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개정에 부쳐
농한기다. 예부터 이 시기를 농한기라고 불렀다. 천자문에 나오듯 추수동장(秋收冬藏)하고 별 할 일이 없어진 계절이다. 하지만 요즘 농민들은 그렇지 않다. 철없는 딸기나 오이들을 재배하느라 여념이 없고 축산은 늘 그렇게 바삐 움직여야 하고, 과수는 겨울 작업들이 줄지어 기다린다. 그러니 논농사를 짓는 농민이라 할지라도 농한기가 있을 수 없다.
그래도 농한기다. 그래선지 요즘 농민들의 일상은 교육이다 토론회다 해서 바쁘기는 제철보다 더 바쁜 게 현실이다. 그중 하나가 ‘농민헌법제정’ 관련한 교육과 토론들이 힘차게 일고 있는 것이다. ‘농민헌법’이라니.... 웬 헌법이 ‘농민헌법’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하고 의아스러울 것이다. 다른 게 아니라 촛불정부가 헌법이 너무 낡아 개정한다고 하니 이번 참에 농업·농민부분의 권리조항도 헌법에 명토박아 넣자 라는 것이다.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농자천하지대본’
세계적 농민운동가이자 민중운동가인 고 정광훈 전 전농의장은 농민들의 위치를 ‘등외국민’이라고 규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업화이후 농민들의 권익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삶은 피폐화 됐다. 농업정책은 농민들을 땅에서 몰아내는 정책들로 일관되고 오히려 국가발전의 걸림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쌀값 몇 푼 더 올려주시오”. “보조금 쪼깨 더 주시오”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한판 판을 벌려야 한다고 주장 하시곤 했다. 언제까지 ‘등외국민’으로 살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농민이라면 외딴 산골 마을에서부터 들판동네에 이르기 까지 ‘농민헌법’ 열풍이 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농민들의 권리는 어디에서도 보장해주지 않고 있어 불만이 많았던 터였다. 헌법이 최초 제정된 이래 농업·농민부분의 어디도 헌법을 개정한 예가 없음은 물론이다. 박정희가 유신 이후에 헌법에 추가조항을 넣었으나 이는 산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므로 농민의 권리적 측면에선 악법이 되고 말았다. 세상의 변화가 괄목상대(刮目相對)로 달라졌는데 농민권리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만 형국이지 않는가.
‘김영란법’이 제정되고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개정요구가 속출했었다. 국회는 일부농민들이 주장하는 ‘김영란법’의 개정을 밀어부쳐 속전속결로 개정안을 타결하고 말았다. 마치 그것이 농업을 살리는 길이라도 되듯이.... 그러나 그것은 헛다리를 긁은 국회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내비친 것과 다름없다. 오히려 무너져가는 농업과 농민들의 현실적 문제와 국가전체의 이익을 위한 농업철학을 바로 세우는, 농업적 가치와 농민적 권리를 담보할 수 있는 헌법개정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임했어야 한다.
촛불로 이룩한 촛불정부에서도 일 년이나 기다렸지만 이렇다 할 농업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60년이나 꼬여버린 농업정책을 가닥지 잡아 실마리를 한꺼번에 풀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칭 로드맵은 나와야 하는데 로드맵을 짜야할 기관까지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농업·농민에 대한 철학의 부재로 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촛불정부조차도 농업에 대한 식견과 철학은 부재한다. 당장의 소득보전의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안전한 농산물의 안정된 공급체계를 구축하도록 기본적 틀을 새로 만들어 내야한다.
농사를 천시하는 것은 교육의 문제다. 딸내미가 대학 들어 갈 때 기억이 선하다. 나는 딸내미를 농업대학에 보내고 싶어 농업대학을 추천했다. 솔깃해 했던 딸내미가 풀이 죽어 들어와선 애들이 책상을 치고 웃더라는 것이다. 선생님도 의아해 하고. 결국 아는 몇 분의 교수님들하고 의논도 했지만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며 한사코 말리는 것이다. 결국 딸내미는 학교의 명예와 관련된 대학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농업의 현실이고 현실을 바탕으로 한 교육이다. 우리 농업이 망해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농업·농민 천시에 있다. 봉건시대의 유물인 사농공상의 문제도 한몫을 했겠지만, 농사는 뼈심으로 만드는 것이다. 누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허리가 휘는 중노동을 즐길 것인가? 그렇게 해도 장(醬)값이 모자란다는 것이 농사이고 보면 농사일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할 수도 없다. 이렇게 중노동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 바쁘니 농사를 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연유는 국가가 농업을 경시하고 농업 철학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데 있다. 전통적으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사는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로지 공부해서 출세하는 것만 가르치니 이런 교육풍토 속에서 이 나라 식량창고는 거덜이 날 수밖에 없다. 개방화 이후 이는 눈에 두드러지게 그리고 보다 확고하게 자릴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값싼 수입 농산물이 들어오고 우리 식탁에 우리 땅에서 난 먹거리는 22%로 줄어들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확산과 우루과이라운드(UR)에 이은 WTO체제가 구축되면서 농민들에 의해서 계승·발전돼 왔던 필수적인 생산수단인 토지, 물, 종자, 삼림 등은 거대자본인 초국적 농기업의 완벽한 지배하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농산물가격도 시장에 팽개쳐졌다. 만약의 경우 세계적으로 식량파동이 난다면 우리는 자본의 독점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농업의 가치와 농민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는 헌법조항 만들어야
이러한 가운데 유엔에서 농민인권선언이 제출 되었다, 국제적인 농민운동연대체인 라 비아캄페시나(La Via Campesina)에서 나온 제안으로 농민인권이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권과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생태계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하에서 농민인권선언 초안을 만들었다. 비아캄페시나 선언을 모델로 2015년 1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는 유엔농민인권선언 초안을 발표하였다. 30개 조항으로 구성된 초안에는 농민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가 강화되었고 특히 식량, 노동, 사회보장, 적절한 소득에 대한 권리 등의 특정 조항들이 포함되었다.
