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박정희' 꿈꾼, 학도호국단장의 변신
[역사 독립군 임종국 4화]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이용길 위원장
- ▲ 천안고등학교 학도호국단장 이용길.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 이용길
"박정희 장군님처럼 나라를 구하는 사람이 되겠다!"
반공 청소년 이용길은 박정희 장군을 흠모했다. 그에게 대통령 박정희는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진정한 군인이었다. 제2의 박정희를 꿈꾼 천안고등학교 3학년 이용길은 학교에선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고 천안 지역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호국단에선 연대장이었다.
1년에 한 번 대대적으로 거행된 가두 검열 및 사열에선 제병 지휘관이 되어 각반과 완장을 차고 천안 시내를 행진했다. 당시 학생회는 형식적으로 존재했다. 그러므로 학도호국단 단장인 그는 최고의 학생 권력자였고 영웅이었다. 사고뭉치 학생들도 그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했다.
선생들은 그는 장군감이라고 추켜세웠다. 고교 3년 내내 군화를 신고 다닐 정도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육사 생도가 되기 위해 태권도를 배우고 산악 구보를 하며 몸을 단련했다. 대학 진학을 앞둔 3학년 때는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해 천안고 출신 육사 선배들을 만났는데 선배들은 그에게 "너는 누가 봐도 육사 감이다. 내년에 화랑대에서 만나자"고 격려했다.
그는 왜 육사 시험에서 떨어졌을까?
- ▲ 천안고등학교 재학 시절의 이용길. 맨 앞줄 가운데 학생. ⓒ 이용길
선생과 선배는 물론 자신 또한 육사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고 100% 자신하고 시험을 봤는데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0시의 횃불>(김종신 지음) 등 박정희 관련 책을 읽고 혁명 공약을 외우며 장군의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좌절되자 "이용길을 불합격시키면 누가 대한민국을 지키란 말이냐"고 반발했다. 육사의 꿈이 꺾이자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고 하는 등 그는 한동안 방황했다.
육사는 왜 이용길을 불합격 처리했을까. 원인은 연좌제였다. 그의 부친은 청년시절에 좌익 활동을 했다. 일제 앞잡이였던 순사가 처벌은커녕 경찰 간부가 되는 등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던 해방 전후에 독립운동가와 민족정신이 남달랐던 청년들은 이승만 정권에 반기를 들었고 이승만 정권은 반대 세력들을 빨갱이로 몰면서 인간 사냥을 했다.
좌익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블랙리스트로 관리한 것이 연좌제다. 군사독재정권은 친족은 물론이고 외족의 8촌까지 좌익 경력이 있으면 연좌제를 적용해 군인 등 공무원이 될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박정희 장군처럼 소장이 된 다음에 전역해서 구국의 길을 걷겠노라고 구체적인 인생 계획을 세웠던 반공 청소년 이용길의 꿈은 부친에게 붙은 빨간 딱지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친일파 실체를 알려준 <친일문학론>
- ▲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친일문학론> ⓒ 이아림
"알고 당하는 것보다 모르고 당하는 게 죄악이라고 가르치며 진리와 정의를 말한 선생들이 거짓 역사를 가르쳤다. 거짓을 가르친 선생은 스승이 아니다. 따라서 나에게 스승은 없다."
1975년 대학생이 된 이용길은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 읽으면서 가치관과 역사관이 뒤집히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었다. 최남선과 모윤숙 등의 시를 외우고 낭송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그들이 친일 문인이었다니, 박정희 장군을 구국의 영웅으로 흠모하며 제2의 박정희를 꿈꾸었는데 그가 일본군 출신 독재자라니….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된 그에게 거짓 역사를 가르친 선생은 더 이상 스승이 아니었다. 관제 교육에 의해 왜곡됐던 의식이 <친일문학론>에 의해 산산이 깨지면서 박정희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황군(皇軍) 출신 박정희는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 민족의 반역자였고 군사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독재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를 학생운동에 입문시킨 <친일문학론>은 유신독재와 싸우던 민주화 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에게 급속도로 퍼졌다. 이 책을 통해 박정희와 그 세력들이 단순한 정치군인이 아니라 일제의 통치체제를 계승한 친일파라는 것을 깨달기 시작했다. 박정희를 비롯해 문화예술계와 언론계, 학계, 종교계 등에서 호가호위하는 인사들이 친일 반민족 세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겨레의 통일과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역사에 눈을 뜬 이용길은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아버지에게 붙여진 빨간 딱지가 아들에게도 붙여진 것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민주노총 대전충남본부장과 민주노동당 충남도당 위원장, 진보신당 부대표와 노동당 대표를 지냈다. 이와 함께 천안민주단체협의회 초대의장과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추진위원 등을 지냈다.
