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생 93세인 이 늙은이의 곡절 많은 인생 얘기 들어보시렵니까?
돌아보면 분단체제에 맞서 물러섬이 없었던 삶입니다.
내 이름은 양원진 올해 93세입니다. 한해가 다르게 허리는 구부정하고 다리 힘은 빠져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충무로에 있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사무실에 고문자격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나가 젊은 동지들을 만납니다. 또 낙성대 ‘만남의 집’에도 종종 들려 장기수 선생들과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제주 4.3 추모행사에도 다녀왔습니다. 밥도 곧잘 해 먹습니다. 돼지 등뼈에 배추김치 넣고 끓여 따순 밥 거르지 않습니다. 죽는 날까지 내 손으로 끼니를 짓고 내 발로 걸어다닐 작정입니다.
지나간 날은 힘들었어도 다 아름다운 법이지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오랜 징역생활을 했지만 눈을 감으면 아련한 추억이고 향기마저 느껴집니다. 기억이 더 가물가물하기 전에 내 삶에서 남길만한 이야기 몇 토막 적어볼까 합니다.①
장기구금 양심수로 29년 6개월을 살다.
나는 1960년 5월 신혼여행 중에 체포되어 1961년 8월 15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30대에서 50대까지 인생의 황금 시기를 감방에서 보내고, 60대에 들어선 1988년 12월에서야 광주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29년 6개월 동안 징역생활을 한 셈이지요.
징역복이 많아선지,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인 1965년 10년 추가형을 받았습니다. 이미 무기형을 받은 터에 10년이 더 얹어지는 게 문제겠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형이 더해지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제가 한번 더 기소가 된 일은 참으로 원통합니다. 이름하여 ‘밀서사건’입니다.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교도소 내에서 전향공작이 극심해졌습니다. 내가 전향을 거부하자 가족 면회도 막고 아내에게는 “내가 북에 처자를 두고 내려왔다”고 이간질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댁이었던 아내는 2년 동안이나 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요. 편지와 면회가 계속 막히자 나는 답답하고 분했습니다. 때마침 출소자가 있어 그를 통해서 어렵게 편지를 전달했는데 이게 그만 발각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시경분실 취조주임이었다가 중앙정보부 수사국 직원이 된 유00이란 자가 있었습니다.② 그는 대북정보에 목말라 있었는데 내게도 찾아와 “나와 북에 한 번 들어가자, 그리고 감춰둔 사실이 있으면 하나만 얘기해달라”고 여러 차례 회유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딱 잘라 거절하자, 그는 내게 안 좋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유00은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북에서 공작금을 받아오려는 시도였다”고 조작했습니다. 결국 나는 기소가 되었고 이 사건으로 10년의 추가형을 받았습니다.
아내는 이 일을 계기로 자살까지 시도하다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떠나는 아내를 잡을 길이 없었지요. 가슴 아픈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재판과정에서 방어를 위해 보안과장에게 집필신청을 했습니다. 그들은 종이와 볼펜을 줄 테니 ‘전향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내는 중매로 만났는데 내가 신혼여행 중에 잡혔으니 그녀에게 이런 날벼락이 없었지요. 게다가 공작금 사건으로 본인까지 엮으려 하니 아내는 돌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지키고 무죄를 소명하기 위해 종이와 펜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내미는 종이에 읽어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전향으로 처리되었지요. 조작사건으로 10년의 추가형을 받고 아내는 떠난 데다가 사상의 순결성마저 잃었으니 그 아픔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 통일사업을 위해 한 평생 살아온 제게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지요.
재판 이후 나는 대전교도소 특별사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대문 형무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안양형무소를 거쳐 1969년 군산형무소로 갔지요. 지금이야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서 군산 오가기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때는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크리스마스때 면회를 오셨습니다. 서울에서 충남 서천의 장항역까지 기차로 오셔서, 장항여객터미널에서 밤을 지새우고 그다음 날 아침 배로 군산교도소에 오셨습니다. 당시 나는 무급수여서 한 달에 한 번만 면회가 되는지라 어머니는 면회 제한에 걸려 교도소 담장 밖에서 서성거리셨지요.
