴된 유골의 연대 측정치를 인정한다면, 단군릉은 단군조선 시기 만들어져 고구려 때 개축된 단군과 그 부인의 무덤이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다. 논리 구성과 증거 제시에서 필요충분조건을 완벽히 충족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는 단군의 출생연대가 5011±267년(측정 당시 기준)이므로 기원전 30세기 초가 된다.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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