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범죄 형사제재 ‘4심제’ 만들어…7년간 공정위 제재 중 고발은 1.7% 불과
누군가 죄를 저지른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검찰이 기소를 안 하는, 아니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업이 하청사·대리점에 ‘갑질’을 하거나, 입찰 사업에서 ‘짬짜미’를 하는 등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해서는 검찰이 마음대로 기소 여부를 정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공정거래위원회가 검찰에 고발을 해야 검찰이 기소를 할 수 있습니다. 공정위만이 고발권을 가진다고 해서 ‘전속고발권’이라고 합니다. 공정위가 기업의 위법 행위를 나몰라라하면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공정경제 3법 가운데 하나인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안에는 전속고발권을 폐지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전속고발권이 뭔지, 왜 폐지해야 하는지,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피해자 호소해도 소용없어…검찰 기소 여부 좌우하는 공정위 전속고발권
전속고발권은 공정위가 ‘날 때부터’ 지닌 권한입니다. 공정위는 1981년 출범했는데요, 같은해 만들어진 공정거래법에 전속고발권이 담겼습니다. 공정거래법 위반 행위에 대해 검찰이 기소를 하려면 공정위 고발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불공정거래 행위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해도 소용없습니다. 공정위 고발이 있어야 검찰이 나설 수 있습니다. 피해자는 공정위에 고발을 요청해야 하죠.
전속고발권은 기업 경영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됐습니다.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고발을 남발하면 검찰 기소 건수가 늘어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 있으니, 사법 절차에 공정위 고발이라는 관문을 추가한 것입니다. 공정위가 불공정거래 행위의 중대성을 판단해 시정명령과 과징금 등 행정제재로 마무리할 사안인지, 아니면 형사제재가 필요한 사안인지 판단하도록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전속고발권에는 공정위가 검찰보다 경제 범죄에 대한 전문성이 높다는 인식도 깔려있습니다. 공정한 시장 형성이라는 공정거래법 목적에 부합하도록 적절한 제재 수위를 결정하는 데 있어 공정위가 일차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공정위 고발권 불행사, 면죄부 논란에 헌법소원까지
전속고발권은 기업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사법절차를 진행하는 데 있어 문턱으로 작용하면서, 제대로 된 처벌을 가로막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지방법원-고등법원-대법원’을 거치는 3심제가 ‘공정위-지방법원-고등법원-대법원’으로 구성된 4심제가 되는 거죠. 공정위의 소극적인 고발권 행사가 기업의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가 됐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공정위의 안일한 판단으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 기업이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은 사례가 실제 있습니다.
서울 시내 일부 백화점이 신선 식품의 품질 척도가 되는 가공일을 속여 판 사건입니다. 이들 백화점은 전날 팔다 남은 정육·해산물·야채 등 포장식료품을 다음날 다시 팔면서, 판매 당일 새로 들여온 신선한 상품인 것처럼 가공일을 조작했습니다. 전날로 찍힌 바코드라벨을 뜯어내고, 판매 당일로 찍힌 바코드라벨을 붙인 거죠. 소비자는 백화점에 속아 전날 포장된 상품을 사야 했습니다.
검찰은 이른바 ‘식품가공일자 허위표시 사건’이 형법상 사기죄와 공정거래법상 불공정거래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사기죄는 백화점 식료품 담당자, 불공정거래는 백화점 법인에 적용됩니다.
검찰은 백화점 식료품 담당자 6명을 사기죄로 입건해 수사하고 기소했습니다. 법원도 이들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백화점 법인의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해서는 검찰이 마음대로 기소할 수 없었죠. 공정위가 전속고발권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검찰은 공정위에 형사처벌을 위한 고발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공정위는 검찰의 고발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당시 공정위는 “과거 허위표시 사안에 대해 고발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시정명령과 과징금만 부과했습니다. 백화점은 소비자 기만 행위에 대한 형사처벌을 면하게 된 겁니다.
해당 사건은 1990년대에 발생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매장은 센토백화점(중계동점), 미도파백화점(상계동-청량리점), 현대백화점(압구정점), 건영백화점(중계동점) 등입니다. 전속고발권 부작용을 둘러싼 논란이 수십년 전부터 지속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해당 사건은 전속고발권에 대한 헌법소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참여연대 공익소송센터는 공정거래법에서 전속고발권을 규정한 조항이 헌법상 재판청구권·행복추구권·평등권 등을 침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전속고발권 자체가 기본권을 제한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공정위가 고발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위헌 여부를 명확하게 판결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다른 사건으로도 전속고발권 관련 헌법소원이 제기됐습니다.
에이스침대의 한 대리점 운영자는 판매부진 등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당하자 공정위에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공정위는 에이스침대 측의 위법 행위를 인정해 시정명령을 내리면서도, 고발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리점 운영자는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참여연대가 전속고발권 자체의 위헌 여부를 물은 것과 달리, 대리점 운영자는 공정위가 고발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결과는 기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선 백화점 사건에서는 유보됐던 고발권 불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이 제시됐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위법성이 중대한 사안에 대해 공정위가 고발하지 않으면 피해자 기본권이 침해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에이스침대 사건은 사안이 중대하지 않아 대리점 운영자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공정위 소극적 대응에 의무고발요청권 도입했지만, 실효성 미미
여전히 공정위는 고발권을 충실하게 행사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공정위는 출범 이후 지난해까지 총 6만1,167건의 위법 행위를 제재했는데, 이 가운데 고발 조치는 1,044건으로 1.7% 수준에 불과합니다. 공정위에 붙는 ‘경제 검찰’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해지는 수치입니다.
