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
▲ "아들이 여기 있어"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시신들 사진 속에서 아들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
ⓒ 권우성 |
1980년 5월 그날 이후, 엄마는 투사가 됐다. 아들을 잃은 뒤다. 전두환 정권은 '막둥이'를 폭도로 둔갑시켰다. 엄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전두환 정권은 엄마도 폭력으로 진압했다. 어느 날, 엄마는 머리가 깨져 피범벅이 됐다. 전두환 정권은 힘으로 안 되자 돈으로 꼬드겼다. 가만히 있겠다면 논 100마지기를 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자식 팔아먹는 부모'가 될 수 없었다. 단칼에 거절하고,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농성을 했다. 오월의 그날, 옛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에 나섰던 문재학(당시 16세·광주상고1)군의 어머니 김길자(80)씨 이야기다.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 사진사'가 된 사람도 있다. 그는 문재학군과 같은 '고등학생 시민군'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사회문제에 일찍 눈떴다. 1980년 당시 금서였던 김지하의 <오적>을 읽고,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교사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이사장)씨도 만났다.
하지만 그는 공수부대의 '폭도 소탕작전'이 펼쳐진 날 체포됐다. 1980년 5월 27일, 공수부대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고 군홧발에 짓밟혔다. 등에 '극렬폭도'란 글씨가 새겨진 채 오랏줄에 묶여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잔혹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오월의 그날, 광주 최후의 항쟁에서 살아남은 김향득(57)씨다.
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앞두고 두 사람을 만났다.
두 명의 고등학생 시민군
지난 8일, 두 사람을 만난 장소는 광주시 북구 신안동 김길자씨 집에서였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남은 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고등학생 시민군'이어서일까. 김길자씨는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김향득씨를 소개했고, 김향득씨는 김길자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김길자씨가 '오월 투쟁'을 하는 곳이면 김향득씨가 나타나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둘 사이 간격은 좁아졌다. 오월 광주의 어머니와 아들은 이렇게 만났다.
"처음엔 재학이 어머님인지 몰랐당께. 나중에 물어물어 알아보니 재학이 어머니라는 것이여. 다른 사람 이야기가 나오믄 별로 눈물이 안 난디 재학이 이야기만 나오면 꼭 눈물이 난당께. 같은 시절을 산 또래고 '고등학교 시민군'이었응께. 마지막 날 살아남았다는 부채 의식도 느껴지고, 그리고 그때 청소년들이..." (김향득씨)
김향득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진 손으로 눈을 훔쳤다.
"80년 항쟁 후에 내 자식 살려내라고 소리치믄서 다녔제. 이것 말고 할 말이 없응께. 그럴 때마다 향득이가 와서 사진을 찍음서 뒤따라 다니데. 그렇게 하다가 알게 됐제. 향득이 울지 말고 말해." (김길자씨)
"뜻하지 않게 사진을 하게 되믄서 자꾸 문재학, 박현숙 같은 사람들 생각이 나는 거여. 당시 같은 또래였던 사람들잉께. 왜 다들 억울하게 죽었는지, 한 번 제대로 피어보도 못하고 죽어야 했는지. 그런 부채 의식이 남아서 13년 동안 사진을 찍었제. 그러다 현장에 가믄 '여기가 혹시 재학이가 사망한 자리는 아닐랑가' 이런 생각을 들어 카메라를 들기도 했제." (김향득씨)
"그려, 우리 재학이. (1980년 5월) 25일 날인가. 그때 도청으로 애기를 데리러 강께 재학이가 (양)창근이 이야기를 하는 거여. 동산초등학교 동창이었제. 아따 동산초 있잖여. 이참에 전두환이 왔을 때, '전두환 물러가라'라고 했던 애기들 있던 곳. 음... 그랑께 우리 재학이가 (처음) 18일 날 전화가 왔어." (김길자씨)
김길자씨는 기억을 더듬었다. 39년 전 5월 18일로 돌아가 아들의 전화를 받았던 일부터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지(구묘역)에 그를 묻기까지 사연을 들려줬다.
[어머니 김길자씨의 증언] 시신이 되어 돌아온 고등학생 아들
1980년 5월 18일. 문재학군은 집에 전화를 했다. 계엄군이 곳곳에 누비고 다녀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엄마에게 친구 광호네로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엄마와 광주교대를 지나가는데 엄청난 수의 계엄군을 발견했다. 엄마는 문재학군의 팔짱을 꼈다.
21일, 김씨는 아들을 찾아 집을 샅샅이 뒤졌다. 어딜 갔는지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돌아온 아들은 목이 쉬어 있었다.
