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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9일 수요일

학살자 청룡, 50년 침묵한 비열한 이무기

학살자 청룡, 50년 침묵한 비열한 이무기
<베트남 나비기행⑤> 빈호아, 하미, 퐁니 민간인 학살지의 현재
꽝남성=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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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09  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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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은 베트남전쟁 종전 40년입니다. 그리고 한국군 전투병 파병 50년입니다. 지금까지 학자들과 언론인들은 베트남전쟁이 왜 발발했고, 어떻게 진행됐는가에 대해 천착해왔습니다.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고, 베트남전쟁 피해자들과 참전 군인들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있을 뿐, 가해자는 진실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베트남전쟁이 왜'라는 물음을 넘어서 한국사회는 "왜 민간인을 학살했는가", "어떻게 사죄해야 하는가"에 대해 늦었지만 답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어야 합니다.
<통일뉴스>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나비기금>이 마련한 '베트남 나비평화기행'(2~9일)에 함께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학살에 당사자가 사죄하고 해결에 나서기를 바라며 평화를 찾는 동행기를 마련했습니다.

   
▲ 베트남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마을 학살현장. 뒷 편 둥근 원이 포탄구덩이로, 1966년 12월 3일 청룡부대가 여기서 민간인 36명을 죽였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 말을 기억하거라."
베트남 중부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마을의 엄마들이 지금도 아이들을 재울 때 불러주는 자장가이다. 그리고 마을 어귀에는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적힌 한국군 증오비가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마련한 '2015 나비기금과 함께하는 나비평화기행' 참가자 20여 명이 7일과 8일 베트남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마을, 꽝남성 하미마을, 퐁니마을 등 민간인 학살 현장을 찾았다.
7일에 방문한 빈호아마을. 지금도 이 마을을 찾는 한국인들은 마을 안쪽까지 방문할 수 없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위령비, 한국군 증오비까지만 발길을 허락하고 있다. 좋은 꿈을 꾸고 건강한 아이로 자라라는 자장가는 이 마을에서 한국군의 학살을 기억하라는 가사로 붙여졌다.
1966년 12월 3일. 청룡부대 1개 대대가 빈호아로 행군했다. 이들은 폭탄구덩이에 36명의 주민을 몰아 넣고 총으로 쏴 죽였다. 그리고 6일까지 마을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 모두 5곳에서 430명을 살해했다. 여성 283명, 50~80세 109명, 아이 182명, 임산부 7명, 산채로 불태워진 양민 명, 머리가 잘린 양민 1명, 배를 갈라 살해된 양민 1명, 윤간.살해 2명, 2가족 몰살.
학살 당시 6개월 된 아기인 도안응이아는 피투성이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청룡부대가 쏘아댄 화약이 빗물에 섞여 눈에 들어와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됐다. 한국인의 방문에 냉소적이던 지역 인민위원회 간부는 청룡부대에 의해 가족을 잃었다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 80년대 영국인 작가가 청룡부대에 의해 빈호아마을에서 학살된 이들의 이름을 직접 조사한 뒤, 세운 위령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학살 당시 살아남은 도안응이아(오른쪽)과 부인.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8일 방문한 꽝남성 하미마을. 2001년 한국 월남참전전우복지회 지원으로 위령비가 세워졌다. 살해된 이들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 앞쪽에는 '남한 군인'이 빠졌다. 뒤편 대리석에는 커다란 연꽃이 그려있다. 안쪽에는 '청룡병사들이 미친 듯이 와서... 피가 이 지역을 물들였다'라고 적혀있다.
위령비 문구를 둘러싼 한국 정부, 참전군과 마을주민들의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태극기는 뽑혔고, '월남참전전우복지회' 명패는 파괴됐다. 주민들은 한국인의 방문을 2013년부터 허용했다.
1968년 음력 1월 24일. 청룡부대 3개 소대가 하미마을로 들어왔다. 한국군과 친했던 주민들은 평소처럼 밀가루와 쌀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모였다. 아이들에게는 사탕이 손에 쥐어졌다. 청룡부대는 2시간 만에 135명의 주민을 살해했다. 살해된 아이의 입에는 사탕이 물려있었다. 그리고 불도저로 시신을 밀었다. 1, 2차 학살이다.
2013년 별세한 대표적인 생존자 팜티호아 할머니의 아들 럽 아저씨는 어머니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동냥을 나선 어머니는 한국군인이 준 돈을 아들들 앞에 늘어놨다. "이것은 네 여동생의 목숨값, 이것은 네 남동생의 목숨값, 이것은 네 아주머니의 목숨값..." 그래도 찾아오는 한국인에게 잘 대접해주라던 유언을 아들은 잊지 않는다.
   
