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섭 2018. 0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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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출몰 이상행동 뒤 안락사
세계 60마리뿐, 서식지 확대 시급
» 러시아 연해주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에 있는 표범의 땅 국립공원은 야생 한국표범의 유일한 서식지이다. 신갈나무 원시림 아래 한국표범이 쉬고 있다. 표범의 땅 국립공원 제공.
2015년 5월 8일 러시아 연해주의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야생 한국표범(아무르표범) 한 마리가 도로변에 있었는데, 다가가는 사람이나 자동차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감각해 보였다. 공원 관리자가 마취총으로 호랑이 센터로 데려왔다. 몸 상태는 비교적 나쁘지 않았지만 물과 먹이를 전혀 먹지 않아 인위적 급식과 수액 주사를 놓았다. 극진한 돌봄과 치료에도 표범은 뒷다리가 심각하게 수축되는 등 상태가 나빠져 25일 인도적인 목적에서 안락사시켰다.
한국표범은 표범의 아종으로 지구에서 가장 희귀한 대형 고양잇과 동물이다. 한때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부와 러시아 연해주에 널리 분포했지만 현재는 중국 지린 성 국경지대와 가까운 러시아 연해주의 한 지역 7000㎢에서 60마리 이하의 단일 집단이 명맥을 잇고 있다.
» 한국표범 서식 범위. 분홍색이 역사적 서식지, 노란색이 현 서식지이다. 한반도에선 일제강점기 동안 600마리가 넘는 표범을 ‘해로운 짐승’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잡았다.
공원 당국과 미국 야생동물 보전협회(WCS) 등의 과학자들이 부검과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사인을 확인한 결과 2살 난 이 암표범은 개홍역 바이러스에 감염돼 극심한 신경증을 앓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야생 한국표범에서 개홍역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결과는 과학저널 ‘야생동물 질병 저널’ 1월호에 실렸다.
개홍역은 개뿐 아니라 너구리 등 중형 야생동물이나 사자와 호랑이 등 대형 포식자까지 감염시키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는 1994년 사자 무리가 개홍역에 걸려 전체의 45%인 1000마리 이상이 죽었다. 2000년 이후에는 연해주의 한국호랑이(아무르호랑이, 시베리아호랑이)가 개홍역에 잇따라 걸리기도 했다. 당시 감염된 호랑이도 이번 표범처럼 대로변을 어슬렁거리다 교통을 마비시키는 등 비정상적인 신경증 증상을 보였다(▶관련 기사: 시베리아호랑이가 위험하다, 개 때문에).
연구 책임자인 나데즈다 술리칸 표범의 땅 국립공원 과학자는 “표범에서 검출한 바이러스는 야생 아무르호랑이에서 우리가 진단했던 감염원과 유전적으로 비슷했다. 그러나 이번 감염은 개나 오소리·여우 같은 흔한 야생동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야생동물 보전협회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연구자들은 또 그동안 10마리의 한국표범에서 확보한 혈청 표본을 분석한 결과 2개에서 개홍역 바이러스의 항체가 검출돼, 이 질병이 이미 한국표범에 퍼져 있음을 확인했다.
» 연해주의 마지막 표범 집단이 질병 등 새로운 위협에 멸종되지 않으려면 서식지를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 표범의 나라 국립공원 제공. 아무르표범 및 호랑이 보전 연맹(ALTA·알타) 제공.
한국표범은 서식지 감소와 먹이 동물 고갈, 밀렵 등에 의해 급격히 개체수가 줄어들었다. 소규모 개체군은 감염이나 환경변화에 더욱 취약하다. 연구에 참여한 마틴 길버트 미국 코넬대 수의학자는 “육식 동물의 수가 감소하면 질병 발생 같은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 더욱 큰 위험에 놓인다. 번식 집단이 워낙 작기 때문에 몇몇이 질병에 걸려 죽더라도 집단 전체가 생존이냐 멸종이냐가 달라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표범을 감염시킨 개홍역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 모른다. 술리칸은 “바이러스의 출처를 알아야 백신을 접종하거나 표범이 감염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며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백신 접종 등 단기적 대책을 넘어 표범을 지키는 길은 서식지를 넓혀 질병 위험 자체를 낮추는 것이다. 타티아나 바라노프스카 표범의 땅 국립공원 소장은 “기존 표범의 서식지를 확대하기 위해 중국 당국자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비록 질병과 다른 위협이 닥치고 있지만 현재 계획되고 진행되는 사업이 표범의 미래를 지켜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표범이나 호랑이가 종종 개를 잡아먹는데 이 과정에서 개홍역이 옮을 수 있다”며 “그러나 개를 풀어놓고 기르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백신 접종 등 관리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Nadezhda S. Sulikhan et al, Canine Distemper Virus in a Wild Far Eastern Leopard (Panthera pardus orientalis), Journal of Wildlife Diseases, 54(1), 2018, pp. 170–174, DOI: 10.7589/2017-03-065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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