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나라를, '내 것처럼' 여기지 않고 '내 것'으로 여긴 샐러리맨의 최후
20.11.01 17:45
최종 업데이트 20.11.01 17:50▲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2월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등의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
ⓒ 이희훈 |
10월 29일, 대법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상대로 '다스는 당신 것이며, 당신은 대통령이 된 뒤에 기업인 뇌물과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수수하는 등의 범법을 저질렀다'고 선고했다(관련 기사: 대법원, MB 징역 17년 확정... 횡령과 뇌물수수 등 인정돼).
사기업 직원과 마찬가지로 공직자도 '남의 일'을 해주고 봉급을 받는 샐러리맨이다. 국회의원도 그렇고 서울시장도 그렇고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민주국가의 공직자는 국민의 일을 해주고 봉급을 받는다. 나랏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랏일이 '내 일'은 아니다. 공직자는 나랏일을 하고 봉급을 받는 샐러리맨이다.
고용주들은 맡은 바 직무를 '내 일처럼' 생각하지 않는 직원(A)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직원(B)을 좋아한다. 하지만 고용주들이 A보다 더 경계할 수도 있는 유형이 있다. 회사 일을 '내 일처럼'이 아니라 진짜 '내 일'로 생각하는 직원(C)이다. C 유형은 횡령이나 배임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회사를 자기 뜻대로 끌고 가려 할 수도 있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불만을 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고용주 입장에서는 C보다 A가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옛날 왕들도 그랬다. 고려 공민왕이 신돈을 전격 기용해 국정을 맡겼다가 갑자기 죽인 것과, 조선 중종이 조광조를 전폭적으로 밀어주다가 갑자기 죽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신돈과 조광조가 B 단계를 지나 C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되자 고용주들은 위험성을 느끼고 칼을 뽑아들었다.
남들은 모르고 본인만 알던 '샐러리맨 신화'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 유권자 상당수는 회사원 출신인 이명박 후보에게 기대를 걸었다. '저런 사람이라면' 하는 느낌이 상당수 유권자를 지배했다. 대중이 그런 기대를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 될 만했다.
그런데 대중이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와 이명박만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는 같은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대중은 겉으로 드러난 이명박의 인생 궤적이 그의 커다란 성취로 이어진 면에 주목했지만, 이명박이 생각하는 자신의 성공 비결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명박이 '대한민국 고용사장'일 때 저지른 범죄에 대한 이번 대법원 판결은 평생을 샐러리맨으로 살아온 이명박의 인생철학에 중대 결함이 있음을 암시한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에 24세 청년 이명박은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7월 1일 처음 출근한 그는 12월에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현장사무소에 파견됐다.
태국 현장에서 그는 노동자로 위장 취업한 한국인 폭력배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회사 금고를 꼭 끌어안은 채로 구타를 견뎠다. 2015년 발행된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그는 "경찰과 함께 들어온 직원들이 금고를 껴안고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 뒤 "이 일은 현대건설에 내 이름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자문한다"면서 그는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 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항상 꼿꼿하셨던 어머니"라고 회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정직성을 강조했다. 정주영 사장이 입사 2년도 안 된 자기를 현장 책임자로 임명한 것과 관련해 "무엇보다도 나의 정직함을 높이 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정직은 내 삶의 큰 자산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말에 따르면, 정직성이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의 주요 동력 중 하나가 된다.
그때 그 진술들
▲ 제17대 이명박 대통령 취임 선서 | |
ⓒ 자료사진 |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현대그룹 샐러리맨 이명박의 전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진술이 있다. 이명박과 함께 일했을 뿐 아니라 이명박이 가까이 한 에리카 김의 남동생인 김경준이 BBK 소송과 관련해 2007년 9월 6일 LA 카운티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안치용 전 YTN 기자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는 이 서류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김경준은 이 서류에서 MB가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현대건설에 입사해 최고경영자가 된 뒤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현대의 자산을 그의 형과 처남 명의로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현대자동차가 자체적으로 차량 시트를 생산할 수 있었음에도 MB가 현대의 기술을 빼돌려 회사를 세웠고, 현대건설에 지시해 차량시트 생산공장인 다스를 짓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 현대자동차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 회사로부터 차량시트를 구매하는 계약을 맺도록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판결로 확정됐듯이 다스는 이명박의 것이다. 이명박이 현대그룹에 재직할 때 세워진 다스가 이명박의 재산 증식에 기여했다는 진술은 "정직은 내 삶의 큰 자산이었다"는 그의 자평을 음미해보도록 만든다. 대중이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와 이명박만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가 과연 같을까?