"목 왜 쉬었냐?"
"차 따라다녔제."
"뭣헐라고 니가 차를 따라 댕겨야"라며 한소리를 했다. 아들은 "선배들이 김대중 석방하고 전두환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칭께 같이 따라했소"라고 했다. 형을 앞세워 "계엄군 온당께 절대 나가자 마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23일, 문재학군은 가족들에겐 아무 말도 안하고 문밖을 나섰다. 다음날(24일)이 돼서야 "(전남)도청 상황실에 있소"라고 집에 전화를 걸었다. 25일, 김씨는 남편 문건양(84)씨와 함께 도청으로 달려갔다. 민원실 2층에 서 있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집으로 가자는 말에 아들은 "엄마, 꼭 (양)창근이 같은 시체가 들어왔는디 총에 맞아 죽었는지 아닌지 모르것소. 나는 역서 창근이도 봐야하고 심부름이라도 해야 항께 어서 가쇼"라고 했다. 김씨와 남편 문씨는 완강하게 거절하는 아들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26일, 문재학군은 도청 본관 앞에서 다시 부모님을 만났다. 엄마는 다시 설득했다. 문군은 이번에도 "엄마, 창근이 수습도 못하고 있어요. 저녁에 차가 와서 실어준당께, 그때 갈라요. 걱정말고 가쇼"라고 했다. 부모님은 "오늘은 꼭 돌아온단 약속 지켜라잉"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통금시간 7시가 넘어도 아들은 오지 않았다. 밤늦게야 "차가 끊겨서 못가겄소"라는 전화가 왔다.
"오늘 계엄군이 쳐들어온단디 어쩔라고 그라냐, 진짜!"
"학생들은 손들고 나가믄 괜찮다고 항께 걱정마쇼. 엄마, 차근이가 저러고 있는디 어째 저만 살자고 집에 간다요."
김길자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옷을 잡아끌어서라도 데려오지 못한 걸,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을 죽인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27일, 김길자씨는 새벽 두세 시 즈음에 콩 볶는 소리마냥 총소리가 울러 펴지는 걸 들었다. 옥상에 올라가니 군인들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새벽 6시, 남편 문건양씨와 외삼촌을 앞세워 도청으로 갔다.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문재학군은 도청에서 '엠(M)-16 총상'으로 사망했다.
"재학이 찾을라고 시체가 있다는 데는 다 가봤제. 외삼촌 친구가 병원에 있어서 거그다가도 연락을 했어. 그랬더니 금방 전화가 와서 거기 있다고 하데. 현충일에 계엄사 가믄 (아들을) 내준다고 항께 살아있는지 알았제. 근디 현충일이 내일인데도 연락이 없어브러. 그래서 다시 연락해봉께 우리 재학이가 아닌겨(동명이인). 넋이 나가서 있는데, 즈그(문재학) 담임선생님이 연락을 해와야. 신문 봉께 재학이가 망월동에 가매장된 거 같다고. 6월 7일인가 망월동에 갔어.
묘지(번호 104, 관번호 94)를 팔라고 하는디 안 된다는 거여. 시청이나 경찰서에서 나와갖고 시체를 확인해야 가능하다고. 그랑께 즈그 아부지가 삽을 들고 화를 내며 '내 자식 아니면 안 가져 갈 것잉께 비켜, 다 때려죽여븐다'고 덤벼. (결국) 묘를 파고 봤는디 우리 재학이가 아닌 것 같은 거여. 근데 남들은 다 재학이가 맞다여.
그래서 아빠가 머리를 만져봤제. 애기가 시골 살 때, 다리에서 떨어졌거든. 내가 냇가에서 빨래하는디 다리 위에서 '엄마'하고 부르다가 떨어져서 머리 한쪽이 오그라졌는디, 커서도 안 펴지는 거여. 그걸 아빠가 확인하는디, 머리카락도 뭉텅뭉텅 다 빠졌고, 목도 덜렁덜렁해야. 제대로 확인이 안 돼. 이때까지도 우린 재학이가 아니길 바랐제. 근데 나중에 검찰청 8호 검사한테 갔더만 사진을 보여주는디 재학이가 맞어. (6월) 21일 망월동 묘지에 묻었제."
[김향득씨의 증언] 등에 '극렬폭도' 낙인, 체중 35kg까지 줄어
- 김향득씨는 어떻게 고등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이 됐나요?
"고등학생 때부터 김지하의 책 <오적> 등 금서를 많이 봤제.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기도 했고. 당시 독서회를 했는디 거기서도 리더여서 학교나 기관에서 주시하는 인물이었어. 그렇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믄서 자연스럽게 시민군이 됐제."
