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 10: 전교조, 분열 아닌 확장으로
2016.09.09 18:21
전교조의 일부 조합원들이 곧 새로운 노조를 결성한다. 이에 교육 기득권 세력들은 전교조가 분열로 인해 곧 망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측을 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나도 수개월 전부터 새로운 교원노조를 만드는 상상을 했다. 전교조가 싫어서가 아니라,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듯한 답답함 때문이었다. 나는 새로운 노조를 결성하는 교사들의 진의를 믿는다. 그들은 그간 전교조의 이름으로 교육에 많은 헌신을 해왔던 교사들일 거다. 할 만큼 했다는 마음이 아니면 떠나리라 나서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아는 전교조 교사들이라면 그렇다.
전교조 조합원이 되기까지
신규 발령을 받았던 첫 학교에 전교조 교사는 한 명도 없었다. 다른 학교에 있을 때 조합원이었다는 선배 교사 한 명은 내가 일하던 학교에 와서 조합을 탈퇴했다. 관리자들이 본인을 대하는 태도가 차갑고, 나이도 있는데 계속 고학년 담임에 힘든 업무를 주기에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조합 탈퇴를 했더니 대번에 처우가 달라졌단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내가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차츰 경력이 쌓이고, 학교가 어떤 곳인지 파악하게 되자 내 마음대로 할 배짱이 어느 정도 생겼다. 그러나 전교조 가입은 여전히 망설여졌다. 큰 단체와 강한 결속을 경계하는 성격 때문인 듯하다. 집단 지성을 존중하지만, 안타깝게도 ‘집단적인 이성의 마비’에 대한 기억 역시 뚜렷하다. 더구나 그즈음 나는 학교, 교사, 교과서, 교총, 전교조 등‘교’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만 봐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상 증상을 겪고 있었다. 교대에서 보낸 4년만큼이나, 신규시절 5년을 보낸 첫 학교의 생활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그간 보아온 전교조 투쟁 방향이 개인적으로 와 닿지도 않았다. 특히 7차 교육과정과 나이스 반대 투쟁이 그랬다. 전교조 홍보물을 읽어보면 일견 의미 있어 보이긴 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렇게까지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할 내용인가라는 의문은 들었다. 교원평가 반대 투쟁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다 학교를 옮겼고, 나는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제고사의 실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제고사라는 시험 자체보다,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학생을 지적으로 학대하는 단위 학교들의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런 짓을 하는 곳이 학교라면 나는 교사이고 싶지 않았다. 매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일제고사 반대투쟁과 시국선언 등으로 전교조는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있었다.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교사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다른 학교들에서, 징계니 해임이니 하는 뒤숭숭한 소식도 들려왔다. 그 와중에 국내 최대 교원단체인 교총은 늘 하던 대로 ‘교사가 정치적인 행동을 하다니! 당장 교실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비록 내가 당장 무언가를 크게 바꾸지는 못해도 바른 말을 하는 단체는, 그것도 바른 말을 하다가 저렇게 얻어맞는 사람들은 도와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교조 지부 사무실에 찾아가 가입을 했다. 나는 그렇게 나밖에 없는 1인 분회의, 분회장이 됐다.
전교조를 둘러싼 무수한 오해 중 하나가, 전교조 교사들이 학교에서 갑질을 한다는 것이다. 전교조 교사들이 개인의 안위만 위한다고 보는 분들이 많은 듯한데, (물론 일부 그런 교사들도 있겠으나) 내가 볼 때 그건 정말 소도 웃을 일이다.
"전교조가 망가뜨린 경기교육 6년만에 되찾아오겠다"며
경기도교육감에 출마했다 보기좋게 낙마한 조전혁 전 의원
우선 교사라는 전문직 노동자가 근무 조건을 보장받고자 노조에 가입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는 환경(대도시의 공립초등학교)에서 생각해보면, 전교조에 가입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합원이 많지 않은 학교에서 악독한 관리자를 만나면, 앞서 말한 선배 교사가 그랬던 것처럼 인사배정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교육계에서 승진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서는 전교조를 탈퇴하는 것이 암묵적 규율이다.
