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5년 12월 25일 금요일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은 역사적 사실로 확증되었다

[항일연재14]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은 역사적 사실로 확증되었다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14)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5/12/26 [08:07]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14)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은 역사적 사실로 확증되었다




사진1.동북항일연군의 투쟁근거지
▲ 동북항일연군의 연변조선족자치주내 주요 투쟁근거지이다. 각 군들이 활동하는 투쟁근거지가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인들로 조직된 유격대는 동북만과 남만을 포함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반일·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2) 반일유격대 창설에 관한 서적자료

지난 장에서는 남쪽의 학술논문 반일유격대창설과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선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미 앞선 장에서 반일유격대창설에 대한 세 개의 학술논문을 분석해보았지만 김일성 주석이 주도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에 대해서는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모두 빠져있다. 그렇다면 김일성 주석이 주도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에 대해 남쪽의 모든 학술논문 혹은 연구서적 등에서 누락이 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남쪽에서도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반일인민유격대창건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 정확하게 분석을 한 자료도 있다.

아래에서 이에 대해 인용을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인 반일부대와의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대한 일화를 살펴보자. 1932년 봄 새 세대청년공산주의자의 지도자 한 사람은 서너 명만의 동지를 데리고 포악하기로 이름난 반일부대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안도시가로 대담하게 들어갔다. 그 지도자는 반일부대 사령관에게 그들의 행동이 일제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으며 그리고 조·중 민중이 힘을 합쳐 투쟁해야 하는 데 대하여 설득력 있게 해설하였다. 완고하고 포악하던 반일부대 사령관은 지도자의 정치적 식견과 방일혁명정신에 탄복하여 마침내 반일공동투쟁에 나설 것에 동의했다.

이와 같은 유격대를 조직하는 활동, 유격구를 창설하는 활동, 대중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활동, ·중 민중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활동 등에 기초하여 항일유격대가 결성되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이영배, 김철희 등이 1932425일 안도현에서 항일유격대의 최초의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후 새 세대청년공산주의자들은 동만의 각 현에서도 유격대를 결성하였으며, 1932년 봄에는 왕청, 연길, 화룡, 훈춘 등의 각 현에서 각각 유격대가 결성되었다. 이 당시의 연길현에서는 박 동근, 박 길, 최 현, 임승규 등의 동지들이, 왕청현에서는 양 성룡. 이 광, 김 철, 장 시환, 안 길, 이 봉수 등의 동지들이, 화룡현에서는 허 운석, 차 용덕, 박 영순 등의 동지들이 활동하였다.

동만에서 뿐만 아니라 북만과 남만에서도 항일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북만의 화현, 방정현의 지구에서는 김 책, 이 기동, 등의 동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하현, 호림현, 무원현 등의 지구에서는 최 용건, 이 학만 등의 동지들이 활동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 흥광, 이 동광 등의 동지들은 남만의 석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항일유격대는 주체적인 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하는 무장대오였다. 지난 시기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의 사대주의, 교조주의, 종파주의의 오물을 씻어 버리고 민중의 힘과, 민족 자체의 힘으로 조국해방을 쟁취한다는 주체적인 사상에 의해 지도되고, 주체적인 노선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는 무장대오였다.

항일유격대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민중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의 군대였다. 항일유격대는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뒤집어엎어 민중의 힘에 의해 운영되며 이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민중정권을 세우고 나아가서는 해방된 조국 땅에 사람의 자주성이 완전히 실현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에 의해 지도된 반일군대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을 내걸었으나, 편협한 자산가의 이익에 얽매여서, 민중의 이익을 저버리기 일쑤였으며, 심지어는 민족의 원수 일본제국주의에 투항하기까지 하였다.