▲ 꽝남성 하미마을 위령비. 2001년 한국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지원으로 세워졌지만, 주민과의 갈등이 깊은 곳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위령비 뒷편. '한국군'을 명시한 학살 설명에 대한 한국정부와 갈등으로 연꽃 대리석으로 가렸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하미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퐁니마을. 2004년 뙤약볕에서 한국 청년들이 학살을 지켜본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 위령비를 세웠다. 2009년 위령비로 향하는 길을 닦았다. 아들, 딸 같은 동쪽에서 온 청년들의 모습에 마을 주민들도 함께 팔을 걷어붙였다. 한국인이 만들었다는 어떠한 표식도 없다. 그렇게 주민과 시민은 손을 잡고 있다.
1968년 음력 1월 14일 청룡부대 1중대원들이 북쪽으로 향하는 1번 국도를 언제나 똑같이 걸었다. 갑작스러운 부비트랩으로 탱크가 뒤집혔고 병사 1명이 상처을 입었다. 한국군과 미군의 동맹인 남베트남군 가족들이 살던 퐁니마을로 청룡부대가 총을 쏘며 들어왔다. 74명이 학살됐다.
50년에 가까운 이야기를 꺼내기 힘든 응우예티탄 씨. 청룡부대원은 땅굴에 숨어있던 자신과 형제, 이모들을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이모를 칼로 찍러 죽이고, 남동생과 언니는 총맞아 죽었다. 엄마의 주검을 2001년 사진으로 만났다. "나는 왜 엄마가 없는 것일까요. 엄마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 꽝남성 퐁니마을 위령비. 2004년 한국 청년들이 위령비를 세웠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빈호아 마을, 하미 마을, 퐁니 마을 민간인 학살의 주범 청룡부대. 한국인의 접근을 꺼리는 빈호아 마을 엄마들은 학살자 청룡부대, 살인귀 한국군을 잊지 말라는 자장가를 부른다. '학살자 청룡부대, 살인귀 한국군' 노래를 듣고 자란 아이의 눈앞 한국인은 악마다.
살인자와 그 살인자를 감싸는 나라는 하미마을 가족을 죽이고 가족의 시신을 흔적도 없애더니 뒤늦게 나타나 돈으로 유혹했다. 돈다발을 흔들며 '한국'을 지우라고 했다. '청룡'을 없애라고 했다. 마을 주민들은 3차 학살이라고 부른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오랜 전설이 있다. 자신들의 조상은 용의 아들과 바다의 딸이 만나 낳은 자손들이다. 용의 자손들이 동쪽에서 온 청룡에게 살해됐다. 그리고 살해의 기억은 피해자들의 머릿속에만 남아있다.
진실에 나설 용기도 없고 진실 앞에 뻣뻣한 목을 세우는 청룡부대의 옛 용사들. 돈다발을 흔들며 진실을 지우려는 청룡부대의 나라 한국. 부끄러움을 모른 채 50년째 침묵과 왜곡을 일삼는 청룡과 그 한국은 비열한 이무기일 뿐이다.
지난 4월 한국을 찾은 탄 아주머니는 "한국에 가면 참전군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을 용서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이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우리가 양민 학살범으로 매도당하고 있다"고 고함지른 참전군인들의 모습은 진실이 밝혀질까 부들부들 떠는 개 꼬락서니와 닮았다.
   
▲ 빈호아 마을에 들어선 '한국군 증오비'. 비에는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적혀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구순정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본부장이 하미마을 학살 희생자 무덤에서 추모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퐁니마을 위령비에 있는 당산나무.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탄 아주머니 이야기
베트남 나비평화기행 참가자들은 8일 마지막 일정으로 학살지역인 퐁니마을에 거주하는 응우옌티탄(탄 아주머니)를 자택에서 만났다. 한참 동안 증언을 망설이던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과거를 떠올렸다.
탄 아주머니는 1968년 음력 1월 14일 8살에 청룡부대원들과 맞닥뜨렸다. 74명이 살해된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엄마와 언니, 남동생을 잃었다. 오빠도 살아남았지만, 그날의 참상에서 벗어나고자 마을을 떠나 다른 곳에 살고 있다.
   
▲ 1968년 음력 1월 14일 청룡부대의 퐁니마을 학살 당시 생존자 응우예틴탄 씨.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다음은 탄 아주머니의 증언이다.
우리 엄마는 다낭에서 장사했어요. 새벽에 집을 나서서 컴컴해야 집에 돌아오셨죠. 전쟁 통에 아이들을 혼자 집에 둘 수 없으니까 일하러 갈 때는 우리를 이모한테 맡겼어요. 그때는 제가 8살이었어요. 정월 대보름 하루 전이라 엄마는 장에 나갔지요. 저와 형제들은 이모랑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마을 어귀에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에요. 이모가 저희를 데리고 땅굴 속에 숨었어요. 우리를 발견한 한국군인이 총을 겨눴어요. 그러면서 밖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구요. 집에 불을 지르려고 하니까 이모가 집만은 안된다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는데... 총검으로 찔렀어요. 계속...
그리고는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막 쐈어요. 저는 정신을 잃었어요. 한참이 지났을까...깨어보니 오빠가 눈에 먼저 들어오더라구요. 6살 남동생은 입에 총을 맞아서 피를 울컥울컥 토해냈어요.
오빠가 "탄아, 엄마 찾으러 가자"고 했어요. 오빠가 기어서라도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어요. 전 어찌할 줄 몰랐는데 엄마를 찾아야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총을 맞아서 창자가 자꾸 밖으로 흘러내리고..그러다가 헬리콥터가 와서 우릴 데리고 갔어요.
   
▲ 베트남 나비기행 참가자들이 탄 아주머니의 증언을 듣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저는 이제 오빠밖에 없어요. 하지만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어요. 2001년에 어느 한국 기자가 사진을 가져와서 알았어요. 우리 엄마가 사진 속에서 죽어있었어요. 우리 엄마가...
오빠는 여기 살지 않아요. 여기가 이제는 싫대요. 전 고아나 마찬가지예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남들은 다 엄마가 있는데 나는 없잖아요. 엄마가 왜 엄마가 없는 것일까요. 엄마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한국 가서 절 참 반겨줘서 좋았지요. 한국에 가면 참전군인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들을 용서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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