-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겠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긴디, (5월) 27일 아침부터 아버지가 시신이 있는 곳마다 가서 나를 찾았대. 지나가는 지프차를 잡고 이름을 적어주면서 간곡하게 사정해서 알아보기도 하고. 향득이란 이름이 특이하잖아. 그렇게 며칠 고생하다가 아들이 살아서 상무대 영창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데. 부모 마음 다 똑같제 뭐."
- 상무대에 끌려가서는 어땠나요?
"계엄군이 내 등에 '극렬폭도'라고 쓰고, 오랏줄에 묶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어. 아우슈비츠 포로만도 못했제. 체중이 35kg까지 줄어들었응께. 아버지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는디, 걱서 진짜 군홧발로 죽도록 맞았당께. 잠도 안 재우고 패는데, 그냥 개돼지였어.
고문도 당했제. 아니 이놈들이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서 고문을 하데. 그라믄 손이 퉁퉁 붓어.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빌었제. 거기선 어떤 힘 좋은 장사도 못 버텨. 나도 살집을 꼬집음서 버텼제. 아버지가 정신 놓지 말라고 한 거 기억함서. 걱서 고문 받고 구타 당해서 멍청해지는 사람 여럿 봤거든. (결국 풀려나긴 했어도) 고문 독은 안 빠지데. 영창에서 나와갖고 몸에 좋다는 거 다 먹었어. 오소리, 개구리 뒷다리, 심지어 인분이 고문 독 빼는데 좋다고 해서 똥오줌도 뒤집어 썼응께.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게 다행이지..."
어머니 내동댕이치고 돈으로 회유하려 한 전두환
국가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남은 자'에게도 폭력을 가했다. 김향득씨 뿐만 아니라 김길자씨도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기까지 갖은 고초를 당했다. 전두환이 광주에 오는 날이면, 안방에 형사들이 드러눕고 집밖에는 전경이 배치됐다.
감시의 눈을 피해 전두환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날이면, 경찰차 실려 삼척으로 남원으로 끌려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1986년도엔 강제로 제주도행 배에 오른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이 상하는 잃은 없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1984년 4월, YWCA에서 유가족협회 2세들이 청년회 발족식을 가졌다. 김길자씨는 딸과 함께 구 호남전기에 모여 YWCA가 있는 광주 유동으로 행진하려 했다. 하지만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몸싸움이 벌어졌다.
돌덩이가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김길자씨가 한 경찰의 귀에 꽂혀 있는 무전기 리시버를 뺐다. 경찰은 김씨의 머리를 무전기로 내리쳤다. 시뻘건 피가 김씨의 머리에서 흘러내려 얼굴을 타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병원에서 여덟 바늘을 꿰맸다. 하지만 김씨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했다.
"내가 재학이 보내고 석 달 동안 물만 먹고 살았어. 근디 곰곰이 생각해 봉께 우리 재학이가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를 했는디 폭도라고 하는 것이여. 재학이 사망신고 하러 갔을 적에도 '학생이 총 잡았응께 폭도'라며 위로금도 안 줍디다. 우리 재학이 폭도 누명 벗겨야지. 진상규명해야지. 그래서 유족들 찾아다니면서 활동을 시작했어."
전두환 정권은 힘으로 안 되자 돈을 썼다. 김길자씨에게 소란을 피우지 않는 조건의 각서를 쓴다면, 논 100마지기를 준다고 했단다. 김씨는 이를 거부했다.
"한 번은 505보안부대에서 연락이 왔어. 안부말을 하더니 부대로 오라고 하데. 내가 뭣헌다고 거길 가냐고 볼일 없다고 했제. 그래도 자꾸 재촉해서 갔는디 '각서를 써줄 수 있냐'고 묻데. 무슨 각서냐고 하니까 다시는 소란 피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평생 먹고 살만치 준다고 하데. 영암에 논 100마지기 사준다고.
각서 쓸 만한 일한 적 없고, 내가 노동해서 먹고 한다고 했제. 자식 팔아서 부자 되면 뭣허냐고. 그랬더니 그럽디다. 역시 그놈의 집구석이라고. 그람서 당신 아들이 잘했냐, 학생이 총칼 드는 게 잘한 짓이냐고 따져. 나는 내 자식 폭도 누명 벗기려고 하는 거라고 그랬제. 잘못한 게 뭐이 있냐, 누가 먼저 사람을 죽였냐고 따진 거여."
김향득씨는 국가폭력에 카메라로 맞섰다. 사라져가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지키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지난 2007년, 도청 별관 철거 논란이 불거졌을 때부터 5.18 사적지와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어느 샌가 '오월 사진가'라고 불리게 됐다.