항일유격대는 무기만 들고 싸움만 하는 단순한 무장대오가 아니라 광범한 민중과의 연계 밑에 활동하는 대중운동의 선전자, 조직자이기도 하였다. 항일유격대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민중의 떠나서 살 수 없다라는 신조를 가지고 항상 민중들 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을 애국주의사상, 계급사상으로 교양하고, 그들을 유격대의 주위에 강철같이 묶어세우며 반일대중단체들을 조직·확대하여 성스러운 항일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였다. (항일무장투쟁사. 남현우. 대동신서. 1988829. 138~140)

인용문은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선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이전 장에서 살펴본 세 편의 학술논문 보다는 비교적 정확하게 분석을 하였다. 물론 인용문도 남쪽의 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에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선포한 사실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큼 분석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인용문은 반일인민유격대1932425일 안도현에서 창건되었고, 주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왜 창건을 했으며, 향후 투쟁방향과 지향점에 대해서까지 정확하게 분석을 하였다.(본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분석을 할 계획이니 여기서 그친다)

인용문은 비교적 이전 장들에서 살펴본 세 편은 남쪽 학술논문들보다는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술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미진한 면이 없지 않다. 즉 저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이영배, 김철희 등이 1932425일 안도현에서 항일유격대의 최초의 부대를 조직하였다.”는 한 문장으로 그치고 있다. 물론 저자는 인용을 한 내용 앞과 뒤에 준비과정과 향후 투쟁방향 등 비교적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을 하였지만 그래도 뭔지 부족함이 많이 남는 분석이다. “1932425일 안도현에서 항일유격대의 최초의 부대를 조직하였다는 내용만 놓고보면 비록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차원에서 유적지 조사 시 채택했던 짧은 내용의 주 의제보다도 더 간략하고 내포하고 있는 내용 또한 우리에게 던져주는 내용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건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창건한 반일인민유격대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저자도 항일유격대의 최초의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후 새 세대청년공산주의자들은 동만의 각 현에서도 유격대를 결성하였으며,라고 하여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였으나 그 핵심을 짚어내지 못한 느낌을 준다. 필자의 욕심으로는 아예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창건한 반일인민유격대만을 따로 분리하여 분석하지 않았기에 미진한 감이 없지 않다고 보여 진다. 그건 결국 저자 역시 남쪽의 다른 학술논문들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민족주의적인 경향에서 분석을 했다고 하지만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이 곧 1930 ~ 1940년대 해방이 될 때까지 반일·항일무장투쟁의 핵이었다는 것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본다. 물론 남쪽 현실의 제약이 크게 작용을 할 수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인용문을 보면 위에서 지적한 내용 말고는 비교적 정확하게 분석을 하였다. 이전 장에서 살펴본 남쪽의 세 편의 학술논문에 비해 저자가 분석한 항일유격대의 창건과 그 준비과정 그리고 의미, 투쟁 방향성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논증을 하였다. 또 항일유격대 창설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세 편의 논문들과 대동소이하다.

또 저자는 항일유격대의 창설은 매우 치밀하고 복잡하게 계산된 노정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다른 학술논문들보다 더 정확히 분석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인용문 앞부분에서 언급한 중국의 반일부대들과의 반일통일전선전략 실현을 위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실제적 논증을 하였다. 이 역시 정확한 분석이다. 또 유격대 창건을 언급한 뒤 부분 역시 정확하게 지적을 하였다. 즉 지금까지 반일·항일투쟁을 해왔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방식과 공산주의계열의 투쟁방식에 대해서는 실패한 운동으로 보고 있으며, 실패한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을 한 다음 새로운 투쟁방향을 설정하였다고 분석하였다.

또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반일·항일무장투쟁을 해나가는데 있어 백성들에게 철저하게 의존을 했다는 것 역시 정확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 장에서 필자도 간단히 언급을 하였다. 이를 함축 요약하는 문장이 바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민중의 떠나서 살 수 없다이다. 간단한 문장이다. 이 믿음은 1960년대 이후 세계 약소국들의 유격투쟁에 있어 근본원칙이 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김일성주석이 유격투쟁을 함에 있어 철저히 인민에 의거해서 투쟁을 한다.”는 노선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이러한 유격투쟁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승리를 가져다주는 지에 대해서 다른 나라, 민족들의 유격투쟁가들은 몰랐다.

