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1-06-06 09:06수정 :2021-06-06 09:11
천안함 생존장병의 트라우마
천안함 사건 뒤 11년 지났지만
생존장병 여전히 패잔병 취급
제대로 된 지원이나 관심 없고
사건만 볼 뿐 생존자 주목 안해
2018년 <한겨레>와 함께 ‘천안함 생존장병 실태조사’를 하며 이 실험이 종종 떠올랐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은 제가 연구를 하며 만났던 한국 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약자 집단 중에서도 비교 대상을 쉽게 찾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연구 결과가 알려진 뒤 많은 사람들이 제게 어떻게 그 참혹한 현실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저 “우리 모두가 무관심했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 다른 대답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많은 이들이 천안함 생존장병을 다른 ‘인종’으로 생각했었던 것 아니었을까요.타인의 상처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그 사람에게 마음을 내주었을 때만 시작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알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진보 진영은 2018년 이전까지 한 번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인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안함 사건의 정치적 의미에만 주목했지 정작 그 배를 탔던 이들의 고통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매년 3월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찾아와 사진을 찍어 갔지만, 그 이후에는 어떤 연락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존장병들은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그 슬픔을 함께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지난 11년을 버텨왔습니다.베트남전에 참여했다가 트라우마를 겪은 군인들을 조사한 연구들은 피해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사회적 지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일관되게 지적합니다. 하지만, 생존장병들은 지지받지 못했습니다. 군대에서 그들은 ‘패잔병’으로 취급받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신음하는 군인들의 고통은 눈에 띄는 상처가 없다는 이유로 꾀병으로 폄하됐습니다. 그런 낙인 속에서 그들은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말을 번번이 목에서 삼켜야 했습니다. 천안함 사건 트라우마로 배를 타지 못했던 생존장병 중 몇몇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동안 배를 타지 않은 탓에 장기복무에 필요한 점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직업군인으로서 꿈을 접은 이들이 많았습니다.
군과 정부는 생존장병들을 보듬는 대신 이 참혹한 사건의 방패막이로 활용했습니다. 생존장병들은 천안함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2주 뒤인 2010년 4월7일, 환자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에 응해야 했습니다. 그 기자회견을 두고 여러 언론이 비난했습니다.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군인이 환자복을 입고 언론에 나왔다거나, 군에서 진실을 감추기 위해 함구령을 내렸다는 말들이 한국 사회를 떠돌았습니다.그러나 현실은 사람들의 짐작과 달랐습니다. 생존장병들은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을 전날 밤에 통보받았습니다. 그들은 급작스레 기자회견에 투입되어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충분한 준비 없이 말해야 했던 시간을 내내 아쉬워했습니다. 기자회견 이후로는 그들이 세상에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환자복을 입은 경위도 알 수 없습니다. 군에서 처음에는 군복을 입으라고 했다가 갑자기 환자복으로 바꿔 입으라는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생존장병들은 그 이유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군은 생존장병들에게 함구령을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양심선언을 해라”라는 말이나, “도대체 이명박한테 얼마를 받았길래 진실을 그렇게 숨기냐”는 댓글을 보면 생존장병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고 합니다.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한 대다수의 장병은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고 더 보여줄 진실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인지 답답해했습니다. 앞장서서 의심을 풀어야 할 군은 여전히 생존장병 뒤에 숨었습니다. 생존장병들이 군에 왜 온갖 억측과 음모론에 대응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럴 가치가 없다’는 답만 돌아왔습니다.어떤 이들은 최원일 함장이 천안함 사건 이후에 정부와 모종의 거래를 했고 그로 인해 ‘고속 승진’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그 사건 이후 올해 전역을 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한 차례도 승진하지 못했습니다. 한 생존장병은 새로운 발령지에서 상사로부터 “함장이 죽었어야 니들이 보상금을 받는데, 걔가 살아 있어서 니들이 못 받는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최 함장은 천안함 사건 이후 군 감찰단의 고소로 입건되어 조사를 받는 모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세월호에서 생존한 학생이 자살 시도를 해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그 가족들이 병원 의료진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이 자살 시도가 세월호 참사와 연관성이 있다는 게 증빙되지 않으면 개인 의료보험으로 입원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만약 치료비를 심사하는 위원회에서 이 자살 시도가 참사로 인한 게 아니라고 하면 병원은 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피해자는 내 고통이 재난으로 인한 것이라는 인과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전역자 21명 전액 사비로 치료
세월호 생존 피해자 모습과 겹쳐
국가가 우선 심리치료 지원해야
천안함 생존장병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천안함 사건으로 인한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일은 생존장병의 몫입니다. 제대 이후 치료비가 없어서 정신과 진료를 받지 못했는데, 그 시기 진료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 네 상태는 천안함 사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때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세월호 생존학생과 천안함 생존장병 모두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과 같이 재난과의 연관성이 충분히 알려진 질병에 대해서는 일단 국가의 지원으로 치료를 해주고, 그 인과성이 의심되는 경우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증빙서류를 국가가 제출하는 경우에 한정해 심사를 거쳐 개인이 사후적으로 돈을 내게 하는 게 맞습니다. 2018년 연구에 참여한 생존장병 중 연소득 2천만원이 안 되는 비율이 40%에 이르렀던 점을 생각하면 이는 절실하게 필요한 변화입니다.천안함과 세월호의 생존자들이 자신의 트라우마와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며 보상금을 떠올리고 상처를 헤집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생존학생의 부모에게 어떤 이웃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수억원의 보상금을 언급하며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돈은 없었다고 말하자, “다 아는데 뭘 감추냐”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국가가 결정한 생존학생의 특례입학 제도를 두고 ‘친구 팔아 대학 간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했고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간혹 “살아서 좋냐” “군법회의에 회부해서 총살해야 한다” 같은 댓글을 만날 때면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진영 논리 속에서 강화되었습니다. 진보, 보수라는 이름으로 나뉘어서 생존자의 상처에 생채기를 더하면서 자신이 정의롭다는 착각을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정의의 이름을 독점한 사람들이 가장 잔인한 폭력을 행사합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사건의 생존자를 두고 양 진영의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얼마나 더 가혹해질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하듯 상대방을 모욕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사건의 피해자를 함께 애도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천안함 생존장병과 세월호 생존학생은 누구보다도 비슷한 상처를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 중 가장 젊은 군인의 당시 나이는 20살로 세월호 생존학생이 참사를 겪었던 17살과 불과 3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생존자 트라우마와 싸우는 동안
주위에선 “살아왔다”며 모욕도
우리 사회가 그들 지킬 외벽 돼야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98138.html?_fr=mt1#csidx37ea0ccf73d72329811ea202f8c37e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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