마침 친한 교도관이 이 사실을 귀뜸해줬습니다. 당시 목공반에 있던 나는 연장통을 집어던지며 “수정 채워서 나를 집어넣어라,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른다”며 악을 썼습니다. 그랬더니 보안과 사무실에서 특별면회를 시켜주더군요.
아버지의 바람기에 평생 마음을 졸이셨고, 무안군 인민위원장을 한 당신 남편이 학살당하는 과정을 지켜봤던 어머니입니다. 밀서사건 이후 며느리는 집을 나갔고 아들은 무기징역을 살고 있으니 어머니의 가슴은 매일매일 타들어갔겠지요. 면회실에 들어서자마자 당신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원진아, 원진아”하고 우셨습니다. 서울에서 싸 오신 인절미와 고구마는 차디찬 돌덩이였지만 어머니는 입김으로 데워가며 제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인절미 한 입 베어 물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울고 고구마 한 입 베어 물고 또 울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서 떠나시는 어머니의 작은 어깨에 서해바다 겨울바람이 얼음 조각이 되어 촘촘하게 박혔습니다.
1970년 전주교도소로 이감을 갔는데 거기서 박희성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중앙정보부 주도로 ‘좌익수 전향 전담 공작반’이 생겨 교도소 분위기가 흉흉했습니다. 나는 저들에 의해 강제 전향된 장기수들과 함께 교무과에 항의했습니다. ‘경찰 방망이’를 치우고 전향공작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요.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우리는 ‘전향취소선언’을 하고 특별사에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의 강제전향 공작을 몇 안 되는 우리 힘으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동료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가 고문이었습니다.
1977년도인가 광주교도소로 이감을 갔습니다. 거기서 강담 선생님을 만나서 1988년까지 12년동안 같이 지냈습니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88올림픽은 나가서 보라고 했지만 밖에서 나를 받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들 신원보증을 꺼려했는데 (죽은) 큰 누나의 남편이 나서주어 나는 1988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강담, 박희성선생 등과 함께 감옥 문을 열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통일사업을 위해 내려왔습니다.
나는 1959년 통일사업을 위해 북에서 세 번째로 내려왔을 때 잡혔습니다. 그것도 작은 누나의 신고로 체포되었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휴전 후인 1953년 가을, 나는 소대장 시절에 연대 추천으로 평양정치군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일차 선발된 남쪽 출신 1,700명 중에서 다시 추려진 300명 안에 들었습니다. 유물론과 세계정치, 소련 공산당사를 배웠던 게 기억납니다. 말이 학교지 전쟁 직후 폐허상태라 건물부터 지어야 했습니다. 책걸상과 기숙사 침대 등 모든 가구와 집기까지 학생들이 만들면서 공부했습니다. 군관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는 군인보다는 사회에서 전후 복구사업에 기여하고 싶어 제대신청을 했습니다.
내 뜻이 받아들여져 교사로 배치를 될 뻔했는데 나는 마다했습니다. 입대 전 신흥대학(지금은 경희대학교)을 다녔습니다만 어거지로 편입했고 공부도 부족한 터라 생산현장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목포조선철강에서 일한 경력 덕에 남포조선소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3,000명 정원으로 경비정, 쾌속정, 어선, 목선을 만드는 큰 공장이었는데 내가 맡았던 일은 노력수급지도원으로 여기식으로 말하면 총무과나 노무과 같은 보직이었습니다. 기숙사에서는 ‘독신자 합숙 자치위원회 위원장’까지 맡게 되어 밤낮으로 일에 묻혀 살았습니다.
3개월이나 되었을까? 하루는 조선소의 당조직 부위원장이 부르더니만 “정치사업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묻더군요. 그 의미도 잘 몰랐지만 “조선소의 행정사무가 너무 많아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행정사무를 빼 주겠다”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그 정치사업은 대남공작사업, 즉 통일사업에 투입되는 것이었습니다. 화선입당을 했던 나로서는 영예스러운 일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시당, 도당, 중앙당 심사를 거쳐 1955년 3월 5일 드디어 노동당 연락부에 소환되었습니다. 나는 전쟁 전에 지하당 활동을 했고 전쟁 기간에는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민청위원장까지 맡는 등 초급정치일꾼으로 일했습니다. 휴전 후에는 정치군관학교에서 이론수업까지 받았으니 이미 다양한 경험을 쌓은 터였습니다. 그래서 남파를 위해 배운 것은 주로 무선통신이었습니다. 나는 통신기술을 익히면서 휴대용송수신기까지 직접 만들었습니다. 흥미도 있었고 손재주도 있어 미제, 일본제, 소련제의 회로를 보면서 고성능 무전기를 설계 제작한 것이지요. 담배값 크기 정도인데 성능이 좋아 나진에서 목포까지 먼 거리의 송수신이 가능했습니다. 3차로 내려올 때 바로 이 장비를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1959년 6월 25일 해주를 떠난 배는 6노트 정도 속도로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면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영광군 안마도 부근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7월 1일에나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일주일이 걸린 셈이지요.