위 책은 "김경준은 해당 서류 2페이지에서 MB가 사기·뇌물·돈세탁·착취 등을 통해 6억 달러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모았고 그의 재산은 형제와 처남 그리고 여러 법인들을 통해 은닉되었다고 밝혔다"고 말한다.
주진우 <시사인> 기자가 쓴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에 "내가 이명박의 재산이 30조 정도 될 거라고 말했더니, 이명박의 한 친척은 '지금까지 말한 사람 중에 가장 근사치를 말한 것 같다'라고 했다"고 한 뒤 "이명박 형제의 한 수행비서는 '다스의 재산 가치가 10조가 훨씬 넘으니 (이명박 재산은) 상당히 큰 액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김경준이 말한 6억 달러는 현재 기준으로 약 6800억 원이다. '30조에 가깝다', '다스가 10조 원짜리이니 이명박 재산은 상당할 것이다'라는 진술에 비해서는 금액이 적지만, 6억 달러도 상당한 거액이다. 30조이든 10조이든 6억 달러든, 재벌이 아니고는 쉽게 소유할 수 없는 금액이다. 아무리 연봉이 많다 해도 샐러리맨이 모을 수 있는 돈은 분명 아니다.
1992년에 51세 된 이명박이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가지 않고 노태우·김영삼의 민주자유당에 들어가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것도 그의 비밀 재산과 무관치 않다는 증언이 있었다. 이명박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관이었던 김유찬 SIBC 대표는 2018년 4월 13일자 <세계일보> 인터뷰 기사 "김유찬, '이명박 차명재산 지키기 위해 30년 은인 정주영 배신'"에서 정주영 가문의 정아무개 박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이렇게 증언했다.
"정 박사에 따르면, 1992년 초 이미 이 전 대통령의 가·차명 재산의 상당부분을 파악하고 있던 당시 노태우 정권이 정 회장의 (국민당) 황색 돌풍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사람 명의로 돼 있는 차명재산을 뺏기고 감옥 갈래, 아니면 우리에게 협조하고 전국구 국회의원 감투 받을래'라고 이 전 대통령을 압박했고, 이 전 대통령은 이에 후자를 선택했다."
기왕에 정치 입문을 결심했다면 통일국민당에 들어가야 했지만, 정주영의 수족을 끊으려는 민자당 정권의 압력에 굴해 정주영과 결별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권이 상당부분을 파악하며 협박·회유를 할 만큼 은닉 재산이 일정 규모에 달해 있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현대그룹 고용사장인 그가 기업 오너를 성심으로 대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고용주를 대하는 태도는 '대한민국 고용사장'일 때도 잘 드러났다. 29일 대법원은 그에게 징역 17년, 벌금 130억, 추징금 57억8천여만 원을 선고하면서, 그가 대통령이 된 뒤 삼성그룹을 포함한 기업들로부터 뇌물을 수수하는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대법원 선고로 확정된 2심 판결 당시의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이 전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으로서 본인은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뇌물을 받은 공무원을 감시·감독하도록 법령을 정비하고 집행해 국가기관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이 같은 의무를 저버리고 사인·공무원·기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 부정한 처사를 했다"고 선고했다.
나랏일을 '내 일'로 생각한 결과
▲ 재수감 앞둔 이명박 전 대통령 자택 분위기 이명박 전 대통령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로 상고심에서 징역 17년이 확정된 가운데 29일 오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 앞에 한 시민이 이 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 |
ⓒ 유성호 |
이명박은 대통령직을 국민과 나라를 위해 수행하지 않고 개인적 치부의 수단으로 악용했다. 나랏일을 '내 일처럼' 하지 않고 '내 일'로 생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대강 사업으로 혈세 22조원을 낭비한 것도 나라 돈을 '내 돈처럼' 귀중히 여기지 않고 '내 돈'으로 생각해 함부로 다룬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석 샐러리맨인 대통령이 된 뒤 그는 공직을 이용해 비자금을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태가 그의 곳간을 늘려주었으니, 세상은 모르고 이명박만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는 현대그룹 퇴사로 끝나지 않고 청와대에 들어간 2008년 2월 25일 이후로도 계속됐다고 볼 수 있다.
서울시장 시절인 2006년에 이명박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 개정판의 서문에서 "거듭 말하거니와 신화는 없다"며 "다만 꿈과 용기를 가지고 바른 길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의 성실한 노력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신화는 없고 성실한 노력이 있을 뿐이라고 했지만, 세상이 모르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그런 면모가 한층 더 명백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29일 이명박은 대법원 선고 뒤 "법치가 무너졌다.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며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명박의 실체는 이번 판결로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기사]
'징역 17년 확정' 이명박 전 대통령, 11월 2일 수감 http://omn.kr/1q586
'징역 17년 확정' 이명박, 6가지 예우 박탈된다 http://omn.kr/1q6m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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