김일성주석이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민중의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철저히 인민에 의거해서 투쟁을 한다.”는 유격투쟁방향은 김일성 주석이 19311215일 안도현 명월구에서 있었던 겨울명월구회의를 준비하면서 찾은 유격투쟁의 기본원칙이다. 당시 김일성주석은 겨울명월구회의를 준비하면서 많은 사색을 하였다. 이에 대해 김일성주석은 유격투쟁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이며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맞서 확실하게 승리를 할 수 있는 유격전의 원칙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해답을 찾는다. 그건 곧 다른 나라나 민족의 투쟁과정에서 찾은 것이 아니고 바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우리겨레의 투쟁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사색을 한 끝에 찾아낸 해답은 우리겨레의 유격투쟁인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우리가 수행하여야 할 무장투쟁의 기본형식으로 선택하는 경우 그 투쟁형태가 우리나라 실정에 적합 하겠는가 적합치 않겠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여보았다. 그 과정에 손자병법도 보고 삼국지도 다시 보았다. 우리나라의 병서들 가운데서는 동국병감이나 병학지남과 같은 것을 보았다.

유격전의 시원이 기원 400년대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유격전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맑스와 엥겔스가 제일 흥미를 가지고 연구한 유격전은 1812년 로불전쟁시기의 로씨야농민무장부대의 활동이었다. 로불전쟁이 낳은 빨찌산영웅 제니쓰 다위도브, 정규부대와 빨찌산의 련합작전을 능숙하게 지휘한 꾸뚜조브 장군의 이야기는 유격전에로 끌리는 나의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해주었다.

유격전을 기본형식으로 규정하는데 있어서 임진조국전쟁은 나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었다. 나는 임진조국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의병들의 투쟁을 유격전의 역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 하나의 모범이라고 간주하였다. 곽재우, 신돌석, 김응서, 정문부, 서산대사 그리고 최익현, 류린석 등 의병출신명장들이 발휘한 용감성과 다양한 전투방법은 나를 완전히 매혹 시키었다. 유격전이라는 말은 발톱까지 무장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대전을 눈앞에 둔 나의 심혼을 온통 틀어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필자는 인용문에서처럼 유격투쟁의 기본원칙을 임진왜란에서 찾았다는 데 전적으로 동감을 한다. 물론 우리겨레는 이미 우리역사 이야기에서 고증과 논증을 한 선배사상 · 조의선인 · 화랑정신이 그 근본을 이룬 유격투쟁 혹은 비정규전을 기원 수천 년 전부터 상시적으로 벌여왔다. “선배사상 · 조의선인 · 화랑정신그 근본정신은 바로 우리 땅을 침략한 외세에 맞서 정규군만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땅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와 같이 떨쳐 일어나 전투를 벌였다. 그건 곧 유격투쟁의 기본원칙인 침략자와 직접 싸우는 군대 혹은 유격대 뿐 아니라 백성들이 그 유격대를 원호하고 때로는 한 전호에서 싸우는 정신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우리겨레에게는 수천 년 전부터 유전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채택한 유격전의 기본원칙은 바로 우리 겨레가 수수천 년 이어 내려온 싸우는 형제들과 모든 백성들은 하나가 되어 투쟁을 한다는 정신을 접목한 유격대와 백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원칙이 위에서 언급한 바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유격대가 민중의 떠나서 살 수 없다라는 신념이요 믿음인 것이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유격대와 백성들 간의 유기적인 협력을 할 수 있는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다. 또 반일·항일무장투쟁을 승리적으로 결속하고 난 후 한 전호에서 싸운 백성들과는 또 모두가 하나가 되는 평등의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인용문의 저자는 여기까지 언급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가 이전 장에서 살펴본 남쪽 세 편의 논문보다는 훨씬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을 하였다.