1, 2차 임무가 기성 망과의 연락업무였다면 이번 3차 임무는 새로운 세포를 조직, 육성하는 것이었고 당에서는 내게 재량을 주면서 직접 계획을 짜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 고향 신안군을 떠올렸던 것이지요. 도착하니 고모님은 돌아가셨는데 고종사촌들은 나를 숨겨주고 도와주려 했습니다. 내려올 때 계획은 외삼촌의 아들들, 즉 외사촌 동생 3명을 포섭하려고 했는데, 외삼촌 집안이 살길을 찾아 서울로 가버렸더군요. 처음부터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경상도 쪽으로 가서 길게 내다 보고 사업을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내려올 때, 달러는 많았지만 남쪽 돈은 조금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누나에게 부탁해서 달러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누나와 매형은 함께 좌익운동을 했고 10년 징역생활을 하다가 형집행정지로 출소해 아버지가 일군 임옥소주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북에서 내려올 때 소주회사가 잘되면 사상이 달라졌을 수 있으니 “접촉을 신중히 하라”는 당의 당부를 받았지만 돈을 바꿔주는 정도야 괜찮겠지 생각하고 고종 누이를 통해 연락했습니다. 나는 약속 날짜에 신안군 두류산 언덕에 올라서 작은 누나가 오게 될 외길을 살피며 안전을 점검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누나는 편지를 받자마자 곧바로 전남도경에 신고를 했고 경찰이 들이닥쳐 고모네 집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작은 누나가 원망스러웠지만 이해도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징역을 살았고 내게 조카인 자식들 앞날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1958년에 신국가보안법이 통과되고 1959년부터 발효가 된 살벌한 때였습니다. 누나는 막내 출산을 앞두기도 했었구요.
나는 수사를 받으면서, “자수를 위해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고 하면서 북쪽에서 미미한 직책에 있던 것으로 진술했습니다. 다음 접선에 대해서도 적극 협조하는 척 했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가장의 접선 작전 1, 2, 3’을 설계하고 이를 토대로 전남 도경이 생포 작전을 펼치게끔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뻔했지요. 현장에 가보면 실체가 없었으니까요. 이른바 ‘모든 비상선’ 접촉이 실패하자 나에 대한 그들의 의심이 깊어졌습니다.
그때 나는 “대천 해수욕장 앞바다 6km 지점에 다보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나를 데리러 거기에 공작선이 온다. 그들을 해안가로 유인하겠다”고 진술했습니다. 도경은 속는 셈치고 병력을 동원했는데 당시 사찰계 경감 박00이 무슨 의도인지 바닷가에서 조명탄 발사시험을 했습니다. 그 시험 발사로 모래바람이 일자, 어선 같은 쾌속정 하나가 다보도를 한 바퀴 돌고 북쪽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정황상 나의 진술이 사실이고 ‘조명탄 시험 발사’로 놓치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었고 공소보류 처분으로 석방이 되었습니다.