상식 이하의 악독한 관리자들은 상대적으로 줄었다. 더구나 내 경우는 젊고, 승진에도 뜻이 없으니 조합원이어서 직접적 불이익을 당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전교조라 역시 정치적이군’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 불편할 때가 있다. 한국은 ‘정치’라는 말을 전염병과 선동의 의미로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정치적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것이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제약하기도 한다. 매번 화를 눌러가며 초등학생도 바로 알고 있는 ‘정치’의 본래 의미에 대해 설명하려면 피곤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가끔 평조합원인 내가 전교조를 ‘업고, 이고 간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전교조 교사들이 김일성을 찬양한다는 둥의 말에는 대답할 가치도 못 느낀다. 하지만 교원의 겨우 10%가 될까 말까 한 조합원을 가진 교원 노조가 마치 공교육 붕괴의 근원인 양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사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인 양 매도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교육 당국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한국에서 교사라는 직업만큼 안정적인 직업도 없다. 이 안정성을 포기하고, 굳이 대세를 거슬러가면서까지 많은 교사들이 전교조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법외노조가 되는 와중에 가입을 하는 교사들까지 적지 않았다. 전교조가 좋든 싫든, 이런 상황과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달라고 말하는 건 무리한 부탁일까.
활동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겐 전교조에 대한 애정이 있다. 이런 내가 조합에 대해 ‘업고, 이고 가는 심정’이라는 시건방진 표현을 썼다. 나는 전교조가 개혁의 방향성을 달리했으면 하는 생각을 아주 자주했다. 위기와 탄압에서 오는 반동의 에너지를 넘어서는 것이기를 바랬다.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말이다.
개혁은 아래로부터
전교조는 늘 싸우고, 항상 진다. 전교조가 전면에 내걸고 반대했던 성과급은 폐지되기는커녕 차등지급률이 더 커졌다. 올해만 해도 교사가 수백만 원에 달하는 촌지를 받거나, 성추행을 해도 단 몇 개월 정직 처분이 내려졌다. 그런데 교육부는 성과급을 균등 분배하면 파면에 이르게 하는 법률을 만들겠단다. 교원평가의 경우도, 시행되기 전부터 전교조는 늘 ‘폐지’만을 외쳤다. 오늘도 나는 교원능력개발평가 거부를 위한 공동행동 지침에 관한 문자를 받았다.투쟁 방식에 대한 호불호는 차치하고, 이것이 성공하리라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으나, 어떤 모습으로 지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전교조는 늘 위를 향해서만 외치는 것 같다. 들을 의지도, 이유도 없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들을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들어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대다수의 교사, 학부모, 시민이 뜻을 모으는 바람에 그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국제교원노조연맹(Education International, EI)이 발표한 논문 ‘교사의 자기 효능감, 목소리, 지도력: 국제교원노조연맹의 정책 방향’ 속에 제시된 토론 자료는 모든 교원 정책의 기본 가정을 “개혁은 아래로부터 지지를 받을 때에만 효과를 거둘 수 있음”에 둔다. 나는 꼭 교육 개혁만이 아닌 모든 형태의 개혁이 아래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성과급을 예로 들어보자. 여러 통계 자료를 보면 성향을 막론하고 많은 교사들이 성과급 폐지에 찬성한다. 그렇다면 이제 부지런히 시민들, 학부모들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투쟁방식은 물론이거니와 사용하는 언어도 중요하다.