사진.2,3 백두대지 산발
▲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백두대지의 산발은 겉으로는 펑퍼짐 해보이고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산발을 타보니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러한 산발을 타면서 간고한 반일·항일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우리 조상들은 잘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이동을 하면서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은 산발을 타고 넘으며 간고한 투쟁을 벌였다. 실제 동만 각지의 산발은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높고, 가파른 험산준령들이었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4.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에 대한 북측의 자료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소사하 무주촌 북산)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였다는 북측 자료는 세기와 더불어를 인용하여 이미 올려주었다. 하지만 이번 장에서도 본 내용을 전문 인용하기로 한다. 중복되기는 하지만 같은 내용에 대해 연변조선족자료, 남측자료와 동시에 비교를 하여 분석하기에 또 다시 인용을 한다.

1932425일 아침

우리는 토기점골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가지였다.

이깔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등판의 공지에 새 군복을 떨쳐입고 무기를 휴대한 대원들이 구분대단위로 정렬하였고 그 공지의 한쪽변두리에 소사하와 흥륭촌일대의 인민들이 모여서서 술렁대고있었다.

대원들의 생신하고 름름한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는 내 눈앞에는 가지가지의 회억들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이 무장대오의 결성을 위하여 우리의 동지들이 길은 얼마나 걸었고 모임은 얼마나 가졌고 연설은 얼마나 하였고 준령은 얼마나 넘었으며 그 과정에 가슴아픈 희생은 얼마나 당하였던가. 반일인민유격대는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겨운 로고와 피어린 투쟁과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 우리 혁명의 고귀한 산아였다.

나는 이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동지들과 고인들을 토기점골등판에 모두 불러오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가슴에 차넘치는 격정을 터뜨려 연설을 시작하였다.

내가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을 선포하자 대원들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인민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만국로동계급의 전투적명절인 51일 우리 반일인민유격대는 붉은기를 앞세우고 안도현성에 입성하여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면서 보무당당히 열병행진을 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김일룡이 이날의 행진에서 노래선창을 담당하였다.

그날은 시민들뿐아니라 반일부대장교들과 병사들까지 거리에 떨쳐나와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환영의 인사를 보내고 축하의 박수를 쳐주었다.

무력시위를 끝낸 대오가 토기점골로 돌아왔을 때 차광수와 김일룡이 우리 집으로 달려가 몸져누워있는 어머니를 데려왔다.

병고에 시달린 얼굴, 미간에 생긴 주름살, 머리의 흰오리, 그러나 어머니의 눈은 고요히 웃고있었다. 어머니는 리영배의 곁에 다가와 총이며 탄띠며 오각별을 오래오래 만져보았다. 그 다음 김철, 조덕화, 김일룡, 방인현, 차광수의 앞을 거닐면서 이 총도 쓸어보고 저 총도 쓸어보고 이 어깨도 만져보고 저 어깨도 만져보고.

미구에 어머니의 눈이 서서히 젖어들었다.

정말 장하구나. 우리 군대가 생겼으니 이제는 됐다. 왜놈들을 치고 나라를 꼭 찾아야 한다!

음성도 퍼그나 젖어있었다. 어머니는 분명 우리에게 바친 자신의 지성은 까마득하게 잊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먼저 떠나간 아버지와 애국지사들의 로고에 대하여 생각하였을것이다.

그후 연길, 왕청, 훈춘, 화룡을 비롯한 동만의 다른 지방들에서도 유격대들이 련이어 조직되였다. 김책, 최용건, 리홍광, 리동광 등 조선의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북만과 남만에서도 유격부대들이 련이어 태여나 적들에게 포문을 열었다.

