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저는 이 너머 갈산이라는 마을에서 1937년에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에 열세 살이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1950년 10월 15일 총살을 당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곳은 이곳 건너편이어서 이제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없어졌다. 10월 31일엔 어머니가 끌려와서 바로 여기서 총살당하셨다. 당시 젖먹이이던 어린 여동생을 끌어안고 함께 돌아가셨다. 다음날인 11월 1일 할아버지가 다시 이곳에 끌려와 총살을 당했다. 그날 오후 우리 집에 할아버지와 저를 끌어가기 위해 청년 2명이 왔다. 할아버지와 같이 방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나타나자 할아버지가 제게 눈짓을 했다. 너는 빨리 피신하라고 하셔서 제가 미리 만들어 둔 은신처에 몸을 숨겼다. 그래서 살아났다. 그날 할아버지와 총살을 당했으면 열세 살 제 유골은 없어져 찾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현장에 지금 서 있다. 할아버지, 어머니, 젖먹이 여동생이 학살당한 현장에 와있다. 이 한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나.”
10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교차로 인근 야산(백암리 49-2)에서 열린 ‘제7차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발굴 개토제’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인 이상설 씨(82세)는 절절한 목소리로 69년 전 학살을 증언했다. 1950년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할아버지, 젖먹이 여동생과 어머니가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한 뒤 이 씨는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1950년 아산에서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해
인민군 부역과 부역자 가족이란 이유로
2세 유아와 여성, 노인에 이르기까지 800여 명 학살
이날 개토제엔 김장호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아산유족회장을 비롯한 유족과 많은 시민이 함께 했다. 이들도 이 씨와 마찬가지로 이곳 백암리 야산과 탕정면, 배방읍 설화산 등에서 가족을 잃었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직후부터 1951년 1월까지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당한 민간인 가운데는 부역자의 가족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어린아이와 여성들도 있었다. 무고한 민간인 약 800여 명이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온양경찰서와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태극동맹 등 우익단체에 의해 총살된 뒤 불에 태워져 야산 등에 암매장됐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에 있던 참호 등에 70~90구 정도의 시신이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0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교차로 인근 야산(백암리 49-2)에서 열린 ‘제7차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발굴 개토제’ⓒ공동조사단
당시의 비극은 1955년 1월 15일 자 ‘경향신문’에 잘 나와 있다. 정부 보유미 횡령과 민간인학살 혐의로 기소된 신창 지서 유 모 주임 경찰에 대한 검찰 조사가 진행되면서 배방면 학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경향신문’은 “아산에 출장 갔다 돌아온 김 검사에 의하면, 경찰서 지서주임이 괴뢰정부(인민군)에 부역했다는 구실 밑에 부역자 아닌 양민 120여 명을 학살했다. 또 부역자 또한 개인적으로 사살하여 전후 3개월(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에 걸쳐 250명을 학살한 것이 판명되었다. 이 밖에도 정부보유미 450가마를 횡령하였다. 두 살 난 영아에서 노인까지 맹목적으로 학살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2018년 2월 배방읍 설화산 발굴로
수십 년 동안 묻혀있던 208구 유골 세상 밖으로
아이들이 58명,성인 사망자 가운데 80%가 여성
죄 없는 민간인은 물론 두 살 난 어린아이와 노인까지 학살한 사실이 검찰 수사결과 드러난 것이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는 유 모 주임 경찰에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하며 아무런 죄도 묻지 않았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유족들은 침묵해야 했다. 그러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아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민간집단희생으로 규정했고, 지난해 2월엔 배방읍 설화산 발굴이 진행되면서 수십 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영령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굴된 2~3세의 아동의 턱뼈. 당시 목격자들의 아이를 업은 부녀자도 있었다는 증언이 사실이었음을 보여주는 유골이다.ⓒ구자환 기자
지난해 3월 발굴에서 67년 만에 세상밖으로 나온 피학살자 유골.ⓒ구자환 기자
이날 개토제에서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지난해 배방읍 설화산 발굴에 대해 언급하면서 “33일 동안의 유해발굴과 15일 동안의 감식을 통해 모두 208분이 돌아왔다. 이 가운데 아이가 58명이었고, 성인 150명 가운데 80% 가까이가 부녀자들이었다. 유품 중에는 어머니들이 끼고 다니던 비녀가 89개나 나왔다. 공동 조사단이 발굴 하면서 유골과 진흙, 그리고 돌더미가 얽힌 참혹한 현장을 보면서 일손 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 사무국장은 “전국에는 150여 곳이 넘는 민간인 학살 매장지가 방치돼 있다. 과거사재단은 만들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이제 3년째 맞이하는 지금까지 국회에선 심도 있는 논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제7차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발굴’을 통해 정치권과 국회,그리고 대통령에게 촉구해 올해 안에 반드시 과거사법이 통과돼 유족들의 눈물을 닦고 상처를 보듬어 명예를 회복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장호 아산유족회장
“부역 누명을 씌워 이곳에서만 해도
80여 분 넘게 학살됐다”
김장호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아산유족회장(77세)도 이곳 백암리 야산에서 아버지를 읽었다. 김 회장의 아버지는 1950년 1월 9일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다. 김 회장은 개토제에서 “전쟁 시기에도 국민의 생명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부역 누명을 씌워 이곳에서만 해도 80여 분 넘게 학살됐다. 우리 유족들은 부모와 가족을 떠나보낸 이후에도 무시무시한 연좌제가 따라 다녔다”며 “유해가 발굴되면 편안한 곳으로 모시고, 모든 아픔과 괴로움을 내려놓겠다”고 말했다.