출처 - <머니투데이>
성과급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늘 두 가지 정도의 이유를 들어왔다. ‘교육의 질은 수치화할 수 없다’와 ‘교사 간의 경쟁을 조장한다’ 이다. 완벽하게 옳은 말이나, 학교 현장에서 실제 학생들을 대하고, 현장의 수많은 변수를 겪는 교사가 아니면 크게 와 닿지 않는 말일 수 있다. 아름다움이 수치화될 수 없음에도 미스코리아 진, 선, 미를 나누는 것처럼 사람들은 부지불식간 질적인 부분을 계량화한다. 또 ‘경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가끔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는다. 공공부문의 비효율과 무사 안일함에 분노하는 시민들이 많다. 경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할수록,의도치 않게 반대쪽 프레임만을 활성화시킬 수도 있다. 이런 무한 경쟁 시대에 교사들만 경쟁 안 하고 놀고 먹겠다는 거냐는 엉뚱한 오해를 산다.
어떤 식으로 프레임을 형성해나가야 할지 교원노조는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프레임 형성까지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교사가 아닌 주변의 지인들에게 이런 식으로 설득하려 한다.
교사 성과급 기준과 비슷한 방식으로 부모 성과급 기준을 세워봅시다. 성과 기준에 의하면 1학년 엄마는 아이가 어리니까 최하 등급, 6학년 엄마는 아이가 크고 다루기 힘드니 최상 등급입니다. 발달 단계마다 부모로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엄연히 다른데도 말입니다. 또 부모 성과급 기준에 의하면 부모님들이 학부모회, 운영위원회 일을 하지 않으면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매주 놀이공원에 데려가지 않았거나, 좋은 대회에 내보내 아이가 상을 받지 못했으므로 부모로서 낮은 등급을 받습니다.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좋은 책을 읽고, 보고서도 쓰면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느냐가 정말 중요할까요. 가정과 사회의 지원 속에 자율적으로, 한 권의 좋은 책이라도 제대로 읽고, 가족의 삶에 녹여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부모성과급 기준에 의하면 일 년에 반드시 10권 이상의 책을 읽어야만 높은 등급을 받고, 많은 돈을 받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그 책의 내용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고려되지 않습니다.또 성과급 기준에는 시부모나 처가어른이 주는 점수가 큰 영향을 끼칩니다. 어느 집에 첫째, 둘째, 셋째 며느리가 있고 각자 다른 방법으로 가족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평가 기준에 의해,세 명은 반드시 다른 결과를 받습니다. 가족 내 어른과 며느리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맺어질까요? 학부모 성과급은 좋은 부모가 되는 것에, 가족 내 다른 구성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에, 무엇보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도움이 될까요?성과급이라는 제도는 교사가 수업에 집중하고, 학생들을 잘 돌보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저학년 교사이기 때문에, 기피 업무를 맡지 않았기 때문에,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자들에게 낮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저성과 교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신없이 바쁘기만 한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애정을 쏟고 싶습니다. 좋은 수업을 위해 충분한 자율성, 연구하는 환경을 갖고 싶습니다.
표준화된 기준으로 줄세우기를 당하는 교사는 같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교육하게 된다. 통제 속에서 성과에 쫓기는 교사가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말 한마디 건네기 힘든 정신상태가 되리라는 것을, 매일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노력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설득하고, 공감을 이끌어내어, 연대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원한다. 교육부 앞에 찾아가 시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번에 모든 걸 이루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아래에서 이룬 연대를 바탕으로 작은 성공을 하나씩 이뤄갔으면 한다. 성과급 문제만이 아닌 전교조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에서 마찬가지 관점을 취하자고 제안한다.