마침 헌법개정에 대한 논의들이 오가고 올 지방선거에서 묻겠다고 문재인 정부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무엇을 바꾸는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권력구조나 바꾸고 말 것이라는 비아냥도 들린다. 지금 논의 되고 있는 헌법개정은 촛불정국 이후에 나타난 문제로 이를 잘 반영해야한다. 문제는 권력구조보다 국민의 기본권 확장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도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확장에 초점을 맞추어야한다. 농민은 소외받는 등외국민이 된지 오래 되었다. 그것이 촛불시민이 요구하는 시대적 반영이다. 유엔 농민인권선언에서 보듯이 세계사의 흐름이 사람에게 맞춰지는 것도 그런 이유라 생각한다.
‘헌법1조’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 곳곳에 반영되어야 한다. 농민권리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권력이 농업을 말아먹고 농민을 수탈 했다면 이제 농업이 농민이 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나라 경제발전이 농업과 농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농민들의 권리가 제한되고 왜곡되어 제대로 설수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낸 피와 땀의 결과물이다. 결국 농업의 가치와 농민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는 헌법조항의 개정과 신설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헌법 121조 경자유전의 원칙이 있다. 제대로 된 농지분배도 아니었지만 농지분배 후 꾸준히 농민들은 소작화로 달음박질쳤다. 농업환경변화로 경지면적이 늘면서 소작을 하지 않는 농민이 없을 정도로 소작화는 심각하게 진행 되었다. 또 비경작 농지소유도 가파르게 상승해 전체 농지의 절반이 비경작자들 소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됐다. 농지가 농민의 손을 떠나 비경작자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농업포기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지난 정부나 국회의 행태를 보면 비경작자의 손을 들어주기에 급급했던 정책들을 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헌법개정 논의에서도 예외 없이 경자유전의 원칙을 삭제하려는 세력이 있다. 농업에 대한 몰이해가 부른 참사이며 농민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농민들의 힘으로 반드시 경자유전을 기본으로 하는 헌법이 만들어 져야한다.
농민을 보호해야한다며 만든 그 잘난 농지임대차보호법은 농민을 보호한다기보다는 농지 소유자의 손을 들어주는 법이고 300평 이상 도시민들이 경작을 허용 소유하게 하는 법도 기실 비경작자 농지소유의 길을 열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봉이 된지 오래 되었다. 농민들은 뻔히 알면서도 겨자를 먹을 수밖에 없는 가여운 처지다. 소유농지가 적으니 변화된 농업환경에 맞추려면 경작지 확보에 사활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소작지도 경쟁이 생기고 토지소유주의 경작을 대행한 것처럼 관을 속이는 게 관행이 돼버렸다. 소작 농민들 50%는 직접지불금도 받지 못하고 농지소유주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막지 못한다. 2009년 직접지불금파동으로 한 차례 정화되는가 싶더니 그것도 그 순간을 벗어나니 그만이다. 오히려 비경작 토지소유를 당연시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스위스 헌법 104조를 살펴보면 제1항에 농업의 역할과 기능 즉 농업정책의 목적에 대해 규정 한바 가). 국민에 대한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 나). 자연자원의 보전 및 경관의 보전 다). 전국토에 걸친 분산적 인구정착. 2항은 국가의 농민에 대한 지원의무를 규정하고 제3항에는 농업의 다기능성을 보장하고 그 보상으로 직불금등 농가소득보전의무 친환경 친생태적 생산방식의 장려와 농업지원 및 토지소유의 안정화정책을 규정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베네수엘라, 등의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네팔 등 세계 100여개 국가들도 헌법에 분명히 농민의 권리와 노동의 권리 식량주권 등이 명시 되어있음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농업의 가치는 생명이다. 농사를 통해 만들어진 인류의 먹거리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리여야 한다. 이것이 교역의 대상으로 된 것은 하늘의 이치를 벗어난 일이다. 이로써 인류는 굶주리는 자와 배부른자로 나뉘어져 불안과 갈등이 증폭 되는 것이다.
이경해 열사는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농산물이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죽어갔다. 농산물이 잉여가치를 발생하면 한쪽엔 농산물이 썩어가고 한쪽은 굶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정책에 반영하지 못하고 더 큰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정부는 정부의 자격이 없다. 아무리 급해도 지속 가능한 농업만큼은 제대로 보장이 되어야 한다. 이제 농업과 농촌, 농민문제는 헌법이라는 최고법 지위에 못 박아야 한다. 헌법 명령으로 국가에게 농업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강제해야 한다.
이경해 열사는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농산물이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죽어갔다. 농산물이 잉여가치를 발생하면 한쪽엔 농산물이 썩어가고 한쪽은 굶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정책에 반영하지 못하고 더 큰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정부는 정부의 자격이 없다. 아무리 급해도 지속 가능한 농업만큼은 제대로 보장이 되어야 한다. 이제 농업과 농촌, 농민문제는 헌법이라는 최고법 지위에 못 박아야 한다. 헌법 명령으로 국가에게 농업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강제해야 한다.
농민헌법은 농민만을 위한 법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농업을 보장함으로 이 나라 식량주권과 국민전체의 건강권을 지키는 최고의 가치이며 보루여야 한다. 그것은 생명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며 미래를 향한 가치를 확대하는 길이다. 그것을 통해 농민들은 자신의 생산활동과 생산물의 정당한 대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