석방이 되자 나는 뒷산에 감춰뒀던 무전기를 찾아와 라디오부품을 이용해 수신기를 만들었습니다. 그간의 경과를 모르스 부호로 보고하고 활동을 재개했지요. 그때 어머니는 결혼을 서둘렀습니다. 약학과를 졸업한 아홉 살 어린 아가씨와 선을 보게 돼 벼락 결혼을 올렸습니다.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나를 사윗감으로 만족해하던 장모는 “그런 사람은 장가도 못가냐?”며 우리 집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1960년 5월 27일 군산여고 강당에서 장가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경주로 신혼여행을 간 사이에 일이 터졌습니다. 매형이 “양원진이 석방된 이후에 계속 활동을 한다”고 신고를 한 겁니다. ‘임옥소주’는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을 “내가 인민군으로 입대해 소식이 끊기자” 매형이 이어 받아 운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타났고 결혼까지 해 가정이 생기니 “회사를 돌려달라”고 할까 봐 누나와 매형은 속을 끓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행동을 은밀하게 관찰했던 모양입니다. 내가 신혼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경찰은 가택수색을 했고 “달러 뭉치와 무전기”가 나오자 나는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간판이 무역회사 ‘남일사’라고 되어 있는 서울시경 공작반에서 한 달 반 가량 조사를 받았습니다. 내가 가진 무전기 기술이 탐나서인지 여러 회유가 들어왔습니다. 미국 CIA에서는 평양에 한 번만 들어갔다 오면 미국시민권을 주겠다, 공군특무대는 문관으로 채용하겠다, 시경에서는 경찰관으로 특채하겠다고 했지만 교도소에 갈 각오로 모두 거부했습니다, 결국 1960년 7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1년에 걸친 재판 끝에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게 1961년 8월 15일이고 그로부터 길고 긴 30년 징역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유격전보다 재귀열병이 더 힘들었습니다.
1943년 나는 1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작은어머니가 있는 북경으로 갔습니다. 당시 북경은 일본군 점령하에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곳에서 살길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17살 때인 1945년 나는 일본 소화국민학교를 마치는 졸업식장에서 일본군 군속으로 끌려갔습니다. 그해 8월 일본이 패망하자 제대하고 아버지와 함께 목포로 돌아왔지요. 광주사범학교를 나와 학교선생을 했던 아버지는 제자들과 주민들의 추대로 무안군 인민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문태중학교에 들어간 나도 반미투쟁을 했습니다. 1947년 미군정이 인민위원회 해산령을 내리자 아버지는 수배상태가 되었고 나도 같이 쫒기는 몸이 되어 군산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군대를 강화하면서 젊은 남자들은 징병을 당하는 처지였습니다. 나는 입대를 미루기 위해 대학교 입학을 생각했습니다. 당시 대학생은 26살까지 입영을 연기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나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지만 가짜로 서류를 꾸며 1949년 12월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영어과에 편입을 했습니다. 1950년이 되자 학기제가 바뀌어 3월이 되면서 곧바로 2학년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 해 6월 25일을 기해 전면전이 벌어졌고 나는 서울에 진입한 인민군에 지원했습니다. 을지로 6가에 있던 한양공대에 가서 머리를 깍고 군복을 지급받았습니다. 입대자 1,500명 중에서 18명을 따로 선발해 중기관총수를 임명했는데 내가 거기에 뽑혔습니다.
인민군의 기관총은 소련제 막심중기관총으로 무게가 34kg이나 나갔습니다. 그런데 보급이 원활치 않아 내게 미국 LMG 기관총이 지급되었습니다. 250발 탄창에 30kg으로 조금 가벼운 편이어서 신병인 나로서는 좋았습니다. 원래 기관총은 차량에 걸어 이동하는 것이 맞지만 유격전 기간에는 차량을 운행할 수도 없고 강원도 산간 지형에 맞지도 않아서 장거리 행군 시에는 배낭에 짊어지고 짧은 거리는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전쟁 기간 내내 그렇게 행군하느라 고관절과 무릎관절이 안 좋아져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습니다. 보병전에서 기관총이 있고 없고는 사기에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250발이 불과 몇 분 사이에 드드득하고 날아가면 웬만한 장갑차량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실제 충청도 전장에선 이런 전과를 올렸지요. 이렇듯 기관총은 공격할 때 기선을 제압함은 물론 후퇴하면서 방어선을 지키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경비사령부 직속 106연대 24대대 3중대 중기사수가 되어 아산 둔포지역에서 서해안 방어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온양이나 충남북 내륙으로 들어가 몇 번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뒤늦게 통보받은 우리부대는 차령산맥과 태백산맥을 타고 후퇴길에 올랐습니다.
