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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3일 월요일

"한국 경제, 온탕 속 개구리처럼 죽어간다"

[인터뷰] "한국 경제, 온탕 속 개구리처럼 죽어간다"
2016.05.24 07:21:14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 "현재, 2008년 경제 위기와 유사"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문제."

지금 진행 중인 해운 및 조선 산업 구조 조정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그래서 만난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학교 교수)의 대답이 이랬다.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게다. 다양한 정책을 조합해서, 그나마 나은 길을 찾아가는 선택지가 있을 뿐이다.

문제가 오로지 해운 및 조선 업체 세 곳, 즉 현대상선, 한진해운, 대우조선해양뿐이라면, 조금은 자신감을 보여도 된다. 어느 정도는 답이 보인다. 김 소장 역시 한국 경제가 이들 세 업체의 부실 처리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최상위 기업 일부를 제외하면, 재무 상태가 안정적인 기업이 드물다. 구조 조정 도마 위에 올라야 할 기업이 앞으로도 많으리라는 이야기다.  

경기 순환이 사라진 상황 역시 답을 찾기 힘들게 한다. 한국 경제의 성공 방정식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경기 하강 국면에서 좀비 기업들이 정리된다. 추위를 견디고 살아남은 기업은 경기 상승 국면에서 폭발적인 성장 기회를 잡는다. 그러다 거품이 심하게 낀 기업은 곧 이어지는 경기 하강 국면에서 사라진다. 이 시기를 견딘 기업은, 새로운 경기 상승 국면에서 그간의 부실을 털어낸다. 삼성전자 등 성공한 기업은 이런 오르막내리막 곡선을 잘 활용한 경우다. 

그런데 2011년 이후, 한국 경제는 그냥 직선이다. 경기 순환 곡선을 그리는 통계청은 지난 2011년 8월 정점을 찍은 뒤 지금까지 저점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오르막 곡선의 꼭짓점을 표시했는데, 5년 가까이 지나도록 내리막 곡선의 꼭짓점을 어디에 찍어야 하는지 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이는 한국 경제의 과거 성공 방정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파른 내리막이 있어야 부실 기업을 쉽게 정리할 수 있다. 가파른 오르막이 있어야, 손실을 메우고 성장할 수 있다. 2010년대 이전까지 한국 경제는 내리막과 오르막이 모두 가파른 구조였다. 이런 환경이 한국 기업의 특징을 규정했다.  

하지만 경기가 직선을 긋는 상황은, 정부 관료, 기업 경영자, 경제학자 모두에게 낯선 환경이다.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방식, 기업 경영진이 신규 투자를 결정하는 방식이 모두 변해야 한다. 새로운 방식은 아직 찾지 못했는데, 위기 신호는 쌓이고만 있다. 김상조 소장은 "온탕 속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1년 반 사이에 30대 재벌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졌다. 이제는 그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30대 재벌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질 것이라는 게 김 소장의 전망이다. 이렇게 천천히 죽어가는 게 훨씬 괴롭다. 대책 마련도 더 힘들다.  

김 소장과 가까운 경제학자들은 최근 그를 "한국의 루비니"라고 부른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학교 교수는 대표적인 비관론자다. '닥터 둠(Dr.Doom)'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요즘은 낙관론자 찾기가 더 힘든 때 아닌가. 비관론자가 한 명 더 늘어난 게 대수인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 소장이 "한국의 루비니"가 된 건 의미가 각별하다. 김 소장은 그냥 큰 그림만 보는 학자가 아니다. 거대 담론 대신 기업 회계 자료를 들여다본다. 법률과 시행령을 꼼꼼하게 살핀다. 이런 일을, 20년 넘게 해 왔다. 숫자와 법률,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므로, 그는 늘 신중한 편이었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문제"라는 말은, 그의 이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단정적인 표현을 꺼린다. 그런데 이제 비관론을 이야기한다. 아울러 '정치의 역할' 등 큰 이야기를 자주 한다.  

왜 그럴까. 김 소장을 지난 17일 한성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났다. 해운 및 조선 산업 구조 조정 이야기로 시작해서 "한국의 루비니"가 된 까닭에 이르기까지, 이날 나눈 대화를 간추려 정리했다.  

"한국형 양적 완화, 이름 잘못 붙여서 생긴 혼란이 심각"

프레시안 : 정부가 '한국형 양적 완화'를 추진한다. 지난 4.13 총선 당시 새누리당의 선거 공약이었는데, 여당이 선거에서 지면서 물밑에 잠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걸, 박근혜 대통령이 끄집어냈다.  

김상조 : 잘못된 네이밍(Naming, 이름 붙이기)에 따른 혼란이 심각하다. 지금 진행되는 건, 산업은행 및 수출입은행 등 국책 은행에 대한 자본 확충이다. 양적 완화라는 거창한 표현은 부적절하다. 다행히 정부도 최근에는 '국책 은행 자본 확충'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게 맞다.

"5조~10조 원 쓰면 끝나는 문제인가?" 

프레시안 : '양적 완화'는 아예 불필요하다는 건가.  
▲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김상조 : 그 이야기는 뒤에서 하자.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총선 당시 거론한 '한국판 양적 완화'는 지금 이야기되는 것과 논의 범위와 초점이 모두 다르다.

