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박종철 열사 물고문 남영동 대공분실 찾은 경찰청 지휘부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8-01-13 13:14:50
수정 2018-01-13 13:2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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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성 경찰청장은 경찰청 지휘부와 함께 13일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을 찾아 이같이 밝혔다. 그는 “시민단체와 유족 분들이 말씀하는 것은 4가지”라며 “시민단체가 이곳을 직접 운영했으면 좋겠다는 것과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 접근성을 강화하고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통해 인권의식 도약 장소로 활용됐으면 좋겠다는 것, 고문피해치유센터를 설치하는 것 등”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정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시민단체와 협의해 뜻에 부합할 수 있도록, 공간이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박종철 열사 영정 앞에 선 경찰청장
이날 이 청장 등 경찰청 지휘부는 오전 10시55분께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했다. 경찰청 버스를 타고 온 이 청장 등 지휘부는 곧바로 5층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은 과거 이곳에 끌려왔던 이들의 위치감각을 상실케 하는 나선형 계단과 세계인권선언 조항이 전시된 일반계단이 있었지만, 이 청장과 지휘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5층에 도착한 이 청장은 아무 말 없이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다가 숨진 509호 조사실을 향했다. 조사실 앞엔 국화꽃이 준비 돼 있었다. 이 청장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꽃을 들고 조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故박종철 열사 영정사진 앞에 선 그는 헌화했다.
31년 전 박종철 열사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인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자백하지 않고 경찰의 물고문을 버티다가 결국 숨졌다. 당시 치안본부장(경찰청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단순 쇼크사로 묻힐 뻔했던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다행히 세상에 알려져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박종철 열사에 대한 추모를 마친 이 청장은 1985년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고문이 끌려와 고문당한 515호 조사실에도 들렸다. 515호에 대한 경찰관계자의 설명을 들은 후 이 청장과 지휘부는 센터 4층에 있는 박종철 추모전시실로 향했다. 전시실 앞에는 방명록 등이 비치돼 있었지만, 이 청장은 별도의 기록을 남기진 않고 곧바로 전시실 안으로 향했다. 이 청장은 추모전시실에 전시된 박 열사와 6월 항쟁에 대한 기록을 살폈다. 이 열사의 약력과 생전의 사진 앞에서 20여초 동안 머물기도 했다.
전시까지 모두 살핀 이 청장은 전시실 안에서 소감 및 방문취지를 밝혔다. 그는 “최근 영화 1987을 통해서 많은 국민들이 30여년 전 6월 항쟁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며 “저희 단체도 영화를 관람하며 과거 경찰의 잘못을 성찰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권 경찰로 거듭나기 위해 31주기 추도식에 앞서 이곳을 찾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됐다”고 말했다.
또 이 청장은 건물 이관과 관련해 실정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시민단체와 협의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기본적으로 국가건물이기에 무상임대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며 “이러한 법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가면서 시민단체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여러 가지를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시 같은 곳도 시민단체가 기구를 만들어서 하는 경우도 있고, 구체적인 것은 그분들과 만나서 조율해 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언제 만날 계획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마석 모란공원에서 추도식이 있다. 행사를 마치고 나서 협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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