1932년 봄은 항일대전의 총성속에서 무르익어갔다. (세기와 더불어 중에서 새 무장력의 탄생’)

똑 같은 내용을 중복게재를 해주는 이유는 이전 장에 같은 내용을 연재했다고 안내 글을 올려주고 또 클릭하면 바로 그 내용으로 갈 수 있는 시대이지만 글을 읽는 현시대의 독자들은 조금이라도 불편하다고 여기면 그런가보다 하고 대부분 그냥 지나친다. 그 점에서는 필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를 분석하거나 연재하는 내용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맥이 끊어지게 되어 제대로 된 내용을 이어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알기에 필자는 우리역사 이야기 상고대사부분을 연재할 때에나 반일·항일전적지 답사기를 연재에서도 이전 장들에서 인용을 했거나 분석한 내용들을 중복 또는 여러 번 인용하고 있다. 이 점을 알고 본 글을 대했으면 한다.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등판에서 있었던 반일인민유격대창건에 대해서는 북의 자료가 역시 미진함이 없이 시원스레 풀어준다. 물론 당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김일성 주석이 주도를 했고, 또 향후 해방이 될 때까지 줄기차게 반일·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기 때문에 북의 자료가 훨씬 정확하고 상세하며 모든 정황을 시원스레 기술하고 있음은 당연지사이기는 하다.

하지만 필자는 어차피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간고한 투쟁을 벌였던 모든 이들은 우리의 조상들이다. 또 당시에 비록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에 신음하고 있었지만 남과 북이 따로 있지 않았다. 아니 상상 속에서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간고한 투쟁을 벌인 조상들의 역사마저 연구를 못하게 막아 나선다는 것은 우리겨레의 역사 뿐 아니라 온누리 그 어떤 민족에게도 있지도 않았으며,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오로지 현 남쪽에서만 막아 나서는데 이는 민족사에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치욕으로 남을 것이다. 필자는 단언한다. 우리의 후손들은 이러한 남쪽의 역사를 두고 냉혹하고 준엄하게 역사적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무서운 역사적 평가가 현 남쪽의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남쪽의 우리겨레 구성원들은 알아야 한다.

이야기가 좀 다른 방향으로 흐른 것 같지만 그러나 결코 아니다. 필자 역시 위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인용문의 내용을 분석함에 있어서 스스로 자기검열에 빠져있음을 고백한다. 얼마나 참담한 현실인가.

인용문은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선포한 사실과 그 이전 준비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에 대해 사실적으로 기술을 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역시 그 과정이 얼마나 간고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필자 역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을 아우르는 반일·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연구하기 전에는 솔직히 그 어려움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또 자료를 가지고 연구만 할 때와 직접 현지를 답사하고 난 후 또 다시 지난날에 연구를 했던 자료를 대할 때 다가오는 느낌은 천양지차이다. 그러니 실제 간고했던 투쟁은 답사를 하고나서 연구자들에게 다가오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인용문에서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뒤 장들에서 분석하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적수공권(赤手空拳)의 맨 주먹인 상태에서 아시아 최강을 자랑하고, 당시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안에 들 정도의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인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본다. 물론 의병투쟁부터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도 192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가열차게 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까지의 투쟁과 1930년대 특히 1931818일에 있었던 만주사변, 그리고 그 이후 일제가 만주까지 침략을 하여 괴뢰국을 세우고 실직적으로 직접통치를 하면서 반일·항일독립투쟁가들을 일본군경을 동원하여 탄압하던 시기의 조건은 비교할 수가 없다.

