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겸 기자 kbg@vop.co.kr
진보적 법학자로 시민사회활동을 활발히 해온 곽노현 전 서울교육감이 지난 19일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자신을 대상으로 한 사찰 정보문건 30건을 받았다.
곽 전 교육감은 '민중의소리'와 직접 만나 사찰 피해 당사자이자 오랜 기간 정보기관의 민주적 통제에 관해 연구했던 법학자로서 이번 사찰정보 공개에 대한 평가부터 최근 사찰 논란이 불거진 검찰의 문제점까지 긴 이야기를 나눴다.
"감개무량하고 짜릿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의 '심리전' 대상이었던 곽노현 전 서울교육감은 자신을 불법사찰했던 국정원 문건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데 대해 이같이 심경을 밝혔다.
26일 삼청동에 위치한 개인 연구실에서 '민중의소리'와 만난 곽 전 교육감은 "사찰당한 사람이 그 사찰 문건을 보게 되리라고 상상하기나 했겠느냐"면서 "민주화가 이만큼 발전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사찰자료를 본 소감에 대해서는 "내용은 아연실색할 정도로 기가 막혔다"면서 "무책임한 '카더라' 내용으로 첩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을 기록한 것을 보니 서글펐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어 "한편으로는 이런 문건이 수십년이 지나서 본인 외에 공개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면서 "이미 사찰 피해자가 사망했을 수도 있는데 해명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야사를 구성하는 등 악용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곽 전 교육감과 함께 사찰정보 공개 청구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내 파일 내놔라' 시민행동은 고 문익환 목사, 장준하 선생, 이소선 여사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사찰 대상자에 대한 자료공개 청구도 유족의 동의를 얻어 추진하고 있다.
"국정원에 대한 사법적 통제가 비로소 시작됐다"
지난 2017년 9월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진보 인사에 대한 '심리전'을 펼친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 심리전의 대상에는 현재 국정원장인 박지원 전 의원을 비롯해 초기 진보 교육감으로 당선됐던 곽 전 교육감도 포함돼 있었다. 국정원의 불법사찰과 정치공작이 심증에서 확증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지난 보수정권에서 탄압받은 각계 인사와 시민사회단체들이 국정원을 상대로 사찰 자료를 당사자에게 공개하고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내 파일 내놔라' 캠페인이 시작됐다.
국정원의 자료 공개 거부에 곽 전 교육감,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 등이 대표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16일 국정원에 정보공개를 명령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내파일 내놔라' 시민행동 캠페인이 시작된 지 3년만, 곽 전 교육감이 불법사찰 피해를 받은 지 9년여만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를 법원이 심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정보공개법'(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은 정보공개의 범위를 규정한 4조에서 '보안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에서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정보의 분석을 목적으로 수집하거나 작성한 정보'에 대해서는 예외로 두고 있다. 국정원이 정보공개를 거부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에 대해 법원은 '국가안전보장 목적'에 의한 정보수집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사법부의 소관이라고 판단했다. 그동안 '안보'라는 이유만 대면 사법마저도 '프리패스'였던 국정원의 정보수집 활동이 사법부의 판단 앞에 놓인 것이다.
또다른 쟁점은 당시 공직에 있던 곽 전 교육감에 대한 사찰이 공직자 신원조회권을 가진 국정원의 적법한 정보수집 활동이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법원은 1, 2, 3심 모두 적법한 정보수집 활동이 아니라고 곽 전 교육감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판결에 대해 곽 전 교육감은 "시민들이 '내 파일 내놔라' 운동으로 정보기관의 정보수집 업무를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법원에 제공했고, 법원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사법부가 이제부터 국정원 정보기관의 정보업무 수행의 적법성을 심사해서 통제해야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국정원은 지난 25일 사찰정보 공개 청구에 대응하는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적극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정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전향적인 태도다.
이에 대해 곽 전 교육감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데 대해 국정원도 더이상 달리 행동할 수 없을 것"이라며 "국정원의 대응은 미흡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신속하고 전향적인 건 맞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전향적 태도에는 국정원 개혁의 성과라고 봤다. 그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서훈 전 국정원장이 임명되고, 일성으로 정치사찰부서, 국민감시부서를 해체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해당 인력을 재배치하고, 정보요원의 기관 출입을 금지했다"면서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정원과 차이나는 검찰의 개혁의지...'재판부 사찰'로 드러나"
곽 전 교육감 등 사찰 피해 당사자가 사찰 자료를 직접 받아보게 되고, 국정원도 적극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내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시 사찰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과 함께 개혁의 대상이 됐던 검찰이 판사들을 사찰했다는 것이 최근 밝혀진 것이다.
