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
ⓒ 김종성 |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간 전개됐다. 그런데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사실상 고착된 것은 1951년 3월경이다. 전국적 범위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처음 9개월뿐이다.
1951년 7월부터는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부전선에서 소모적인 고지 쟁탈전이 반복됐다. 일례로, 1952년 10월 6~15일 강원도 철원군의 백마고지에서는 12차례나 전투가 벌어져 7차례나 고지 점령자가 뒤바뀌었다. 이 하나의 전투에서, 중국군(중공군)은 1만여 명의 인명피해(전사·부상·행방불명·포로)를 입고, 한국군은 3500명 정도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전체 기간에 인명피해를 입은 한국 군인은 약 62만 명이다. 이 중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3월까지 피해를 당한 한국 군인은 약 17만 명이다. 이보다 근 3배인 45만 명 정도는 그 이후에 피해를 입었다. 주로 휴전협상 기간에 피해를 당한 것이다. 협상 중에 벌어진 고지 쟁탈전이 그런 비극을 양산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했다. 이참에 미군의 힘으로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 또 통일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이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면 안보를 기약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휴전협상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유엔군 명의로 참전한 미군이 협상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김일성도 처음엔 휴전을 반대했다. 애초의 경계선인 북위 38도선 이북에서 전선이 고착됐으니, 영토를 손해 보는 상태로 전쟁을 끝내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1년 6월부터는 김일성도 휴전을 적극 찬성했다. 중국과 소련의 휴전 압력을 뿌리칠 수 없었던 데다가, 소모적 전쟁에 더 이상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은 협상에 참여하지 못하고 휴전을 찬성하는 북한·중국·미국에 의해 회담이 진행됐지만, 이 협상은 2년간이나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는 동일한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 양상이 되풀이됐다. 그로 인해 애꿎은 병사들만 죽어갔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데가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팽덕회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김일성도 처음엔 휴전을 반대했다. 애초의 경계선인 북위 38도선 이북에서 전선이 고착됐으니, 영토를 손해 보는 상태로 전쟁을 끝내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1년 6월부터는 김일성도 휴전을 적극 찬성했다. 중국과 소련의 휴전 압력을 뿌리칠 수 없었던 데다가, 소모적 전쟁에 더 이상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은 협상에 참여하지 못하고 휴전을 찬성하는 북한·중국·미국에 의해 회담이 진행됐지만, 이 협상은 2년간이나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는 동일한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 양상이 되풀이됐다. 그로 인해 애꿎은 병사들만 죽어갔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데가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팽덕회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 백마고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소재. | |
ⓒ 김종성 |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끝까지 주도하지 못했다. 미군의 반격으로 나라를 잃을 뻔한 그로서는 중국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1950년 12월 3일 '조선·중국 연합지휘부 성립에 대한 조·중 쌍방 협의문'을 체결하고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펑더화이)한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이승만은 물론이고 김일성도 최종 지휘권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당초, 김일성은 북한군과 중국군이 각각 별개의 지휘체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팽덕회와 갈등을 빚었다. 팽덕회는 지휘권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11월 16일자 서신에서 "중국 동지가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데 동의한다"고 밝힘으로써 김일성은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39세)은 이승만이나 맥아더보다 팽덕회(53세)가 더 미웠을지도 모른다. 작전지휘권 말고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1950년 10월 19일 참모 1명 및 경호원 2명과 함께 지프차로 압록강 철교를 넘은 팽덕회는 군사행동을 최대한 천천히 전개했다. 1950년 8월 15일 이전에 끝낸다는 계획으로 전쟁을 시작한 김일성으로서는 그런 '만만디' 태도가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팽덕회한테는 중국의 이익이 최우선이었다. 1945년 이전 항일전쟁에서부터 공로를 세운 그는 임표(린뱌오)로 대표되는 반대론자들을 제압하고 한국전쟁 참전을 관철시켰다. 팽덕회가 그렇게 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참전 문제가 논의된 10월 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그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대치하면, 미군이 무슨 빌미든지 만들어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논리로 중국 지도부를 설득했다.