"도청 원형복원 문제를 처음 제기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안 들어줬어. 그때는 단독군장을 꾸려갖고 혼자 돌아다님서 기록했제. 공간이 5.18을 기억하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았으믄 해. 5.18 어머님, 아버지 다들 산 증인인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까 하나하나 기록해야제. 노시는 모습, 힘들어 하는 모습, 그게 다 기록잉께.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내가 죽었으면 유족들처럼 했을 것이여.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겄지만은 아무튼 최대한 기록해야제"
"즈그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하려 했는디..."
그렇다면 김향득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김향득씨는 김길자 어머님이 5.18 기념행사 전야제에서 거리행진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2016년께 5.18 전야제 행사 때 (김길자) 어머니가 광주공원에서부터 걸어왔어. 다른 어머니들이랑 하얀 소복에 검은 리본을 달고 오시는데,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더랑께. 저 어머니 한을 누가 풀어드려야 하나, 가슴이 짠했어. 사실 나는 5.18 이후 어버이날에 부모님한테 카네이션을 달아준 적이 없어. 5.18 진상규명 되는 날, 유공자들이 편안한 삶을 누릴 때, 달아드리겠다고 혼자 다짐하고 있는 거여."
김길자씨는 사진을 꺼냈다. 서랍 속에 간직해온 아들 사진이었다. 영정사진이 되어버린 중학교 졸업사진과 수학여행 때 친구랑 찍은 사진. 집 앞에서 혼자 찍은 사진 등이 김길자씨 집 거실에 펼쳐졌다. 거기엔 뜻밖의(?) 사진도 있었다.
그건, '인간 사냥'의 증거였다. 김길자씨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5월 27일 촬영한 거라고 했다. 참혹한 현장이었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길 위 곳곳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엎드려 있는 사람들 곁에 등허리에 총을 어슷하게 멘 군인들이 서 있다. 김길자씨는 이 손가락으로 아들을 짚었다.
"여그 있는 애가 우리 재학이여. 밑에 교련복 바지 입고, 위에 카키색 면티 입은 애기. 이렇게 입고 집을 나갔제. (광주) 가톨릭센터에서 사진 전시회를 했는디, 이 사진을 보고 재학이 형이 그라데. '엄마, 재학이 여기 있다'고. 딱 보니까 우리 재학이여. 5.18재단에 부탁해서 사진을 복사했어. 여기 우리 재학이 옆에 누워있는 게 재학이 친구 안종필이고, 그 옆에가 조대부고 3학년 박성룡이여. 종필이네는 아들 '폭도'로 몰리면서 식당 크게 했다가 망했고, 성룡이 엄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
- 국가폭력 피해자로 살아가면서 얻은 후유증 없나요?
"나는 아닌디, 아부지(남편 문건양)가 트라우마센터에서 미술치료 받을 때여. 찰흙을 가지고 집을 만들었는데 울타리고 있고, 집도 큰 거여. 그때 옆에 있던 기자가 아부지한테 물어봤제.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그러니까 아부지가 그라데. 우리 재학이 공부방 하나 못해줘서 공부방도 만들고 그랬다고. 그리고 혹시라도 나쁜 놈들이 또 해칠까봐 울타리도 쳤다고. 짠하데." (김길자씨)
"사진을 찍다봉께 가기 힘든 공간은 없는디, 습한 곳에 가면 고문 받았던 때가 생각나. 505보안부대, 도청 민원실 지하, 국군통합병원 소각장... 이런 곳에 가면 그때 기억이 떠올라." (김향득씨)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남의 자식 죽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제. 말로 천냥 빚 갚는다고 하는디. 전두환이는 29만원 밖에 없담서 골프 치러 다니고, (자유) 한국당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의원이랑 지만원이는 '괴물집단이네', '북한군 있었다' 이런 소리하는데, 자기 자식들도 그런 정부에서 죽어봐야 우리 속을 알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당께. 진짜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사회에서 멸종시켜브러야 돼.
우리도 사람이라고 즈그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할 수 있제.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는 그렇게 못하지. 아부지(남편 문건양)가 아파서 병원에 있어서 그렇지 이런 식이면 다시 (거리로) 나가야제. 진상규명 되는 거 꼭 보고 죽어야제. 그리고 향득이, 고문 받아서 오지게 고생하고 사는디, 그라지만 살아야지. 그렇게라도 살아야지. 난 우리 재학이도 어떻게든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김길자씨)
"우리 어머니도 좀 더 건강하셔서 좋은 세상 보셨으믄 좋겄어요. 진상규명 되는 날 올 때까지 저도 노력할랍니다." (김향득씨)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인터뷰 장소였던 김길자씨 집 거실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5.18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는 출범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가 자유한국당에 조사위원을 다시 추천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재추천을 하지 않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앞두고 두 사람을 만났다.