10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교차로 인근 야산(백암리 49-2)에서 열린 ‘제7차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발굴 개토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장호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아산유족회장ⓒ공동조사단
오세현 아산시장은 유병훈 부시장이 대독한 추모사를 통해 “민간인 학살은 전쟁의 공포가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똑똑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간인 학살은 국가의 공권력에 의한 학살사건”이라며 “국가는 사과해야 한다. 국가는 유가족의 원한 맺힌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유가족의 아픔을 치유해 진정한 화해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시장은 “이번 유해발굴을 통해 조금이나마 유가족들의 슬픔을 덜어드리길 기원하며 앞으로 정부 차원의 지원과 입법 활동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아산시가 적극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세월호 유가족 ‘유민 아빠’ 김영오 씨
“이곳에 묻히신 분들이 너무 늦지 않게
가족들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갔으면”
이날 개토제엔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유민 아빠’ 김영오 씨도 함께했다. 김영호 씨는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사건 당시 8일 동안 기다렸다. 그 짧은 시간도 기다림의 고통이 엄청났다.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들은 7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한다”며 “이곳에 묻히신 분들이 이제라도 온전한 모습으로 너무 늦지 않게 가족들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10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교차로 인근 야산(백암리 49-2)에서 열린 ‘제7차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발굴 개토제’에 참석한 아산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공동조사단
10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교차로 인근 야산(백암리 49-2)에서 열린 ‘제7차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발굴 개토제’에 참석한 아산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좌측)과 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사진 가운데)ⓒ공동조사단
경기 고양시 금정굴 학살을 비롯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추적해온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은 “발굴이 돼도 슬프고 안 돼도 슬프다. 전국 곳곳에 많은 유골이 묻혀있는 현실이 드러나야 한다. 이제는 개인적인 아픔을 넘어 전체의 문제, 역사의 문제가 되고 있다. 지금 전국의 한국전쟁 기념시설을 찾아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범죄의 현장에 승전비를 세웠다. 이곳 아산의 민간인 학살도 가해자들에겐 여전히 공적으로 되어 있다”며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민간차원에서도 역사를 다시 재구성해 평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2014년 2월 경남 진주시 명석명 용산리 용산고개(1차 학살지)발굴을 시작으로 2015년 2월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 2016년 2월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2017년 2월 경남 진주시 용산고개(2차 학살지), 2018년 2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2019년 3월 충북 보은국 내북면 아곡리에 이르기까지 여섯차례 발굴을 진행했다. 여섯 차례의 발굴을 이끌어온 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충북대 명예교수)는 “이 자리 설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유족들을 뵈면서 어떻게 하면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을까 늘 생각한다. 이곳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감식이 끝나면 세종시 추모의 집으로 모시게 된다. 이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단위 위령시설(2022년 건립예정)이 만들어지면 그곳으로 옮길 것”이라고 밝혔다. 박 단장에 따르면 오는 6월 초까지 발굴을 진행하고 이후 유해감식을 거쳐 보고서를 완성해 오는 8월 유해발굴 보고대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10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교차로 인근 야산(백암리 49-2)에서 열린 ‘제7차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발굴 개토제’ⓒ공동조사단
10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교차로 인근 야산(백암리 49-2)에서 열린 ‘제7차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유해발굴 개토제’에 참석한 유족들ⓒ공동조사단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