미군 몰아내기보다 중국군 현대화에 중점
▲ 팽덕회. | |
ⓒ 위키백과 |
그렇게 열렬히 참전을 주장했던 팽덕회는 자기 부하들이 청천강(평북과 평남의 경계) 이남으로 미군을 밀어내자 심리적 여유를 갖게 됐다. 북한·중국 경계선에서 미군이 점차 멀어지자, 그는 호흡을 길게 하면서 전쟁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는 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세계적인 냉전 구도에 따라 한반도에서도 두 개의 힘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을 북·중 국경에서 최대한 멀리 밀어내되 중국군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이런 가운데 팽덕회가 최고의 역점을 둔 것은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소련은 중국군을 참전시킬 목적으로 대규모 군사지원을 약속했다. 이를 이용해 이참에 중국군을 현대화시키자는 게 팽덕회의 계획이었다. 미군을 몰아내기보다는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데 중점을 뒀던 것이다.
그런 계획에 따라 팽덕회는 주요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일부러 긴 휴식을 가지면서 소련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전투 장비도 보내주고 수송용 차량도 보내주고 미그기도 날려주고 금전 차관도 지원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한국근대사연구> 제33집 속에 양영조의 '6·25 전쟁 시 중국군의 지구전 전략과 군사개혁'이란 논문이 있다. 이 논문에 인용된 중국군 간부 섭영진의 <섭영진 회고록>에 따르면, 중국 인민해방군은 팽덕회의 기획 덕분에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전체 부대의 3분의 2가 현대식 장비를 갖추는 성과를 얻었다. 미군과 싸우는 대가로, 전쟁 중에 소련한테서 단단히 지원을 받아냈던 것이다.
이처럼 팽덕회는 김일성의 희망사항을 들어주기보다는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쪽으로 전쟁을 활용했다. 이를 위해 남진을 최대한 늦췄다. 덕분에 미군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애타는 쪽은 김일성이지 팽덕회가 아니었다.
팽덕회가 시간을 끌며 노골적으로 국익을 추구하니, 김일성은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1951년 1·4 후퇴 이후로는 더 그랬다. 1월 4일 국군이 서울에서 후퇴하고 1월 5일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로, 팽덕회는 또다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화가 난 김일성이 1월 10일 박헌영과 함께 팽덕회를 찾아가 따졌지만, 팽덕회는 "내가 총사령관으로서 부적격하다고 생각하시면, 내 목을 베시오"라며 으름장만 놓을 뿐이었다.
팽덕회, 휴전회담마저도 만만디 작전
▲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군(중공군). | |
ⓒ 위키백과 |
팽덕회는 휴전협상 과정에서도 김일성의 속을 단단히 태웠다. 휴전을 거부하는 김일성을 제압하고자 스탈린까지 동원해 휴전 합의를 관철시킨 팽덕회였다. 그랬던 팽덕회가 막상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또다시 '만만디' 작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이 휴전을 서두르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는데도, 오히려 팽덕회가 느긋해진 것이다.
1951년 하반기에 벌어진 휴전협상 당시, 중국측은 '38선을 기준으로 휴전하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치고 '현재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휴전하자'는 미국측 요구에 동의해줬다. 미군이 확보한 영역이 38선 이북에 있었으므로, 중국의 태도는 미국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어느 경우든 자국 영토 밖이기 때문에, 이 문제로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휴전선은 이렇게 북한의 의사를 무시한 채 중국과 미국의 합의로 생겨난 것이다.
휴전회담에서 지금의 휴전선이 군사분계선으로 합의된 때는 1951년 11월이다. 정상대로라면 휴전회담은 이때부터 몇 달 안에 끝났어야 한다. 1951년 12월이나 1952년 연초에 끝났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협상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포로송환 문제를 놓고도 팽덕회가 또다시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포로송환 문제와 관련해 팽덕회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보다는 중국군 체면을 살리는 것을 우선시했다. 미국은 희망하는 포로에 한해 본국으로 송환하자고 주장했다. 미군 포로보다 중국군 포로가 훨씬 더 많고, 중국군 포로 중에는 본국 송환을 꺼리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팽덕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군 포로들이 타이완(대만)이나 미국행 혹은 한국행을 선택할 경우, 자기 조국의 명예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체면을 살릴 목적으로, 또 소련의 지원을 최대한 얻어낼 목적으로 그는 휴전협상을 질질 끌었다.
그러는 동안, 백마고지를 비롯한 중부전선에서는 한 뼘의 땅이라도 더 뺏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무한정 벌어졌다. 이로 인해 무고한 병사들만 곳곳에서 죽어갔다.
결국 팽덕회는 미국측 주장을 많이 반영하는 쪽으로 포로송환 문제를 매듭지었다. 포로의 자유의사에 맡기되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나왔다. 팽덕회는 비록 휴전협상에는 실패했지만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어깨가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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