진실을 알려준 임종국 선생이 진정한 스승
- ▲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한 이용길 위원장. ⓒ 이아림
"임종국 선생과 아버지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두 분이 아니었으면 역사에 무지한 인생으로 부끄럽게 살았을 것이다."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이용길(62) 위원장을 지난 7월과 8월 두 차례 인터뷰했다. 인생을 바꿔준 임종국 선생과의 인연 그리고, 조형물 건립 추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임종국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대학 1학년 때인 1975년 <친일문학론>을 읽으면서 시작됐다. 나에게 <친일문학론>은 그냥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인생을 바꾸게 한 책이다. 이광수와 모윤숙 등 교과서에 실린 소설가와 시인 등의 작품을 읽으면서 위대한 문학인으로 존경했는데 <친일문학론>을 읽으면서 청소년기에 형성됐던 역사관과 가치관이 뒤집혔다. 역사의 진실을 알면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건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해일이 덮친 것 같은 큰 충격이었다. <친일문학론>을 읽은 이후 근현대사 등에 대해 공부했다.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5.16 군사쿠데타 그리고 군사독재자의 실상을 깨달으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친일문학론>은 반공 청소년이었던 나를 운동권 학생으로 변화시킨 스승 같은 책이다.
선생을 직접 만난 것은 1982년 천안 요산재에서였다. <친일문학론>을 들고 가서 '이 책에서 받은 충격 때문에 운동권이 됐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께서 '그렇게 충격이었냐!'면서 웃으셨다. 그러면서 청년에게 닥칠 고초를 걱정하셨다. 거짓과 불의가 판을 치는 시대에 진실과 정의를 깨닫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본인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아들 같은 청년이 당할 고초에 대해서는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친일연구에 목숨을 내놓은 독립군"
- ▲ 노동운동과 역사운동에 참여한 이용길 위원장. ⓒ 이아림
- 임종국 선생의 첫 인상은 어땠나.
"처음 뵀을 때는 낡은 러닝셔츠에 짧은 머리를 하고 계셨다. 친일파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당당하고 매서웠지만 그 외의 다른 이야기를 할 때는 소탈하고 순진하셨다. 소년처럼 웃던 선생의 순진한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 임종국 선생을 뵈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선생을 뵈면서 '마지막 독립군이 여기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재정권의 폭압이 서슬 퍼렇던 그 시대에 친일파를 조사 연구해 역사에 기록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싸운 독립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는 반대 세력을 법과 절차 없이 잡아가두고, 고문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박정희는 대통령을 넘어 신적인 존재였다. 박정희 우상화는 북한 정권의 우상화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거론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일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혼자의 힘으로 그 일을 해냈다. 투철한 사명감과 죽음을 불사한 용기가 없으면 도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친일문학론>을 처음 읽고 믿을 수가 없었다고 말씀 드렸더니 '책에 실린 인물 중에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어보셔서 춘원 이광수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서재에 가득 차 있던, 영어단어장에 기록한 친일인명카드 중에서 이광수의 기록을 꺼내 보여주셨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 관보와 매일신보 등의 자료를 보여주셨는데 거기엔 빨간 볼펜으로 줄을 친 이광수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 선생을 몇 차례나 만났나.
