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규명되고 인양 잘 되고, 올라오는 아이들 다 추모시설로 모으는 게 우리 내년의 소망이죠.” 단원고 2학년 8반 고 장준혁군의 아버지 장훈씨는 2015년 마지막 날을 세월호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 14명과 함께 팽목항 분향소에서 보냈다. 장씨는 “팽목항은 자주 오기에 아픈 곳, 기억하기 싫은 곳”이라 말하며 말을 삼켰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625일째인 2015년 12월31일 밤 ‘기억과 약속, 그리고 다짐. 416가족 국내외 동시 2015 송구영신 행사’가 지역 곳곳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세월호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 100여 명은 각각 동거차도, 팽목항, 광화문, 안산분향소 등으로 흩어져 새해맞이를 준비했다.
담요, 모자, 목도리 등으로 추위에 무장한 유가족과 시민 60여 명은 행사 내내 사회자 옆에 설치된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날 행사는 국내외 10여 곳의 다원중계로 이루어졌다.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캐나다 등에서 세월호에 연대하는 시민들도 화면에 등장했다.
   
▲ 팽목항 분향소에서 열린 '416 가족 국내외 동시 2015 송구영신 행사' 풍경. 행사 참여자들이 다원중계가 상영되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문화제는 팽목항 분향소 앞마당에서 열렸다. 트럭 두 대와 중형차 한 대의 헤드라이트가 가로등 역할을 했다. 사회를 맡은 김희옥 416연대 간사는 “한해를 정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가족들이 아픈 몸을 이끌고 뚜벅뚜벅 팽목항에 온 6월14일”이라 말하며 문화제를 열었다.
광화문광장에서 한창 송구영신 행사가 열릴 동안 팽목항문향소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문화제가 열렸다. 진도국악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고재성(55)씨의 ‘사철가’ 공연 덕분에 팽목항 분위기는 시작부터 달아올랐다. 고씨는 북장단에 맞춰 곡조를 뽑으며 “사람답게 놀아봅시다”라 외쳤고 시민들은 “좋다” “얼쑤” 등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 진도국악고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고재성씨가 문화제 시작에 맞춰 '사철가' 곡조를 부르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평화기행’을 하고 있다는 두 청년, 김원중씨와 양수환씨도 이날 팽목항을 찾았다. 김씨와 양씨는 대만, 일본의 오키나와, 요나구니, 제주 강정마을 및 4·3사건 현장 등을 지난 2개월 동안 자전거로 일주했다. 인도네시아의 한 이슬람공동체에서 평화교육 활동을 해온 김씨는 “아픔이 많이 있는 곳을 직접 들러 어떤 아픔인지 돌아보고 고민하고자 기행을 시작했다”며 “앞으로 탈핵 관련 현장인 밀양, 청도, 영덕을 들린 후 서울까지 갈 것”이라 말했다.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양씨는 “나의 무지함과 무관심함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여행에 함께 했다”고 말했다.
유가족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의 박미자씨는 “팽목항에 별이 참 많더라. 아이들이 별이 돼서 어머니들 지켜보고 있을 테니 여린 마음 가지지 마시고 끈질기게 이겨내자”고 말했다. 박씨의 가족 5명은 이날 다같이 팽목항을 방문했다.
   
▲ 팽목항 분향소 앞에 모인 시민들이 2016년 1월1일이 되기 몇 초 전 카운트다운 소리에 핸드폰 불을 켜 호응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2016년 1월1일로 넘어가기 1분 전, 팽목항에 모인 시민들은 모두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시계에 맞춰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있었다. 팽목항의 시민들은 저마다 핸드폰 불을 켜서 호응했다. “팽목항 춥지 않냐”라는 광화문광장 행사의 사회자의 말에 “뒤에 분향소가 있어 따뜻하고 또 따뜻하다”고 답했다. 이들은 카운트다운이 지나자 옆 사람과 서로 포옹을 하며 새해인사를 했다.
   
▲ 2015년 12월31일 밤 전남 진도 팽목항 분향소 모습 (사진=손가영 기자)
 
단원과 2학년 7반 고 이준우군의 아버지 이수하씨는 텔레비전을 통해 상영된 해외 각지의 응원 목소리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씨는 “팽목항은 굉장히 기억하기 싫은 곳이면서도 가족에겐 꼭 와야 될 성지 같은 곳이어서 오기가 쉽지 않다”면서 “가족들도 조금씩 지치고 있는 중에 해외 분들의 활동이 더 감사하다”고 말했다.
자정을 20분쯤 넘긴 후에야 행사는 끝이 났다. 유가족들은 분향소 옆 방파제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