나는 후퇴하다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경계인 가려주리에서 최현장군의 2군단에 배속되었습니다. 최현장군은 당시 두만강까지 올라간 미군의 배후 교란작전을 수행중이었고 그 작전에 따라 나는 1950년 11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인제, 홍천, 횡성 등 강원도 일대에서 유격전에 참여했습니다.
홍천, 횡성전투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는데 한 부대원이 총알을 맞아 아래턱이 부서졌습니다, 피가 얼굴에 가득하고 혀가 너덜대는 상황에서도 무릎을 관통당한 동료를 부축해서 이동하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곳에서 보급 때문에 애를 먹었는데 하복차림으로 가을을 맞아 모두 추위에 고생했습니다. 어렵게 재봉틀 일곱대를 확보했는데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아 쳐다만 보았습니다. 나는 거의 뜯다시피 해서 다시 조립을 하고 석유칠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드럽게 돌아가서 깊숙한 골짜기에 옮겨놓고 엉덩이까지 덮는 솜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스스로 겨울옷을 만들어 추위를 이겨냈으니 큰 기쁨이었지요.
유격전 때는 군비도 시원치 않아 탄알을 많이 가진 병사가 겨우 15알이고 총이 없는 병사도 많았습니다. 나는 소대장이 권총을 갖게 되면서 그의 M2 소총을 받았습니다. 치열한 유격전 속에서 이미 중기관총은 못쓰게 된 터였는데 소총을 받게 되어 용기 백배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행군 중에 휴식을 하고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만 소총을 놔두고 대오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소총이 없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10리 정도를 가버린 상태였습니다. 당시 무기를 잊어버리면 사형을 한다는 군령이 있어서 분실했다는 보고를 차마 못했습니다. 영월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나는 4명의 대원들과 한 조가 되었습니다. 모두 총은 없고 수류탄만 있는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국군의 한 무리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류탄만 가진 우리를 만나자 그들이 갑자기 항복을 하는 바람에 소총 다섯정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잊지 못하는 장면들입니다.
이후에도 유격전 상황은 계속되어 경북 영주 남대리까지 내려갔는데 거기서 본부로부터 3개월 휴식명령을 받았습니다. 후방으로 가기 위해 인제를 거쳐 1951년 4월 평안북도 청천강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부터 쌀 보급이 원활했습니다. 그런데 제공권을 뺐긴 상태에서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몰라 나는 남은 쌀을 많이 지고 움직였습니다. 나는 식량보급도 담당했던 터라 쌀 한 톨을 소중히 여기는게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쌀을 잔뜩 멘지라 땀을 많이 흘려서 청천강을 건너 어떤 우물가에서 몸을 씻는데 갑자기 몸이 떨렸습니다. 땀이 식을 때 오싹하는 정도가 아니라 몸이 오들오들 떠리며 다리에 힘까지 쪽 빠졌습니다. 돌아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대원들이 여기저기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 이게 재귀열이라고 불리는 병이구나! 말로만 듣던 세균폭탄을 맞은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비행기 꼬리에서 하얀 연기인지 가루인지가 며칠 내내 뿌려졌던 게 기억났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952년 당시 75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세계평화회의는 세균전 논란에 대해 국제과학조사단을 구성, 중국과 북한에서 현지조사에 나섰고
"세계만방 인민들의 공통된 비난을 무릅쓰고 이러한 반인륜적인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본 조사단은 논리적인 절차를 하나하나 밟으면서 아래의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과 중국의 인민들은 실제로 세균이라는 무기의 표적이 되었다. 이들 세균무기는 각종의 다양한 방법이, 그 중에는 2차대전 시 일본이 개발하고 사용하였던 방식도 포함하여, 미합중국 군대에 의해 사용되었다.“
고 조사보고서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미국은 이 보고서에 대해 과학적이고 설득력있게 부인하지 않은 채 그저 "터무니 없는 선전"이라고 일축하고 있을 뿐입니다.③
다행히 나는 치료를 잘 받았습니다. 진명여고 출신으로 연대장 간호를 맡고 있던 간호사가 내가 재귀열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연대본부에서 먼 길을 걸어와 주사를 놔주고 돌아갔습니다. 여고 3학년 시절 입대한 그녀는 같은 본부 성원으로 몇 번 눈길이 스쳤고 ”내가 여자께나 울렸겠다“는 얘기를 나의 부하에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밤길을 걸어와 비상용주사를 놔줬던 일은 고마우면서도 알 듯 모를 듯한 일이었습니다.