학생의 이익은 교사의 이익과 함께한다
전교조의 교원능력개발평가 폐지 투쟁은 교원 노조가 기존의 노사 관계 모델에 갇혀, 죽도 밥도 아닌 이상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교원능력개발평가가 시행되기 시작했을 때 주변 대부분의 교사들이 성향을 막론해 교원평가 자체에 화를 냈다. 보수적인 성향의 교사들은 당연히 ‘어떻게 감히 학생, 학부모가 교사를 평가하느냐’고 분노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의 교사들은 교원능력개발평가가 교육 환경 전반적인 문제를 무시한 채 모든 것을 교사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우려했다. 교육의 시장화를 개탄하며, 이것이 당장은 아니라도 결국 승진이나 보수에 연계될 것이라는 염려도 했다. 이 염려의 내용에는 몹시 동의했지만, 그럼에도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선 교사를 평가하는 제도는 교원능력개발평가 이전에도 있었다. 여전히 존재하는 근무성적평정(근평) 말이다. 이는 관리자들이 교사에게 주는 점수로, 승진과 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승진의 기로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수가 있더라도 최고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상대평가 점수이다 보니, 여러 드라마를 만든다. 점수 때문에 멱살이나 머리채를 잡거나, 충성의 대가가 이거냐며 교장 집에 찾아가 난동을 부린 교사들을 본 적도 있다. 박카스 박스에 지폐를 얼만큼 채웠다더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실 근평은 어떤 의미에서는 평가라고 볼 수도 없다. 평가는 피평가자를 위한 ‘지원과 개선’에 토대를 두고,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허나 나는 10년째 학교에서 일하고 있어도, 내 근평이 몇 점인지조차 모른다. 평가가 어떤 기준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지도 모른 채, 그냥 교장이 주는 대로 받으면 끝이다. 이 말도 안 되는 ‘근평’이 여전히 승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학교의 기존 교사평가제도, 승진제도를 생각하면 교원능력개발평가가 왜 문제인지 모르겠는 심정이다. 물론 교평의 부작용도 인정한다. 교사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평가가 반드시 객관적이고 공정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교사들이 학생과 학부모의 눈치를 보고, 그 과정에서 부정한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리자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공정한가? 교사들이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발생하는 부정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관리자들은 교사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거의 모르지만 학생은 매일 교사들과 함께한다. 관리자가 원하는 교사의 모습은 매우 복잡한 반면, 학생과 학부모가 관심 있어 하는 것은 '가르치는 능력'과 '인격'뿐이다. 교사의 전문성을 수업 능력이나 인격으로 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행정 업무 처리 능력, 로비 능력, 인맥관리 능력, 배구 능력보다는 그나마 낫지 않은가?
비슷한 값의 문제를 가졌다면, 나는 차라리 학생과 학부모의 평가를 지지한다. 눈치를 보더라도 학생과 학부모의 눈치를 보는 것이 낫다. 그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교사들이 학교에서 많은 권한을 갖도록 하는 것이 ‘적어도’ 근평 제도보다는 낫다. 교원능력개발평가가 가진 교육의 시장화 문제, 공감한다. 그러나 내가 보는 학교 문화와 제도는 신자유주의 걱정 이전에 봉건주의부터 타파해야 할 것 같다.
근평의 문제점을 모르는 교사는 없다. 전교조는 '근평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도입되는 교원능력개발평가가 교사들의 근무환경 개선과 전문성 개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음에 줄기차게 반대를 주장했을 것이다. 또 지금처럼 교원능력개발평가를 할 바에야 아예 안 하는 것이 나은 것도 사실이다.
교육 진보세력은 폐지를 주장하고, 교육 기득권 세력은 찬성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으니 교원능력개발평가라는 제도 자체가 교육 진보를 가로막는 주범이라 보이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교사들에게 실질적 영향을 끼치는 근평과 성과급 평가의 폐해를 교원능력개발평가가 앞장서서 가려주고 있을 뿐이다. 현재 교원능력개발평가는 근평(승진)이나 성과급 평가(차등 보수)와는 달리 교원들에게 큰 영향을 행사하지 않는다. 평가 결과에 따라 기분이 좋고 나쁘거나, 귀찮은 업무 하나가 생긴 정도다. 최근 들어 많은 교사들은 교원능력개발평가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갖기보다, (개인차는 있을 것이나) 큰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수년이 지났어도 평가의 설계부터 시행, 피드백까지 무엇 하나 발전이 없다. 그 와중에 보수언론들의 뭇매에 힘입어 전교조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교사들의 이익 집단으로 매도당했다.
