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죄 안되니까 밀항법 들고 나와... 재판부, 검찰 주장 기각
20.11.28 20:25
최종 업데이트 20.11.28 20:25▲ 항소심 공판 일정을 안내하는 안내문 | |
ⓒ 변상철 |
"아버지가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 전과자로 몰려 한평생을 억울하게 살다 돌아가셨는데 이제는 밀항단속법 위반을 붙들고 늘어지다니요. 정말 검찰의 항소가 이해되지 않네요."
고 송우웅씨는 지난 2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부터 재심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심을 신청했던 송씨의 아들 송태원씨는 아버지의 무죄 선고에도 기뻐하지 못했다. 검찰의 항소 여부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네요. 그냥 다행이다 싶어요. (검찰 항소 여부) 일주일 정도 더 기다려보고 마음 놓고 기뻐하려고요"라며 무죄의 기쁨을 감추었던 송태원씨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관련기사: 무죄를 선고받고도 기뻐하지 못하는 피해자 http://omn.kr/1mlk0).
우려가 현실로 무죄가 선고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검찰은 송우웅씨의 무죄 선고에 대해 항소했다. 그런데 항소 이유가 기가 막혔다. 간첩과 관련된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은 모두 빠진 채 밀항단속법 위반을 문제 삼아 항소한 것이다.
검찰은 특히 지난 7월 9일 서울고법 404호에서 열린 재판에서 송우웅씨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한 민원서류 중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기재한 내용을 문제 삼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밀항과 관련해 제출한 서류는 2가지인데 하나는 송우웅씨가 자필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진술서였고 다른 하나는 컴퓨터로 작성한 문서였다. 이 두 가지 문서 중 자필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진술서에 송씨가 밀항을 감행했다는 진술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이 서류를 근거로 송씨가 밀항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1심 재판부는 송씨의 범죄 사실, 즉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밀항단속법 등 위반 사항 모두는 수사기관에서의 임의성 없는 상태에서 자백한 내용이므로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히 1심 재판부는 수사기관에서 50여 일 넘는 불법감금 기간에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로 인해 송씨의 자백 이외에 다른 증거가 없는 위 범죄 사실은 증명력이 없는 때에 해당한다고 봤다.
▲ 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 검찰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 |
ⓒ 연합뉴스 |
그러나 검찰은 송씨가 스스로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한 서류는 임의성이 있으므로 그 서류에서 스스로 밀항했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밀항을 했다는 증거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서류를 작성했다는 송씨는 사망했고, 자필로 작성했다는 이 서류가 송씨의 필체가 맞는지 확인할 길이 없고, 또 그 내용 역시 송씨가 직접 인정하고 확인한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결국 검찰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송씨의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원본 기록을 받아 법정에서 영상으로 재현해 서류를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재판부는 이 서류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것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하기로 했다.
미안하다며 다른 죄 들고나온 검찰
결심 공판이 열린 지난 10월 28일 변호인은 1심에서와 같이 불법 감금, 가혹 행위 등으로 인해 증거가 불충분해 범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유지해 달라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 항소했던 검찰의 태도가 좀 이례적이었다. 검찰도 항소의 이유에 대해 신청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담당 검사는 의견 개진에 앞서 '오랜 기간 수사기관의 불법 감금이나 가혹 행위로 인해 사건이 왜곡되었고, 그로 인해 오랜 시간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게 고통을 안긴 것에 대해 검찰의 한 구성원으로 깊은 유감을 표하며, 긴 시간 억울한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던 가족에게 경의를 표한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검찰도 간첩죄로 가정이 파괴되고, 그로 인해 가족이 고통 받았으며, 그 고통의 굴레를 떨치기 위해 많은 시간 노력해야 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억지스러운 항소를 하며 피해자 가족에게 다시 한번 상처와 실망을 안겼다. 그래서 송씨의 가족에게 이러한 사과는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지난 9개월간의 법정 공방 끝에 11월 27일 서울고등법원 404호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검찰의 항소를 기각한다며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 선고의 이유에 대해 검찰이 주장하는 밀항과 관련해 피해자 송우웅씨가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한 내용은 서명이 없거나 일본에 갔다는 내용으로, 밀항의 요건(국가로부터 발급받은 여권, 선원수첩)에 대한 기재가 없어 밀항인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과거 재판에서 송우웅씨가 제출한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에 기재된 밀항 내용 역시 일본에 갔다는 주장만 있을 뿐 밀항이라는 구체적 실행 경위가 없어 밀항을 했다는 증명을 하기에 부족하다고 봤다. 함께 기소됐던 정인위씨의 밀항 관련 증언은 중앙정보부와 검찰에서의 가혹행위 등으로 인해 임의성이 의심되어 증거로 채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 2020년 11월 27일 서울지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망 송우웅 씨 가족과 변호인, 그리고 평화박물관 활동가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
ⓒ 변상철 |
판사의 긴 주문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고 법정을 빠져나온 송태원씨는 오랫동안 복도에서 눈물을 흘렸다. 1심 선고 때는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긴 항소심에 마음이 지치고, 또 검찰의 어이없는 항소에 긴장했던 탓이리라. 어려운 상황을 헤치고 무죄를 받았으니 기쁜 마음 역시 함께 몰려왔을 것이다.
변호인과 송태원씨 가족 그리고 평화박물관 간사들은 모두 모여 법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둥그렇게 모여 서로 고생했다며 모두 함께 손뼉을 쳤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차 한잔하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검찰의 상고로 다시 법정에 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눴다.
검찰 스스로 사법정의를 내세우는 지금, 송우웅씨의 항소심 재판을 반면교사 삼아 스스로 사법정의가 무엇인지 성찰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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