두 명의 고등학생 시민군
지난 8일, 두 사람을 만난 장소는 광주시 북구 신안동 김길자씨 집에서였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남은 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고등학생 시민군'이어서일까. 김길자씨는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김향득씨를 소개했고, 김향득씨는 김길자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김길자씨가 '오월 투쟁'을 하는 곳이면 김향득씨가 나타나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둘 사이 간격은 좁아졌다. 오월 광주의 어머니와 아들은 이렇게 만났다.
"처음엔 재학이 어머님인지 몰랐당께. 나중에 물어물어 알아보니 재학이 어머니라는 것이여. 다른 사람 이야기가 나오믄 별로 눈물이 안 난디 재학이 이야기만 나오면 꼭 눈물이 난당께. 같은 시절을 산 또래고 '고등학교 시민군'이었응께. 마지막 날 살아남았다는 부채 의식도 느껴지고, 그리고 그때 청소년들이..." (김향득씨)
▲ "고등학생 시민군" 김향득 바라보는 문재학 어머니 김길자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바라보고 있다. | |
ⓒ 권우성 |
김향득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진 손으로 눈을 훔쳤다.
"80년 항쟁 후에 내 자식 살려내라고 소리치믄서 다녔제. 이것 말고 할 말이 없응께. 그럴 때마다 향득이가 와서 사진을 찍음서 뒤따라 다니데. 그렇게 하다가 알게 됐제. 향득이 울지 말고 말해." (김길자씨)
"뜻하지 않게 사진을 하게 되믄서 자꾸 문재학, 박현숙 같은 사람들 생각이 나는 거여. 당시 같은 또래였던 사람들잉께. 왜 다들 억울하게 죽었는지, 한 번 제대로 피어보도 못하고 죽어야 했는지. 그런 부채 의식이 남아서 13년 동안 사진을 찍었제. 그러다 현장에 가믄 '여기가 혹시 재학이가 사망한 자리는 아닐랑가' 이런 생각을 들어 카메라를 들기도 했제." (김향득씨)
"그려, 우리 재학이. (1980년 5월) 25일 날인가. 그때 도청으로 애기를 데리러 강께 재학이가 (양)창근이 이야기를 하는 거여. 동산초등학교 동창이었제. 아따 동산초 있잖여. 이참에 전두환이 왔을 때, '전두환 물러가라'라고 했던 애기들 있던 곳. 음... 그랑께 우리 재학이가 (처음) 18일 날 전화가 왔어." (김길자씨)
김길자씨는 기억을 더듬었다. 39년 전 5월 18일로 돌아가 아들의 전화를 받았던 일부터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지(구묘역)에 그를 묻기까지 사연을 들려줬다.
[어머니 김길자씨의 증언] 시신이 되어 돌아온 고등학생 아들
▲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영정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의 영정이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져 있다. | |
ⓒ 권우성 |
1980년 5월 18일. 문재학군은 집에 전화를 했다. 계엄군이 곳곳에 누비고 다녀 집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엄마에게 친구 광호네로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엄마와 광주교대를 지나가는데 엄청난 수의 계엄군을 발견했다. 엄마는 문재학군의 팔짱을 꼈다.
21일, 김씨는 아들을 찾아 집을 샅샅이 뒤졌다. 어딜 갔는지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돌아온 아들은 목이 쉬어 있었다.
"목 왜 쉬었냐?"
"차 따라다녔제."
"뭣헐라고 니가 차를 따라 댕겨야"라며 한소리를 했다. 아들은 "선배들이 김대중 석방하고 전두환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칭께 같이 따라했소"라고 했다. 형을 앞세워 "계엄군 온당께 절대 나가자 마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23일, 문재학군은 가족들에겐 아무 말도 안하고 문밖을 나섰다. 다음날(24일)이 돼서야 "(전남)도청 상황실에 있소"라고 집에 전화를 걸었다. 25일, 김씨는 남편 문건양(84)씨와 함께 도청으로 달려갔다. 민원실 2층에 서 있는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집으로 가자는 말에 아들은 "엄마, 꼭 (양)창근이 같은 시체가 들어왔는디 총에 맞아 죽었는지 아닌지 모르것소. 나는 역서 창근이도 봐야하고 심부름이라도 해야 항께 어서 가쇼"라고 했다. 김씨와 남편 문씨는 완강하게 거절하는 아들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26일, 문재학군은 도청 본관 앞에서 다시 부모님을 만났다. 엄마는 다시 설득했다. 문군은 이번에도 "엄마, 창근이 수습도 못하고 있어요. 저녁에 차가 와서 실어준당께, 그때 갈라요. 걱정말고 가쇼"라고 했다. 부모님은 "오늘은 꼭 돌아온단 약속 지켜라잉"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통금시간 7시가 넘어도 아들은 오지 않았다. 밤늦게야 "차가 끊겨서 못가겄소"라는 전화가 왔다.