20여 일 앓고 나는 차츰 나아서 회복기 중대에 있다가 9사단으로 원대복귀하던 중에 황해도 해주에서 6군단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9사단에 긍지를 갖고 있었지만 내가 열병을 앓고 있는 사이에 개성으로 이동을 한 상태였습니다. 전쟁으로 혼란스런 상태여서 ”군관들은 원대복귀를 하고 하사관과 병사는 주변 부대에 편입된다“는 방침에 따라 소속 군단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6군단에 편입되어 나는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면에 있는 100명 정도 규모의 운수중대에 들어갔습니다. 몽골에서 원조한 야생말을 압록강변 의주에서 군마로 조련을 했지요. 훈련이 잘 된 말을 여러 부대에 보냈습니다. 나머지 말 74필을 계속 훈련시켜 1951년 11월에 동부전선으로 이동을 시키던 중 마식령에 이르러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았습니다. 말들은 도망가려고 날뛰다가 논 한가운데로 들어가 자빠졌습니다. 마차에 실었던 소금이 녹아버리고 보급물자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기진맥진해 자포자기 심정이 들었는데 폭격과 기총사격이 계속되었습니다. 내 옆에 있던 병사는 허리에 관통상을 입었고 나는 팔에 기관총을 맞았습니다. 기어서 도망가다가 비탈길에서 굴렀습니다. 거기가 마침 은신할 만한 곳이라 붕대를 감아 지혈을 했지요. 총상을 입으면 파상풍을 조심해야 하는데 부근에 중국인민해방군이 있어서 주사를 맞았습니다. 재귀열병에 이어 두 번째 죽을 고비였던 셈입니다.
부상을 치료하고 나는 전선사령부 직속 예비연대 하사관 교도대대에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은 부족했지만 하사관은 여유가 있어 별도로 교도대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동부전선 내금강 지역으로 배치가 되어 갱도작업을 했습니다. 몇 개월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아이젠하워가 원산에서 청천강을 기준으로 인민군의 허리를 자르겠다고 한다“는 얘기가 돌던 때여서 원산 부근의 동부전선 갱도는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1개 조로 굴을 팠습니다. 거기서 나는 1등을 했습니다. 덕분에 중간 총화할 때 혼자 주석단에 앉았지요.
그때 군대 내 민주청년동맹의 추천으로 나는 화선입당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입당에 대해 반대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들이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대학을 다녔고, 아버지가 작지만 소주회사를 운영한 점이 불리하게 작용을 했습니다. 나의 입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무안군인민위원장 경력보다는 소주회사 사장이라는 경력이 더 크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심사과정에서 정치의식과 사상적 무장을 묻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질문을 많이 준비해왔더군요. 나는 당황해서 제대로 답을 못했습니다. 그래도 부결되지 않았습니다. 민청과 비당원대중으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기에 떨어뜨리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세포에서 대대와 연대를 거쳐 전선사령부 꼬미샤까지 올라갔습니다. 꼬미샤는 검열기관으로 당에 불순분자가 들어오는 것을 감찰하는 기관입니다. 꼬미샤위원장이 1시간 30분 동안이나 개별심사한 끝에 나는 정당원으로 승인받았고 내 성분은 ‘빈농’으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화선입당을 한 후인 1953년 3월 초, 다시 내게 어려움이 다가왔습니다. 심근류마티스, 즉 심장판막증을 앓았습니다. 20여 일을 병원에서 누워 지냈는데 몸이 좋아지는 듯 했지만 퇴원은 안된다고 하더군요. 다시 20일을 더 있었습니다. 여전히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는데도 나는 군장을 꾸려 회복기 중대로 갔습니다. 거기서 중대장을 맡아 50명 정도의 인원을 인솔하고 전선으로 나갔지요. 강원도 길은 대개 하나 밖에 없는데 우리 인원이 소부대여서 야간행군이 원칙이지만 낮에 행군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우리를 앞서가던 마차부대가 행군을 하면서 먼지가 피어올랐고 이를 본 미군의 비행기 공격을 받았습니다. 야간행군을 하라는 원칙을 어겨 희생을 당하면, 안 당할 수 있는 피해를 불러온 것이어서 비상사고로 평가됩니다. 그 경우에는 지휘관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대오를 적절하게 분산시켜 겨우 참사를 면했습니다. 