"(천안)요산재와 구성동에 사실 때 서너 차례 찾아간 것으로 기억한다. 자주 찾아 뵀어야 했는데 당시 나의 관심사는 노동운동이어서 그 이후로는 찾아뵙지 못하고 돌아가신 지 9주기인 1998년 천안민주단체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임종국 첫 추모제를 진행하면서 제주가 되어 찾아뵀다. 지역 향토사학자를 비롯해 기관장들은 추모제를 반대했다. 왜 옛날 문제를 꺼내느냐면서 친일 문제가 부각되는 것을 꺼렸다. 이를 보면서 지역의 친일청산 또한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제화 된 조형물 아닌 친일파 청산을 되새기려고 하는 것
- ▲ 민주노총 시절의 이용길 위원장. 손짓하는 사람. ⓒ 이용길
- 임종국 조형물을 추진 중이다.
"임종국 선생 조형물은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회장 장병화)가 만들어지면서 논의됐지만 여러 사정으로 이제야 추진하게 됐다.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박제화 된 조형물이 아니다. 해방 이후 분단과 군사독재 그리고 독점재벌의 폐해 등 우리 민족문제의 악의 근원인 친일파 청산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되새기려고 하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다.
북한은 핵으로 한국을 위협하고 한국은 사드 배치로 대치하려 하고 있다. 민족의 공멸을 불러올 도박을 서슴지 않고 있는 가운데 한국 사회의 빈부 차이는 극심해지고 있다.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중첩된 한국 사회의 근본적 과제로 친일청산을 제시한 분이 임종국 선생이다. 선생의 조형물에는 친일청산이란 역사적 과제와 민족의 과제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 ▲ 지난 7월 9일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발족식에서 인사하고 있는 이용길 위원장. ⓒ 조호진
- 조형물을 어느 곳에 건립하나.
"선생이 집필하셨던 요산재와 가까운 '천안삼거리공원'과 천안시외버스터미널 사거리에 위치한 '신부공원' 등을 후보 장소로 정하고 천안시와 협의하려고 한다. 천안삼거리공원은 요산재와 가깝고 천안삼거리라는 지명도가 있긴 한데 외진 곳이다. 신부공원은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장소로 임 선생의 조형물이 배치되면 선생이 소녀상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더할 수 있다."
- 역사 독립군 곧, 조형물 추진위원 모집은 잘 되고 있나.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그리고 시민단체 등에게 참여를 요청한 가운데 조형물추진위의 주축인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천안지회(지회장 전훈진) 회원들이 주말이면 가두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추진위원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등학생들의 참여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시도하는 국정교과서가 채택될 경우 학생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국정교과서는 친일은 미화하고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병균 감염을 막기 위해 예방주사를 맞듯이 청소년들이 추진위원이 된다면 친일청산과 역사정의의 항체가 형성될 것이다. 현장에서 체험하는 역사교육은 그 어떤 역사교육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조형물 설치 이후의 사업 계획은.
"1998년 첫 추모제를 하면서 선생이 10년간 머물면서 집필하던 요산재 건물과 선생이 밤농사를 짓던 1만평의 임야를 구입해 민족교육수련원으로 만드는 논의를 한 적이 있다. 이를 장기적인 사업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산재 인근에 요산재 안내 표지를 세우고 천안삼거리공원에 선생의 어록비를 설치하는 문제도 함께 고민하고 있다."
친일청산의 함성이 제막식에서도 울려 퍼졌으면
- ▲ 임종국 조형물은 평화의 소녀상 작가 김서경-김은성 부부가 제작한다. 이 그림은 디자인 중 하나다. ⓒ 김은성
- 임종국 조형물 추진에 참여하는 누리꾼들의 반응이 뜨겁다.
"선생이 유업으로 남긴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 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이 역사 독립군들에 의해 부활하는 것을 보고 있다. 친일파의 후예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참여하는 역사 독립군들의 뜨거운 행렬이 폭염보다 뜨겁다.
선생의 27주기인 11월 12일 즈음해서 건립하는 조형물 제막식에 역사 독립군들을 초대하려고 한다. 천안은 기미년 삼일만세운동의 대표적인 지역이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세력의 준동이 심각하다. 역사 독립군들이 모여서 아우내 장터에 울려 퍼졌던 대한독립만세처럼 친일청산을 외치면 좋겠다. 임종국 선생 조형물 제막과 함께 친일청산 함성이 울려 퍼지길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9월 5일부터 13일까지 몽골에 다녀옵니다. 추석 주간 한 주는 연재하지 않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