"오늘 계엄군이 쳐들어온단디 어쩔라고 그라냐, 진짜!"
"학생들은 손들고 나가믄 괜찮다고 항께 걱정마쇼. 엄마, 차근이가 저러고 있는디 어째 저만 살자고 집에 간다요."
김길자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옷을 잡아끌어서라도 데려오지 못한 걸,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을 죽인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27일, 김길자씨는 새벽 두세 시 즈음에 콩 볶는 소리마냥 총소리가 울러 펴지는 걸 들었다. 옥상에 올라가니 군인들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새벽 6시, 남편 문건양씨와 외삼촌을 앞세워 도청으로 갔다.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문재학군은 도청에서 '엠(M)-16 총상'으로 사망했다.
▲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가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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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이 찾을라고 시체가 있다는 데는 다 가봤제. 외삼촌 친구가 병원에 있어서 거그다가도 연락을 했어. 그랬더니 금방 전화가 와서 거기 있다고 하데. 현충일에 계엄사 가믄 (아들을) 내준다고 항께 살아있는지 알았제. 근디 현충일이 내일인데도 연락이 없어브러. 그래서 다시 연락해봉께 우리 재학이가 아닌겨(동명이인). 넋이 나가서 있는데, 즈그(문재학) 담임선생님이 연락을 해와야. 신문 봉께 재학이가 망월동에 가매장된 거 같다고. 6월 7일인가 망월동에 갔어.
묘지(번호 104, 관번호 94)를 팔라고 하는디 안 된다는 거여. 시청이나 경찰서에서 나와갖고 시체를 확인해야 가능하다고. 그랑께 즈그 아부지가 삽을 들고 화를 내며 '내 자식 아니면 안 가져 갈 것잉께 비켜, 다 때려죽여븐다'고 덤벼. (결국) 묘를 파고 봤는디 우리 재학이가 아닌 것 같은 거여. 근데 남들은 다 재학이가 맞다여.
그래서 아빠가 머리를 만져봤제. 애기가 시골 살 때, 다리에서 떨어졌거든. 내가 냇가에서 빨래하는디 다리 위에서 '엄마'하고 부르다가 떨어져서 머리 한쪽이 오그라졌는디, 커서도 안 펴지는 거여. 그걸 아빠가 확인하는디, 머리카락도 뭉텅뭉텅 다 빠졌고, 목도 덜렁덜렁해야. 제대로 확인이 안 돼. 이때까지도 우린 재학이가 아니길 바랐제. 근데 나중에 검찰청 8호 검사한테 갔더만 사진을 보여주는디 재학이가 맞어. (6월) 21일 망월동 묘지에 묻었제."
[김향득씨의 증언] 등에 '극렬폭도' 낙인, 체중 35kg까지 줄어
▲ "우리 어머니도 좀 더 건강하셔서 좋은 세상 보셨으믄 좋겄어요. 진상규명 되는 날 올 때까지 저도 노력할랍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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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향득씨는 어떻게 고등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이 됐나요?
"고등학생 때부터 김지하의 책 <오적> 등 금서를 많이 봤제. 박석무(전 518기념재단)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기도 했고. 당시 독서회를 했는디 거기서도 리더여서 학교나 기관에서 주시하는 인물이었어. 그렇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믄서 자연스럽게 시민군이 됐제."
-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겠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긴디, (5월) 27일 아침부터 아버지가 시신이 있는 곳마다 가서 나를 찾았대. 지나가는 지프차를 잡고 이름을 적어주면서 간곡하게 사정해서 알아보기도 하고. 향득이란 이름이 특이하잖아. 그렇게 며칠 고생하다가 아들이 살아서 상무대 영창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데. 부모 마음 다 똑같제 뭐."
- 상무대에 끌려가서는 어땠나요?
"계엄군이 내 등에 '극렬폭도'라고 쓰고, 오랏줄에 묶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어. 아우슈비츠 포로만도 못했제. 체중이 35kg까지 줄어들었응께. 아버지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는디, 걱서 진짜 군홧발로 죽도록 맞았당께. 잠도 안 재우고 패는데, 그냥 개돼지였어.