그래도 민족주의계열이 가열차게 반일독립투쟁을 하던 시기까지에는 만주 전 지역을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이 직접통치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 초반 이후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인 60여만의 관동군과 만주괴뢰군 그리고 조선인 간도 특설대를 합한 100만을 헤아리는 적들과 맞서 적수공권은 젊은 조선인들이 싸운다는 것은 세계 전쟁사에 전무후무한 역사이다. 그것도 내 나라 땅에서 우리겨레 구성원들의 원호나 후방지원을 받지 못한 남의 나라 땅에서 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바로 1930년대 초반 이후 우리 조상들은 그 불가능을 가능한 현실로 바꾸어 근 15년여를 간고한 무장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인용문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겨울명월구회의부분을 다루 때에도 인용을 하였지만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에게는 후방 지원을 해줄 나라도 없고, 정규군도 없으며, 당시로서는 처음 시도해보는 유격전이었기에 그 어려움은 말로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문제는 역시 나라가 없기에 남의 나라에 가서 투쟁을 벌인다는 점이다. 결국 나라가 없다는 것은 유격투쟁의 모든 조건들이 전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빼앗긴 나라를 떠나 동북만주일대에서 살아가는 같은 겨레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 역시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자기 한 몸 건사하며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유격대를 원호하고 투쟁의 대열에 참여를 한다는 것 역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이와 같이 반일·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유격투쟁을 벌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1932425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안도현 명월구(옹성라자)에서 19311215일에 있었던 겨울명월구회의(옹성라자회의)에서 그 문제를 어떻게 풀며, 유격대를 조직하고 유격전을 벌일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대안을 내오기는 하였다. 하지만 회의에서 말로서 결정하는 것과 현실세계는 또 다르다. 바로 인용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냈으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을 당했는지에 대해 회고를 하는 내용이다.


사진.4. 백두준령의 이름 모를 나무열매
▲ 백두준령에 빨갛게 익은 이름 모를 산 나무열매가 앙증맞고 예쁘기 그지없다. 조선반도 남쪽에서도 저렇게 예쁜 산 나무열매가 많이 있다. 어차피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을 사이로 두고 있기에 조선반도의 매우 흡사하다. 무장투쟁과는 관련성이 전혀 없지만 두만강 너머 백두대지의 산야를 감상해보라는 의미로 올렸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5.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에 대한 각 자료들 종합

지금까지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선포한 데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자료 2, 남측 학술자료 세 편과 서적 한 편, 그리고 북의 자료를 비교분석하였다. 이에 대해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 두 편 모두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창건했다고 고증을 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차원의 유적지조사를 할 때 설정한 주 의제에는 비록 간략하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기술을 하고 있다.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의 주체와 시기 그리고 장소가 정확히 기재되어 있다.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위해 벌인 준비사업에 대해서도 추정을 할 수 있는 내용을 정확히 포함하고 있다.

