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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정 출신 재미동포 박기식 선생과 지난해 9월 인사동 한 찻집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박귀현 기자] |
“리영희 기자가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했다. 1년에 한 번씩 부원들 야유회 가는데 그 사람은 촌지 뜯어낼 줄도 몰라. 부장이
장을 마련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 딱해 내가 조금 찔러 줬지. 그러니까 나하고 야유회 같이 가자고. 정보부에 있는
사람한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누린 중앙정보부에서 언론담당으로 일한 ‘공전(空轉)하는 정보원’ 박기식(87세) 선생은 지난해 고국을 찾아 <통일뉴스> 이계환 대표와 대담을 통해 지난 세월을 회고했다.
“통일 대박, 흥부적 대박 돼야”
“내 인격 파는 짓은 그만하자. 나도 살길을 찾자”는 생각으로 중앙정보부 일을 “바꿔치우고” 미국행을 선택한 뒤 41년이 흐른 지난해 9월 24일, 서울 인사동 찻집에서 만난 노신사는 결기만은 여전했다.
“박근혜 통일 대박, 좋다 이거야. 그 대박이 놀부적 대박 돼서는 안 되고, 흥부적 대박이 돼야 한다. 대박이라는 것은
어원이 주로 거기서 시작했을 거다. 같은 박이라도 흥부의 박은 부가 있고 선함이 있지만, 놀부의 박은 아주 망조가 드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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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는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와의 대담으로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박귀현 기자] |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뛰어들어 전두환, 노태우 정부 시절 입국금지 조치를 받아온 그가 지금은 남과 북을 큰 장애 없이 오갈 수 있게 됐지만 조국의 현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6.15, 노무현 대통령의 10.4, 이 길을 답습해가면 되는 것이고, 그리하면
자기 아버지, 엄마의 과거의 역사도 오히려 역사적으로 미화되고 재평가 될 것이고. 그 딸이 그래도 잘했다는 소리 들을 것이다.”
“요새 야당 꼴을 보니까 야당은 야당 구실을 제대로 못하더라. 야당성을 상당히 유지해야 하는데 보니까 2중대 소리 듣기에 꼭 뭐 그렇다.”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조선일보>를 드나들며 언론통제를 담당했던 그에게 ‘공전하는 정보원’이라는 별칭을 선물한 이는
고 송건호 한겨레 초대 대표이사. 송건호 선생은 반골 언론인 최석채 유고문집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원 박씨’를
‘공전(空轉)하는 정보원’으로 명명했다.
그는 “거기 보면 내 이름까지 안 나와도 ‘정보원 박씨’, 다 알지. 오히려 그것이 내가 볼 때, 공전한다는 것은 악질
아니고 헛돈다는 것이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그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상당히 호평한 셈이 된다. 나보고 눈이나 찌푸리고 악질노릇 했다면 욕이 되지만...”
통일운동가 된 정보원의 ‘진짜 애국론’
공전하는 정보원은 직업을 바꿔치우고 미국으로 이민 가 “철저한 소시민”으로 거듭나야 했다. “거기 가서도 한국적인 그런
멘탈리티로 살려고 하면 안 된다. 미국 가면 직업에 귀천이 없잖나. 그러니까 처음에 청소부, 그 다음에 대학에 가서 영어도 좀
배우고...”
이후 전자계통 직장생활을 20년 가까지 하다 심장병으로 62살에 조기은퇴한 후 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그의 미국 자택은 민주화운동 시기 미국을 거쳐간 많은 이들의 여인숙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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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박기식 선생이 고 윤인상 작곡가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사진제공 - 박기식] |
“우리집 거쳐간 사람 많다. 특히 임창영, 최덕신하고 제일 가까웠고, 태권도하는 최홍의 하고도 친했고, 국내인사로서는 어떻게
수소문해서 날 알았는지 김근태가 와서 사진도 찍고, 조정래, 황석영 둘이 다녀갔고, 홍근수 씨는 자주 왔고, 이부영 씨도 한번
다녀갔고. 그 정도로 하지...”
고 임창영 전 유엔주재 한국대사와의 인연으로 1979년부터 북한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지난해 4월에도 평양을 방문해 자신의 생일상을 평양에서 받았다고.
“80년대 후반쯤 되니까 우후준숙처럼 막 이제 누구나 (평양에) 가게 되더라. 무슨 행사에 다들 우우 떼를 지어 가고.
그때는 김(일성) 주석도 흔하게 사진 찍고 이런 판이야. 나는 길만 텄다 뿐이지 다 떼지어 가는데... 내가 이산가족이 아니니까.
내가 거기 가서 사실 정붙일 데도 없고, 한번 여행한다는 것이 몇 천 불 드는 거다. 그거 쉬운 거 아니다.”
그 과정에서 별별 일을 다 경험했지만 그는 한눈 팔지 않고 묵묵히 한길을 걸어왔다. “미국에 이민 와서 0000 신문을 하던
000는 처음에는 아주 뭐 통일운동 한다하고 하면서... 그리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뭐 그렇게 행선이 묘연해, 지금.”