고발 건수가 적은 건 비단 공정위가 의지가 없어서만은 아닙니다. 공정위는 의지뿐 아니라 여력도 없는 겁니다. 고발 여부를 판단하려면 사건을 조사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인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참여연대는 2013년 전속고발권 폐지를 촉구하면서 “공정위 가맹유통과와 유통거래과는 7∼9명의 공무원이 각각 17만개 프랜차이즈 가맹점과 2만개 대형마트 납품업체의 불공정거래 피해 문제를 다루고 있다”며 “수십만개에 달하는 하도급업체를 대기업으로부터 보호하는 업무도 인력 수준은 비슷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상황에서 현장행정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전화행정·책상행정만 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공정위 인력 부족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2013년 523명이던 공정위 정원은 2018년 648명으로 약 100명가량 늘었습니다. 반면, 전국 사업체 수는 같은 기간 368만개에서 410만개로 40만개 이상 불었습니다.
전속고발권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정부는 보완책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검찰에만 부여하던 고발요청권을 2014년 감사원·중소벤처기업부·조달청으로 확대했습니다.
또한, 공정위가 고발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의무적으로 따르도록 했습니다. 공정위의 소극적인 고발권 행사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였죠.
의무고발요청권 제도 도입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도가 만들어지고 올해까지 7년간 고발 요청은 50건이 채 안 됩니다. 이 기간 공정위에 고발을 요청한 사건이 중기부는 36건, 조달청은 11건입니다. 감사원은 2016년까지 단 한 번도 고발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둑 제 발 저리는 재계 ‘무차별 고발·기소’ 주장에 공정위 “그럴 일 없어” 일축
전속고발권 폐지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진 가운데, 정부는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안에 해당 내용을 반영했습니다. 일부 분야에 한해 전속고발권을 폐지하기로 한 겁니다.
정부가 전속고발권을 폐지하기로 한 분야는 경성담합입니다. 대표적으로 가격 담합과 입찰 담합이 있습니다.
가격 담합은 같은 업종 기업들이 경쟁을 하지 않고, 모두가 가격을 높게 책정하는 걸 이릅니다. 입찰 담합은 입찰에 참여한 기업들이 미리 입을 맞춰 가격을 높게 써내고, 사업을 따낸 기업이 떨어진 기업에 돈을 나눠 주는 행위입니다.
연성담합은 전속고발권 폐지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대기업 회삿돈을 총수일가에게 이전하기 위한 ‘일감몰아주기’와 ‘통행세’ 등이 연성담합으로 분류됩니다. 이들 불공정거래 행위는 총수일가 회사와 경쟁하는 중소기업에게 피해를 끼치는데요, 피해 기업이 직접 고발하지 못하고 공정위가 고발권을 행사하기를 기다려야 하죠.
경제개혁연대는 “공정한 시장경쟁 질서를 확립하고 중소기업 권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중대한 불법 행위에 대해 직접 이해당사자에게 고발권을 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현재 전속고발권은 공정거래법뿐 아니라 하도급법·대규모유통업법·가맹사업법·대리점업법·표시광고법 등 공정위가 소관하는 총 6개 법안에 적용됩니다. 전속고발권 제도 도입 당시에는 공정거래법에 한데 모여있던 내용이 점차 파생 법안으로 분리된 것입니다.
이번에 공정거래법이 개정돼도 나머지 5개 법에서는 전속고발제가 유지됩니다. 4심제니 면죄부니 하는 문제가 지속되는 거죠.
공정위는 이런 문제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일명 ‘유통 3법’으로 불리는 대규모유통업·가맹사업법·대리점업법에 대해 전속고발제를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발표한 적이 있거든요.
공정위는 2017년 외부 전문가·관계 부처와 민관 합동 특별팀(TF)을 꾸려 법 집행 체계 개선을 논의했습니다. 당시 TF는 전속고발제 폐지도 논의했는데, 찬반이 팽팽하게 갈렸다고 해요. 그런데 유통 3법에 대해서만큼은 전속고발제 폐지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합니다.
당시 공정위는 “갑을관계에서 비롯되는 불공정거래 행위 근절이 시급하고, 위법성 판단 시 고도의 경쟁 제한 효과 분석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법 개정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재계는 전속고발권이 폐지되면 고발·기소가 남발해 기업 경영이 위축될 것이라고 반발합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최근 국회에 공정경제 3법 관련 재계 의견 반영을 요구하면서 “전속고발권이 폐지될 경우 누구나 공정위를 거치지 않고 기업을 직접 고발할 수 있게 돼 경쟁 사업자에 의한 무분별한 고발 등 큰 혼란이 예상된다”고 했습니다.
특히 중소기업은 법적 대응 여력이 없어 타격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위반내용이 없더라도 인력과 대응 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검찰 수사 자체만으로도 큰 애로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중기중앙회는 전속고발권 유지를 요구하는 한편, 만약 폐지를 해야 한다면 대기업에 우선 적용하고 중소기업에는 유예 기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무분별한 고발과 검찰 수사에 대한 재계 우려는 엄살로 비칩니다. 검찰은 고발이 들어왔다고 무조건 수사에 나서지 않습니다. 위법 행위 근거가 어느 정도 갖춰져야 비소로 수사에 돌입합니다.
공정위는 지난달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안 정책소통세미나에서 “악의적인 고소·고발이 실제 수사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며 “검찰은 고발된 법 위반 행위가 객관적 자료와 관계자 진술을 통해 뒷받침되고 의심할만한 정황이 인정될 때에 한정해 수사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비밀리에 진행되는 담합 특성상 참가기업 외에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어려워, 기업을 괴롭히거나 음해할 목적으로 고발하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공정위의 이러한 설명은 경성담합이라는 일부 분야에 대한 전속고발권 폐지로 기업 부담이 가중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며, 나아가 기업이 법을 잘 지킨다면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받을 일도 없을 것이라는 얘기로도 풀이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