한편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에는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창건했다고 고증을 하면서도 마치나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을 중공당에서 명령을 하여 한 것처럼 기술을 함으로서 교묘하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즉 학술자료에서는 “1932년 봄, 순시원으로 파견을 받은 김일성은 안도현에서 군중을 발동하여 항일무장대오를 건립하였다. 김일성은 안도현 소사하토기점에서 군사훈련반을 꾸려 항일청년들을 양성한후 구국군의 별동대를 조직,”라고 하여 김일성 주석이 중공당의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창건하라고 명령을 받고 순시원으로 파견이 되어 반일인민유격대창건한 것처럼 교묘하게 왜곡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부이기는 하지만 연변조선족학술자료에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동북만주와 남만 일대에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벌인 것이 모두 중공당의 지도 또는 명령하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왜곡을 하고 있다. 그 러나 또 다시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일대에서 벌일 젊은 조선인들의 유격대의 창설과 유격투쟁과정에서 중공당과는 반일민족통일전선전략의 견지에서 련대투쟁을 벌였던 것이지 일방적으로 중공당의 지도와 명령 그리고 전술전략에 따른 피동적인 투쟁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연변조선족학술자료와는 다르게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일대에서 벌어진 반일투쟁은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중공당과 구국군의 투쟁마저도 이끌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구국군들을 적극적인 반일전선으로 참여를 하게 이끌어준 것이 조선의 투쟁가들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일인민유격대창건준비 과정을 분석하는 다음 장들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남측 자료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서포에 대해서 세 편의 논문자료와 한 편의 서적자료 등 총 네 편의 자료를 인용하여 분석해보았다. 네 편의 자료 중에서 이종석과 신용하 교수의 두 편의 학술논문자료는 이에 대해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남쪽 두 편의 논문만 읽어본 배달겨레 구성원들은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도 우선은 부정적인 시각부터 드러낼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북측 자료들이나 기타의 자료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이 사회에 주류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논문 한 편인 한인들의 중국공산당 입당과 항일유격대의 성립에는 “1932년 연길현유격대가, 화룡현 에서는 평강유격대가 조직되었다. 왕청현, 안도유격대를 묶은 왕청유격대가, 훈춘에서는 영북유격대와 영남유격대가 조직되었다가 후에 훈춘유격대로 발전하였다.”라는 문장 가운데 왕청현, 안도유격대를 묶은 왕청유격대라고 하여 안도현에서도 반일·항일유격대가 조직이 되어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그 의미가 매우 미미하게 기술을 해놓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학술논문에서 다루었다는 정도의 그 의미를 두어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논문에서 왕청현, 안도유격대를 묶은 왕청유격대로 발전이 되었다고 하여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1932425일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가 그 후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창건된 수많은 다른 반일유격대와 그 격을 동일시하거나 그 의미가 별로 없는 것처럼 기술을 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일대에서 조직된 수많은 유격대의 핵심이 바로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이다.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1932425일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이 되고, 이를 주도한 김일성 주석의 지도하에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수많은 반일유격대가 창설이 된 것이다. 즉 안도 소사하의 반일인민유격대가 다른 지역의 반일유격대 창설을 조직지도 하였고 향후 반일·항일무장투쟁의 지휘도 모두 안도 소사하의 반일인민유격대지휘관인 김일성 주석이 하였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조직한 반일유격대들이 중공당 동만특위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지난 장들에서도 여러 차례 다루었지만 이는 반일민족통일전선전략에 따라 능동적으로 연대를 하여 투쟁을 한 것이지 결코 중공당 동만특위의 하부조직으로서 그 명령과 조직지도를 받고 피동적으로 투쟁을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조선인들이 조직한 반일유격대들은 김일성 주석이 이끌었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물론 분석하는 연구가들이나 학자들의 처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약간씩 설을 달리하기는 한다. 하지만 동북만과 남만 일대의 수많은 유격대지휘관 및 유격대출신들이 해방 후 북으로 귀국을 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핵심골간이 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인들이 조직한 반일유격대를 김일성 주석이 이끌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남측자료 중 서적에서 기술한 내용을 보면 위에서 언급한 세 편의 논문들 보다는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서적에서 고증했거나 논증한 내용이 제대로 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남측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그나마 괜찮은 논증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서적에서 인용한 내용을 보면 반일유격대 창설기반과 투쟁방향에 대해 정확히 기술을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싸움을 승리적으로 결속을 하고 반일·항일투쟁가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꾸려갈 사회에 대해서도 비교적 정확히 논증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서적자료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미진한 부분이 없지 않다고 이미 앞에서 논증을 하였다. 그것은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1932425일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는 내용을 정확히 적시하지 못했다. 이런 점 역시 핵심을 지나쳐간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북측 자료

북측 자료를 보면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아주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사실 1930년대 초부터 19458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동북만주와 남만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벌인 우리 조상들의 투쟁사에 대해서는 북측만큼 정확하면서도 방대한 자료를 축적한 곳은 없다. 또 당시 반일·항일투쟁사에 대한 연구 역시 북만큼 치밀하게 한 곳 역시 없다. 본 연재에서 세기와 더불어의 내용 중 해당한 내용만 아주 짧게 인용을 하였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연구 자료와 서적들이 존재를 한다.

북측 자료에 대한 인용문 해석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검증이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더 이상 인용문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는 할 필요가 없다.