국제교원노조연맹(Education International, EI)의 논문 <교원 평가의 활용과 오용: OECD 국가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성과급 제도가 학교에서 효과를 발휘한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교원 평가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교사들에게 양질의 전문성 개발 기회를 제공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평가과정의 개발에 교사들이 참여하고, 조언을 하는 교사나 멘토가 있어야 하며, 수업 현장과 평가의 다양한 변인이 고려되고, 평가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평가의 목적에 동의하는 '종합적인 교원평가'에 대해 국제적인 요구가 높다. 성과와 급여에 차이를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문성 개발을 위한 건실한 교원평가 말이다. 현재 한국에서 시행하는 교원능력개발평가는 이런 종합적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내가 아쉬운 것은 전교조가 교원능력개발평가 폐지를 위한 투쟁에 너무 열을 올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교원평가제도 추진을 위한 주도권을 놓쳐버렸다는 점이다. 전문성 개발에 도움이 되는 종합적인 교원 평가는 현재의 승진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한 초석이 되기도 한다. 행정가, 로비 전문가들이 아닌 ‘교육자’가 학생, 학부모, 교사의 신뢰 속에 학교의 장이 되는 교육현장을 원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전교조의 교원평가 반대투쟁은 (전교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학생의 이익과 교사의 이익이 마치 매우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전혀 사실이 아닌데도 말이다. 핀란드, 캐나다, 호주, 덴마크, 노르웨이 등 교육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나라들은 모두 강력한 교원 노조가 있다.
국제교원노조연맹의 보고서는 교사 전문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기 효능감'이라 말한다. 자기 효능감은 교사가 작은 성공을 경험하며 형성되고, 교사가 교육 정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이러한 자기효능감은 학생의 학습과 동기 부여에 큰 영향을 준다. 강력한 교원노조를 가진 나라들에서 교사의 직업 만족도, 학생의 학습결과가 동시에 우수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즉 교사의 전문성 개발, 이를 위한 종합적인 교원평가는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교원노조는 전통적 노사관계 모델에서 벗어나 치밀한 전략 속에 세심하게 이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연대를 위한 물리적 공간
딴지일보에 글을 쓰면서 여러 학부모님들께 쪽지를 받았다. 우연한 기회로 같은 학교 학부모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릴 기회도 있었다. 그분들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 중 하나가 ‘학교에 선생님 같은 분이 있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였다.
학교에는 교육의 중심을 학생의 배움에 놓는 좋은 교사들이 언제나 있었다. 내가 ‘선생님 같은 훌륭한 분’ 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한 교사들 말이다. 문제는 파편화, 즉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 문화 개선에 뜻이 있는 학부모가 어떤 교사와 소통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통로가 없다. 심지어 같은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끼리도 동학년이거나 특별한 매개로 엮이지 않는 이상 함께 하기 어려운 구조다. 교사들이 가까스로 힘을 모아도, 이 학교 저 학교로 곧 다시 흩어진다. 기껏 노력한 결과가 도루묵이 되는 사례들이 많다.
여러 교육 정책이 말해주듯 교육 기득권 세력은 교사들이 서로 협력하는 환경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인 통제와 간섭, 줄 세우기 상대평가로 교사들을 갈라놓기에만 바쁘다.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협력 관계를 맺는 것 또한 그들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보수언론들은 늘 교사와 학부모들을 이간질한다. 그들이 묘사한 학교의 모습을 보면 교사는 늘 당하고, 학부모들은 갑질하고, 학생들은 짐승들 마냥 생각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수의 상식적인 부모들은 점잖게 물러나 있다. 정당한 요구나 제안조차 치맛바람으로 보일까 두려워서다. 그 와중에 사고능력에 의심이 가는 소수의 학부모들은 학교에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고, 학교와 교사는 이에 마구 휘둘린다.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는 자리에 있는 일부 학부모들로 인해 학교의 민주성이 훼손되기도 한다. 강준만 씨가 표현했던 것처럼 ‘침을 퉤퉤 뱉어놓고, 독식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정치계뿐만이 아닌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학부모들에게 당한 경험이 있는 교사들은 학부모와 연대하는 것에 심정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사와 학부모의 연대가 탄탄하게 이루어지면, 소수의 학부모들이 이상한 방식으로 깽판을 치는 현상을 다수의 이성으로 조절할 수 있다. 학부모와의 연대는 교사들에게도 결국 보호 장치로 작용할 것이다.