“그쪽 출신자로서 그걸 돌파하고 튀어나온 사람이 지금 생각해도 나 외에는 없어요. 물론 망명한 사람은 있다... 뭐 여기에
있는 내 일가친척이나 나에 대한 흠을 찾기 위해서 별별 그걸 다 뒤졌겠지. 하지만 내가 경제적으로나 뭐, 부정에 대해서는 재간이
없는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부인과 함께 2남 2녀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검소한 생활을 이어왔다. “내가 나를 위해서는 돈 한푼 안 쓰는
사람”이라는 것. 담배와 술, 골프나 스포츠 경기 관람 등을 멀리하고 “생활의 지혜”를 발휘해 “조금씩 조금씩 비축했다가, 그래도
부자도 아닌 사람인 내가 쓴다”고.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으로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선 운동가로서 그가 버텨내기 위해서는 독특한 ‘미국 시민으로서의 애국관’이 필요했을 터.
“소위 글로벌하게 ‘와우, 위대한 미국 시민 왔구나 환영한다’ 이리 돼야지, 미국시민 가는 도처에서 위해를 당할까 싶어
전전긍긍해야 되는, 이게 미국의 오늘의 현상이잖나. 그걸 극복하는 것이 진짜 우리 애국론인데...”, “우리가 미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편승하겠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지금 미국의 주류는 군산복합체가 정계도 휘어잡고 다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진짜 미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래도 2차대전 말기에 미국이 희생자를 많이 내면서도 노르망디 상륙을 해서 불란서를
해방시켰다. 그때 세계에서 미국에 대해서 박수를 보냈다. 이제 그런 미국이 돼야 된다.”
음모사건들과 ‘무욕(無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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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식 선생은 스스로 '무욕'임을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박귀현 기자] |
그가 긴 세월을 한길을 걸으며 미국 시민으로서도 애국론을 펼 수 있는 근저에는 ‘무욕(無慾)’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아무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저 순리대로. 내가 철학을 한 사람도 아닌데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이 좀 터졌다. 내가 아무 허욕이
없다.”
다만,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대단히 극성인데, 그것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조선인이 조선반도 통일이나 평화문제에 대해서, 그거하고 비유해서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입장만은 확고하다.
걸어온 길이 독특한 만큼 현대사의 사건들에 대한 뒷이야기나 해석도 풍성하다. “내가 75년 파리에 가니까 거기 신용석이
특파원으로 있었다. 그리고 신용석이는 김형욱 실종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기자의 하나다. 그 사람은 어떤 특별한 커넥션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말문 탁 닫고 있지 말 안 한다. 그런 것은 평생 미궁으로 빠지는 거다.”
“육영수 여사 죽음도 문세광이 죽인 거 아니다. 김대중이 동경납치 됨으로써 한국이 소위 수세에 빠졌잖나. 일본의 재일동포가
일본의 경찰관 권총을 훔쳐와서 육영수를 죽였다. 오히려 일본이 이번에는 사죄하는 거다. 김대중 문제로 수세로 됐다가 오히려 공세로
넘어가는 거다.”
“박정희는 그때부터 육영수 여사를 두고도 오입했잖나. 그러니까 그 정보가 육영수에게는 안 들어가겠나 들어가지. 그래 바가지를
긁지, 긁으니까 재떨이 날아가지 않나. 그래서 그걸 두고 문명자가 ‘육박전’이다. 육영수의 육자하고 박정희의 박자하고.”
“현대사의 모든 사건은 이것은 내가 볼 때 전부 다 쿠션적이다. 음모사건이 다 그렇다. 미국의 그 수법이 JFK(케네디
대통령) 죽음을 지금 미궁으로 빠뜨려 이미 조사해 놓은 서류도 2039년까지 못 보게 하고 있지 않나. 다 알다시피 ‘밀리터리
인더스터리얼 콤플렉스’(군산복합체)가 도사리고 있고 거기 하수에 있는 조직이 있다고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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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운동은 건강에 좋고, 애국자가 되고, 천당에 갈 수 있다며 웃는 박기식 선생. [사진 - 통일뉴스 박귀현 기자] |
‘통일운동을 왜 하느냐’는 질문에 스스로 삼위일체적 답변을 준비해두고 있다는 그는 건강에 좋고 애국자가 되고 천당에 갈 수 있는 것이 통일운동이라고 강변했다.
“세상이 역사의 순리대로 되겠지만 통일은 불가피하게 틀림없이 실현은 된다. 나는 그걸 위해서 진력을 다 하다가 그저 살다가
끝나면 그것으로서 만족하는 것이다. 내가 꼭 결과물을 전취해서 그 열매 따먹겠다 그런 욕심은 없다”는 그의 ‘무욕’이 노구의 그를
아직도 건강하게 버티게 하는 근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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