그리곤 정찰부대를 원했지만 보병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여기서 3명으로 조를 꾸려 국군진지 깊숙이 들어가 4명이나 되는 포로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덕분에 2급 무공훈장을 받았지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발효 12시간 전에 갱도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말라는 비밀 무전이 내려왔습니다. 협정 몇 시간 전까지 격렬한 포사격이 벌어진 후 일순간 포성이 멎었습니다. 정적이 흐른 후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했고 갱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고지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리는 최고사령부 명령인 정전협정 준수사항 열 가지를 받아적었습니다. 그리고 민둥산 고지에서 남은 탄약을 사흘 동안 2km 밖으로 옮겼습니다. 그때가 폭 4KM 155마일 비무장지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살아냈음이 기뻤습니다. 둘러보니 고지마다 폭격에 나무들은 다 산산조각나고 바위는 으스러져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놀랍게도 전쟁의 포성이 멎어서인가요. 지하 갱도에서 몸에 바짝 달라붙었던 말라리아 기운이 고지 밖에서 햇빛을 쬐니 씼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전쟁이 끝났고 평화가 온 것이 실감나더군요.
수양딸을 얻어 다시 가족을 꾸리고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1988년 12월 광주교도소 문을 열고 나온 후 나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작은 누나 집에서 5년간을 살았습니다. 사실 검거가 된 게 누나의 신고이니 우리 남매에겐 앙금이 깊었습니다. 하지만 출소 후 오갈 데 없는 나를 누나가 품어줬고 나는 그 집에서 살며 앞으로 살아갈 궁리를 하였습니다. 화해를 한 셈이지요. 그런데 나를 반긴 건 작은 누나 말고도 경찰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출소하니 그쪽 담당 형사가 한 달에 한 번, 나중에는 세 번씩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렇게는 못 내려간다고 버틴 덕에 서울 성북경찰서가 나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사찰을 받다보니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옮겨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출소했을 때 발등의 불은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30년을 갇혀 있었지만 아직 육십의 나이고 몸은 쓸만했습니다. 같이 징역 살았던 사람 소개로 석수역과 시흥역 사이에 있는 ‘동양철선’이라는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철선 중에 가벼운 게 100kg인지라 팔목인대가 버티지를 못했고 결국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외가 쪽 동생이 운영하는 경운수산에 들어갔습니다. 컵라면에 들어가는 어포를 농심, 삼양, 오뚜기에 납품하는 일이었지요. 제법 회사가 돌아갔는데 사장이 풍을 맞는 바람에 사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잠시 짬을 내 피아노조율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조율만이 아니라 수리와 조정도 할 줄알아야 딸 수 있는 자격증이었습니다. 같이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들이 5~6명 있었는데 모두 떨어지고 나만 붙었습니다. 그때 나는 인천 삼능교회 영선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피아노 조율은 돈벌이도 되고 여러 교회에서 자원봉사도 할 수 있기에 땄지요.
자격증 취득 후 강담선생이 다니는 건축회사가 6층 짜리 빌딩들을 많이 지었는데 잠시 관리소장을 맡아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 동방에너지에 입사를 했지요. 그 곳 사장이 나를 좋게 봐서 자격증도 없는 늙은 나에게 같이 일을 하자고 했습니다. 발령을 받은 곳이 881세대가 있었던 안중이었고 특별한 인연이 된 곳입니다. 나중에 ‘도시가스’에 밀려 2007년 회사가 망했지만 그곳 주민들이 나를 좋아해 아파트 경비로 몇 년 더 일을 하게끔 도와줬습니다.
수양딸 강태희도 그곳에서 만났지요. 당시 아파트 노인정에 회장파와 부회장파가 나뉘어져 분위기가 안 좋았습니다. 내가 총무를 맡아 양쪽 화해를 도모했습니다. 그때 강태희가 노인정으로 자원봉사를 왔고 자기 돈으로 20kg 쌀도 두 번이나 사다 놓곤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좋게 보고 있던 차에 강담선생을 비롯 장기수 선생들이 놀러 오면 같이 자리를 하곤 했습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이 보기 좋으니 ”딸이나 삼으라“는 얘기가 나왔고 강태희가 이를 받아들여 수양딸이 되었습니다.