이에 대해 곽 전 교육감은 국정원과 검찰의 개혁의 차이를 차이를 비교하면서 "국정원이 검찰과 달리 개혁 수준은 좀 더 나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앞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지난 24일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집행 정지와 징계 청구를 발표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감찰 결과 '재판부 사찰'이 있었다고 밝혔다.
법무부 감찰 결과 지난 2월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현 수사정보담당관실)이 조국 전 장관 가족 의혹 사건 등 주요 사건 재판부 판사들을 상대로 '우리법연구회' 가입 여부, '물의 야기 법관' 여부 등이 기록된 문건을 작성해 윤 총장에게 보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곽 전 교육감은 '재판부 사찰'에 대해 "'우리법연구회'라는 특정단체에 소속했는지 여부를 조사했다는 부분이 가장 문제"라며 "'우리법연구회'라는 판사 단체를 적대시하고 위험하게 생각하는 심리적 바탕이 있는 거다. 일종의 낙인 찍기"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을 윤석열 검찰총장은 알고 있었을텐데 그것을 보고받은 순간에 즉시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찢어버렸어야 했다"면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했던 판사 사찰을 여전히 하고 있냐고 호통을 쳤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 말 없이 3년 반이나 지냈다는 건 너무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곽 전 교육감은 '재판부 사찰'이 행해진 데에는 윤 총장을 비롯한 기존 검찰 조직이 가진 잘못된 사법 철학이 배경에 깔린 것이라고 봤다.
그는 "사법부의 판단을 그 판사의 정치 성향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정치성향이 법리를 압도한다는 철학을 가진 것"이라며 "스스로 사법의 정치화를 용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치와 권력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권력과 정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법을 보고 있다"며 "모든 판결을 정치적 이념으로 채색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곽 전 교육감은 '재판부 사찰'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실이 수집한 데 대해서도 "대검이 공판부 검사로부터 자기들이 겪은 판사들의 정보를 일괄 수집한 거 아닌가"라며 "판사의 성향이나 취미가 어떻게 '수사정보'가 되느냐. 판사성향정보실이나 재판예단정보실이 됐다"고 꼬집었다.
그는 "만약에 판사들의 정보를 악용하게 되면 법관의 독립에 심대한 침해가 되는 것"이라며 "'이 판사 뒷조사 좀 해봐' 이렇게 된다면 아주 명백한 검찰에 의한 법관독립 침해가 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거꾸로 법원행정처가 검사 정보 수집했다면 검사들이 가만 있었겠나"
'재판부 사찰'을 두고 검찰 내부에서는 '공개된 정보를 수집한 내용으로 관행적 업무'라는 이유로 사찰이 아니라는 반발이 나오기도 한다. 윤 총장 스스로도 "사찰이 맞는지 국민들 판단을 받아보겠다"며 문건 전문을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이에 대해 곽 전 교육감은 "인권감수성이 둔감하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공개된 정보라고 해도 민감정보인 '우리법연구회' 소속 여부를 정보 수집 항목에 하나로 설정한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면서 "이렇게 이야기해도 모자랄 판에 공소유지를 위한 통상적인 일이었다고 하면 얼마나 인권감수성이 없다는 건가"라고 말했다.
곽 전 교육감은 또 '판사를 위협할 목적도 없고, 위협할 위치도 아니다'라는 반발에 대해서도 "거꾸로 법원행정처가 재판에서 겪은 검사들의 동향을 보고하게 하고, 정보를 수집했다고 한다면 검사들은 가만히 있었겠느냐"고 반박했다. 정보를 수집해서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대상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곽 전 교육감은 검찰이 스스로 개혁 의지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지원 국정원장 스스로도 '심리전' 피해자로서 국정원 개혁법을 수용하겠다고 밝힌 반면 윤 총장은 그런 적극적인 입장이 없었다"면서 "사실상 마지못해 쫓아간 것이 '재판부 사찰'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스스로 목을 칠 각오가 있어야 한다"면서 "정의는 실체적 결과 뿐아니라 실현되는 외양까지 갖춰야 공신력이 쌓이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공정성의 외양을 해치는 윤 총장의 행태가 결국 직무정지의 사유가 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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