고문도 당했제. 아니 이놈들이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서 고문을 하데. 그라믄 손이 퉁퉁 붓어.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빌었제. 거기선 어떤 힘 좋은 장사도 못 버텨. 나도 살집을 꼬집음서 버텼제. 아버지가 정신 놓지 말라고 한 거 기억함서. 걱서 고문 받고 구타 당해서 멍청해지는 사람 여럿 봤거든. (결국 풀려나긴 했어도) 고문 독은 안 빠지데. 영창에서 나와갖고 몸에 좋다는 거 다 먹었어. 오소리, 개구리 뒷다리, 심지어 인분이 고문 독 빼는데 좋다고 해서 똥오줌도 뒤집어 썼응께.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게 다행이지..."
어머니 내동댕이치고 돈으로 회유하려 한 전두환
국가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남은 자'에게도 폭력을 가했다. 김향득씨 뿐만 아니라 김길자씨도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기까지 갖은 고초를 당했다. 전두환이 광주에 오는 날이면, 안방에 형사들이 드러눕고 집밖에는 전경이 배치됐다.
감시의 눈을 피해 전두환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날이면, 경찰차 실려 삼척으로 남원으로 끌려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1986년도엔 강제로 제주도행 배에 오른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이 상하는 잃은 없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1984년 4월, YWCA에서 유가족협회 2세들이 청년회 발족식을 가졌다. 김길자씨는 딸과 함께 구 호남전기에 모여 YWCA가 있는 광주 유동으로 행진하려 했다. 하지만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몸싸움이 벌어졌다.
▲ 5.18진상규명 시위 도중 피 흘리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공개한 사진들. 고 문재학씨 시신 사진과 함께 진상규명을 위한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피 흘리는 김길자씨의 모습도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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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덩이가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김길자씨가 한 경찰의 귀에 꽂혀 있는 무전기 리시버를 뺐다. 경찰은 김씨의 머리를 무전기로 내리쳤다. 시뻘건 피가 김씨의 머리에서 흘러내려 얼굴을 타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병원에서 여덟 바늘을 꿰맸다. 하지만 김씨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병원 옥상에 올라가서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했다.
"내가 재학이 보내고 석 달 동안 물만 먹고 살았어. 근디 곰곰이 생각해 봉께 우리 재학이가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를 했는디 폭도라고 하는 것이여. 재학이 사망신고 하러 갔을 적에도 '학생이 총 잡았응께 폭도'라며 위로금도 안 줍디다. 우리 재학이 폭도 누명 벗겨야지. 진상규명해야지. 그래서 유족들 찾아다니면서 활동을 시작했어."
전두환 정권은 힘으로 안 되자 돈을 썼다. 김길자씨에게 소란을 피우지 않는 조건의 각서를 쓴다면, 논 100마지기를 준다고 했단다. 김씨는 이를 거부했다.
"한 번은 505보안부대에서 연락이 왔어. 안부말을 하더니 부대로 오라고 하데. 내가 뭣헌다고 거길 가냐고 볼일 없다고 했제. 그래도 자꾸 재촉해서 갔는디 '각서를 써줄 수 있냐'고 묻데. 무슨 각서냐고 하니까 다시는 소란 피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평생 먹고 살만치 준다고 하데. 영암에 논 100마지기 사준다고.
각서 쓸 만한 일한 적 없고, 내가 노동해서 먹고 한다고 했제. 자식 팔아서 부자 되면 뭣허냐고. 그랬더니 그럽디다. 역시 그놈의 집구석이라고. 그람서 당신 아들이 잘했냐, 학생이 총칼 드는 게 잘한 짓이냐고 따져. 나는 내 자식 폭도 누명 벗기려고 하는 거라고 그랬제. 잘못한 게 뭐이 있냐, 누가 먼저 사람을 죽였냐고 따진 거여."
▲ 고등학생 시민군 "오월의 사진가" 김향득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57)씨. 현재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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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득씨는 국가폭력에 카메라로 맞섰다. 사라져가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지키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지난 2007년, 도청 별관 철거 논란이 불거졌을 때부터 5.18 사적지와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어느 샌가 '오월 사진가'라고 불리게 됐다.
"도청 원형복원 문제를 처음 제기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안 들어줬어. 그때는 단독군장을 꾸려갖고 혼자 돌아다님서 기록했제. 공간이 5.18을 기억하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았으믄 해. 5.18 어머님, 아버지 다들 산 증인인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까 하나하나 기록해야제. 노시는 모습, 힘들어 하는 모습, 그게 다 기록잉께.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내가 죽었으면 유족들처럼 했을 것이여.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있겄지만은 아무튼 최대한 기록해야제"
"즈그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하려 했는디..."