이상 여러 자료를 비교분석을 해본 결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치밀한 사전준비와 검토를 거쳐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 주도하에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을 선포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 주도하에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비단 위에서 살펴본 여러 편의 논문과 자료를 분석한 결론에 의해서 증명된 것만이 아니다. 필자가 직접 현지를 답사하면서 당시 그곳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는 것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소재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자료의 90%이상을 수집을 하였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수많이 존재하는 반일·항일투쟁유적지를 조사했던 이송덕 반일·항일투쟁사학자는 항일무장투쟁에 참여를 했던 투사들과 직접 대담을 통해 확인을 하였다고 우리들에게 설명을 하였다. 또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고 있는 항일투사의 직계후손들로부터도 대담을 통해 김일성주석이 당시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벌인 항일무장유격투쟁을 주도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필자가 현지를 답사하면서 만나본 무주촌에 거주하는 조선족 및 한족들 역시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현 무주촌 북산)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조선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족들은 우리와 같은 겨레가 아님에도 그들 역시 당시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답사를 할 때 부정확한 중국말로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기념비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지 않고 그저 김일성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유적지를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이 말은 한족들 역시 그 사실에 대해 아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위에서 분석한 학술논문자료를 분석한 결론과 현지답사에서 직접 확인한 결과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현 무주촌 북산)에서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여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둘째.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는 향후 동북만주와 남만일대에서 반일유격대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소사하에서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를 모범으로 하여 동북만과 남만일대에는 수많은 반일유격대가 창설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위 인용문을 통해서 살펴보았고 또 후 장들에서 향후 투쟁방향과 반일유격대창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정도로 그친다.

셋째.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는 향후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젊은 조선인들이 조직한 반일유격대의 반일·항일무장투쟁을 조직지휘 하였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중공 동만특위에 속해있었지만 이는 다른 나라 땅에서 벌이는 유격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30630일부터 72일까지 진명학교에서 있었던 카륜회의의 주요결정사항인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에 따른 련대투쟁의 형태이다. 당시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조직되고 투쟁을 한 대부분의 유격대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해방 후 북으로 귀국을 하여 해방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이 이끈 북의 정체는 오늘까지 굳건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 역시 강력하게 이를 뒷받침한다.

넷째.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에 의해서 창설된 동북만과 남만일대의 각 유격대는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유기적 연대를 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투쟁을 벌였다. 이는 이후 답사기를 연재하면서 고증과 논증을 할 것이다. 이는 결국 한 나라의 정규무력과 맞먹는 조직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각 지역에서 조직 창설된 유격대들은 향후 투쟁을 함에 있어서 각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에 기반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강조한 바 있듯이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진리를 통해 각 지역의 유격대원들을 끊임없이 교양을 하였다. 따라서 당시 반일·항일유격투쟁을 벌이던 유격대원들은 해당지역의 주민들과 한 가족처럼 유기적인 연결을 맺고 있었다. 당시 유격대가 어떻게 주민들과 그처럼 끈끈한 연계를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준비과정을 분석할 때 살펴보기로 한다.

여섯째.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이 선포된 것은 19311215일 안도현 명월구에서 있었던 겨울명월구회의에서 기본적인 구상과 결정이 나왔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 장들에서 여러 번 언급을 하였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 반일·항일독립운동가들은 19311215일 안도현 명월구에서 있었던 겨울명월구회의유격대를 조직하여 유격투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무장으로 맞선다.”는 주요 결정사항을 받아들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을 하였다. 이들은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유격대창건에 필요한 조직의 구성과 지도, 무장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데 대해서는 다음 장들에서 구체적 사례를 들어 고증과 논증을 할 것이다.

일곱째.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이후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돌입을 하였다. 당시 이곳에서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를 따라 동북만과 남만일대에서 수많은 반일조직들이 생겨났으며 이를 중심으로 드넓은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반일·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언제나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가 있었다. 물론 후일 이때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의 중심부가 왕청현으로 옮겨갔다. 이때 왕청현은 중공 동만특위가 있었으며, 조선의 유격대활동중심거점 역시 이곳으로 옮겼다. 이는 유격활동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일 왕청현 답사기를 쓸 때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상 몇 가지로 19324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창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성과 그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당시 우리 조상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 치열하고 간고하게 투쟁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비록 쉽지 않은 길이지만 조상들의 업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것이 다가올 후세들에게 조금이라도 수치스러운 역사를 물려주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 《계속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20151225
이 용 섭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