이런 연대를 위한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시인 이문재는 민주주의는 장소의 문제라고 말했다. 장소를 회복하지 않는 한 참여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교사들이 학교를 옮기면서 발생하는 파편화, 본인 아이의 담임 교사 외에는 알 수 없는 파편화, 주도권을 가진 세력들이 이간질을 하면서 발생하는 파편화 등의 문제에 대응해 물리적 공간을 어떻게 확보할지 교원노조가 고민해주었으면 한다. 특히 가까운 지구별, 지회별 교사들과 학부모가 스스럼없이 연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교원노조가 앞장섰으면 좋겠다. 이 공간에 관료적, 교조적, 고압적인 문화는 절대로 없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평적이고, 느슨한 연대를 맺으며,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장소다 .
박수받으며 떠나게 하자
나는 현재 새 노조 설립을 준비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는 바도, 연결된 바도 전혀 없다. 전교조에 제안하는 위의 내용들은 이 소식을 듣기 훨씬 전부터 생각해왔고, 글을 통해 진작부터 주장하고 싶었던 내용이다. 이 마당에 이런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시간적인 우연의 일치라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확신한다. 여러 추측과 우려를 낳는 상황임에도 이상하리만큼 확신한다. 새로운 노조의 설립으로 교육개혁 세력은 확장될 것이다. 전교조의 참교육 정신은 진화된 형태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김은형 씨 인터뷰를 통해 간략하게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노조가 추진하고자 하는 일들은 전교조가 그간 원했던 교육 개혁의 방향과 상충하지 않는다.
교육노동운동재편모임 김은형 대표
"전교조를 비판하거나 대립하는 모양새로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출처 - <연합뉴스>
법외노조가 되었다는 이유로 전교조를 버리고, 악법의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노조활동을 하겠다는 것이냐는 비난도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허나 교섭권이 없는 노조의 조합원들이 느끼는 박탈감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장에 있는 나와 같은 평범한 교사들에게 당장 필요한 건, 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는 경험이다. ‘작은 성공’들에서만 얻을 수 있는 교사로서의 ‘자기 효능감’ 말이다. 단번에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해도, 큰 그림 속에서 하나씩 바꿔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새로운 노조가 이 부분에 집중하겠다고 나선다면, 나로서는 환영이다.
위로 향하던 목소리를 위와 아래로, 한쪽에만 외치던 목소리를 양방향으로 낼 수 있다. 교육개혁이 쌍두마차를 얻는 것이다. 강한 결속, 하나의 이름, 통일된 주장만을 능사라고 생각하지 말자. 강한 결속은 분열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정말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느슨한 연대라고 생각한다. 만에 하나, 이것이 기득권 세력이 그토록 바라는 분열과 교육개혁 세력의 축소로 이어진다면, 나는 교육과 인간에 대한 희망의 많은 부분을 잃게 될 것 같다. 교원노조는 나와 같은 평범한 교사들이 더 이상의 절망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길 바란다.
나는 아직 할 만큼 해보지 않아서 훌훌 떠나지는 못하겠다. 그들은 해볼 만큼 해봤으니 떠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걸 게다.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왜인지 그 심정을 알 것 같다. 고마웠다 말하고, 박수받으며 떠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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