그렇다면 김향득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김향득씨는 김길자 어머님이 5.18 기념행사 전야제에서 거리행진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2016년께 5.18 전야제 행사 때 (김길자) 어머니가 광주공원에서부터 걸어왔어. 다른 어머니들이랑 하얀 소복에 검은 리본을 달고 오시는데,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더랑께. 저 어머니 한을 누가 풀어드려야 하나, 가슴이 짠했어. 사실 나는 5.18 이후 어버이날에 부모님한테 카네이션을 달아준 적이 없어. 5.18 진상규명 되는 날, 유공자들이 편안한 삶을 누릴 때, 달아드리겠다고 혼자 다짐하고 있는 거여."
▲ "5월 어머니" 모습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 김향득 80년 5월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씨는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는 "오월의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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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자씨는 사진을 꺼냈다. 서랍 속에 간직해온 아들 사진이었다. 영정사진이 되어버린 중학교 졸업사진과 수학여행 때 친구랑 찍은 사진. 집 앞에서 혼자 찍은 사진 등이 김길자씨 집 거실에 펼쳐졌다. 거기엔 뜻밖의(?) 사진도 있었다.
그건, '인간 사냥'의 증거였다. 김길자씨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5월 27일 촬영한 거라고 했다. 참혹한 현장이었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길 위 곳곳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엎드려 있는 사람들 곁에 등허리에 총을 어슷하게 멘 군인들이 서 있다. 김길자씨는 이 손가락으로 아들을 짚었다.
"여그 있는 애가 우리 재학이여. 밑에 교련복 바지 입고, 위에 카키색 면티 입은 애기. 이렇게 입고 집을 나갔제. (광주) 가톨릭센터에서 사진 전시회를 했는디, 이 사진을 보고 재학이 형이 그라데. '엄마, 재학이 여기 있다'고. 딱 보니까 우리 재학이여. 5.18재단에 부탁해서 사진을 복사했어. 여기 우리 재학이 옆에 누워있는 게 재학이 친구 안종필이고, 그 옆에가 조대부고 3학년 박성룡이여. 종필이네는 아들 '폭도'로 몰리면서 식당 크게 했다가 망했고, 성룡이 엄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
- 국가폭력 피해자로 살아가면서 얻은 후유증 없나요?
"나는 아닌디, 아부지(남편 문건양)가 트라우마센터에서 미술치료 받을 때여. 찰흙을 가지고 집을 만들었는데 울타리고 있고, 집도 큰 거여. 그때 옆에 있던 기자가 아부지한테 물어봤제.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그러니까 아부지가 그라데. 우리 재학이 공부방 하나 못해줘서 공부방도 만들고 그랬다고. 그리고 혹시라도 나쁜 놈들이 또 해칠까봐 울타리도 쳤다고. 짠하데." (김길자씨)
"사진을 찍다봉께 가기 힘든 공간은 없는디, 습한 곳에 가면 고문 받았던 때가 생각나. 505보안부대, 도청 민원실 지하, 국군통합병원 소각장... 이런 곳에 가면 그때 기억이 떠올라." (김향득씨)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남의 자식 죽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제. 말로 천냥 빚 갚는다고 하는디. 전두환이는 29만원 밖에 없담서 골프 치러 다니고, (자유) 한국당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의원이랑 지만원이는 '괴물집단이네', '북한군 있었다' 이런 소리하는데, 자기 자식들도 그런 정부에서 죽어봐야 우리 속을 알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당께. 진짜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사회에서 멸종시켜브러야 돼.
우리도 사람이라고 즈그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할 수 있제.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는 그렇게 못하지. 아부지(남편 문건양)가 아파서 병원에 있어서 그렇지 이런 식이면 다시 (거리로) 나가야제. 진상규명 되는 거 꼭 보고 죽어야제. 그리고 향득이, 고문 받아서 오지게 고생하고 사는디, 그라지만 살아야지. 그렇게라도 살아야지. 난 우리 재학이도 어떻게든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김길자씨)
"우리 어머니도 좀 더 건강하셔서 좋은 세상 보셨으믄 좋겄어요. 진상규명 되는 날 올 때까지 저도 노력할랍니다." (김향득씨)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인터뷰 장소였던 김길자씨 집 거실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5.18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는 출범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가 자유한국당에 조사위원을 다시 추천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재추천을 하지 않고 있다.
▲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선 고 문재학씨 어머니 김길자(80)씨와 김향득(57)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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