그 후 강태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딸은 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집회나 행사에 참석하러 서울에 오면 꼭 낙성대 만남의 집에 들러, 장기수선생들 빨래도 해주고 김치나 정성 깃든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딸을 지켜보는 내 맘은 흐뭇했습니다. 나중에는 금강산도 같이 다녀오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나는 생계를 해결하면서 한편 통일운동전선을 찾아나섰습니다. 2010년부터 조국통일 범민족연합(경인연합에 이어 남측본부)의 고문이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회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서울)‘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고문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젊은 회원들과 함께 미대사관, 국방부,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지요.
양심수 후원회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 건 아니어도 양심수 후원회가 주관하는 신년하례회나 총회, 역사기행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징역 안에서 면회는 물론 편지까지 금지되고 전향공작을 받을 때 양심수후원회 같은 단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 외 ‘고난 함께’나 ‘코리아 연대’의 동지들과도 뜻을 같이하고 연대의 마음을 나누고 있습니다. 615 산악회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이 동지들 덕에 늙은 몸을 이끌고 천하 명산을 구경하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한 평생, 통일운동에 몸을 담으면서 살아온 곡절 많은 인생 얘기 몇 토막입니다. 묘하게도 저는 사회주의자이면서 기독교인입니다. 모태신앙이었던 탓도 있지만 사회주의는 인간의 평등을 위한 사상이고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가르침이기에 저는 두 신념을 모두 존중했습니다. 제가 입당할 때 종교를 갖게 있다는 게 걸림돌이었습니다만 모두 인간을 위한 길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90이 넘은 몸으로 남은 여생이 얼마나 될지 알수 없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임대아파트라도 있으니 죽는 날까지 내 손으로 밥 끓여먹고 통일운동의 현장에 빠지지 않고 걸음 할 작정입니다. 내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젊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거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 인생을 완성하는 길이기도 하니까요. 모두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못 다한 이야기
① 이 글은 양원진선생님이 필자에게 두 번에 걸쳐서 생애를 들려준 것을 받아 적었다. 빈 부분은 양원진선생님의 구술자서전 <<곡절많은 한 생을 살아오며>>(민가협양심수후원회 편)을 참고했다.
② 양원진선생님의 자서전에는 유00과 박00의 본명이 나온다. 이들에 대해선 필자가 사실 확인의 어려움이 있어서 이글에서는 유00과 박00로 표현했다.
③ 이 인용된 부분의 출처는 오마이뉴스 2001년 6월 14일자 강성관기자의 ”무등산에서 미군 세균전했다“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기사 뒷부분에는 제1해병 비행대대 참모장 슈어 대령의 자백을 인용한 <상하이 데일리 뉴스> 1953년 3월 1일 기사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에서 일반 세균전 계획은 1951년 10월에 통합참모본부(당시 리지웨이 대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달에 통합참모본부에 의해 소규모 실험적으로 시작되었던 세균전을 점차 규모를 확대하여 한반도 전체에서 착수하도록 전언했다. 이들 지역은 최소한 10일 간격으로 재 오염시킬 예정이었다. 작전은 콜레라 폭탄을 사용하였으며 6월 첫 주에 개시되었다. 적의 영토상공에서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서 세균폭탄의 투하 후까지 네이팜탄을 기내에 남겨두었다. 그것은 비행기가 추락할 경우에 거의 확실하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부분은 양원진선생님의 구술에는 없으나 양원진선생님의 진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자가 인용한 부분이다. 그런데 양원진선생님은 세균전으로 인해 재귀열병에 걸린 시기를 1951년 4월경이라고 기억하는데 위 <상하이 데일리뉴스>에 따르면 1951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나와 양원진 선생님의 진술과는 시차가 있다. 여기서는 양원진 선생님의 기억을 토대로 서술했다.
④ 경향신문 1960년 8월 21일자 기사에서 ”서울지검 김세배검사는 양원진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불고지죄로 나익환, 나찬영, 나옥자, 나지환 양원진의 고종형제 네 명을 신국가보안법 9조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신국가보안법 발효이후 9조가 적용된 최초의 사례“라고 보도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