일단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하는 문제부터 정리해보자. 그게 뭐라고 보느냐에 따라 필요한 자본 규모와 자본 조달 방식이 각각 달라진다.

문제가 현대상선, 한진해운, 대우조선해양 등 세 업체의 부실 처리라면, 정부 재정으로 해결하는 게 옳다. 하지만 누구도 그게 문제의 전부라고 보지 않는다. 이들 세 업체의 부실 처리 비용으로 5조~10조 원쯤 쓰면, 끝나는 일인가. 그 정도 부담은 한국 경제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는 일이 아니라고 보니까 문제가 복잡해진다.
 
이번에 국책은행의 증자를 하고나서, 얼마 뒤에 또 새로운 재원 조달 방식을 찾아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재원을 찾고. 이렇게 매번 편법으로 시간 벌기에만 급급하다 결국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것. 그게 걱정이다.  

"2008년 위기와 닮았다편법으로 일관한 정부"

많은 이들이 지금 상황을 1997년 IMF 외환위기와 비교한다. 내가 볼 땐, 오히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와 더 비슷하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시시각각 치솟았다. 하루에 100원씩 오르기도 했다. 자칫하면, 1달러에 2000원까지 갈 뻔했다. 마침 그때, 미국, 일본, 중국 등과 통화 스왑을 하면서 빠르게 진정됐다. (통화 스왑 : 두 나라가 자국통화를 상대국 통화와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자국통화를 상대국에 맡기고 외국통화를 단기 차입하는 중앙은행 간 신용계약이다. <편집자>) 

2008년 9월부터 2009년 1월까지, 위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를 돌아보면, 지금과 닮은 점이 많다. 당시엔 건설업 부실이 심각했다. 그래서 2008년 10월, 이명박 정부는 건설업 구조 조정을 시작했다. 당시 건설 업체에 돈을 빌려준 금융사, 즉 '대주단'과 건설사의 협약(대주단 협약)을 통해 이뤄졌다. 현재 해운업체들에게 적용된 자율 협약과 비슷한 것이다. 법적 근거가 없어서 사후 감시·평가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얼마 뒤, 부실 건설 업체에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자금을 대출한 저축은행의 부실이 물 위로 떠올랐다. 그러니까 정부는 예금보험 기금에서 돈을 빼서 쓰기 시작했다. 원래 예금보험 기금에는 칸막이가 돼 있다. 저축은행, 시중은행 등에 대해 각각 보험료가 따로 쌓여 있다. 그런데 저축은행 보험료만으로 부족하니까 시중은행 보험료를 가져다 썼다.

"문제를 잔뜩 키운 뒤에야 국회로 갔다" 

이렇게 원칙 없는 대응으로, 문제가 풀렸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2008년 10월경에는 건설 업체와 저축은행의 부실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정부는 관치금융 방식으로 금융기관의 팔을 비틀어서 급한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에 들어서자 부실이 시중은행으로까지 확산됐다. 그러니까 정부는 은행자본 확충 펀드를 만들었다. 은행 후순위채 등을 매입해 자본을 확충해주는 펀드다. 그래도 시장이 불안정하니까, 채권시장안정펀드, 증권시장안정펀드를 만들었다. 당시 채권시장안정펀드에 한국은행이 돈을 댔다. 정부가 쓸 수 있는 돈은 모두 가져다 쓰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유사 공적자금인데, 감시로부터는 벗어나 있다.

그래도 문제는 풀리지 않았었다. 결국 정부는 2009년 1월 구조조정기금과 금융안정기금을 조성했다. 부실이 건설과 저축은행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미 해운 및 조선 산업의 부실이 심각하게 거론됐었다. 산업 전체를 바라보면서 구조 조정을 해야 했는데, 그러자면 그때그때 펀드를 만드는 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대규모 기금을 조성해야 했다. 그러면 국회와 감사원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감시에서 벗어난 자금을 대규모로 조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국회에서 공적자금법을 개정했다.  

요컨대 정부는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편법으로 시간만 벌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 확대됐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국면이 된 뒤에야 국회 논의가 시작됐다.

"해운 및 조선 구조 조정은 정부 재정으로" 

지금도 똑같다. 관료들은 절대로 국회에 찾아가지 않으려 한다.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대신 중앙은행 멱살 잡고 밀실에 들어가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한국은행법 64조, 65조를 읽어보면, 한국은행이 지원하는 게 기술적으로도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다. 설령 한국은행이 지원한다고 해도, 어차피 자본 확충이 필요한 상황은 또 닥친다. 그때마다 편법으로 넘기면, 문제는 계속 커지기만 한다.  

다시 정리하자. 해운 및 조선 산업 구조 조정에 따른 국책 은행 자본 확충 문제는 정부 재정으로 해결해야 한다. 추가경정예산 편성, 증세 등의 조치가 여기 포함된다.

"선제적 구조 조정은 공적 자금으로" 

하지만 자본 확충이 필요한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것이다. 결국 큰 규모의 선제적인 구조 조정을 해야 하는데 여기엔 돈이 많이 든다.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이건 공적 자금 조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정부가 지급 보증한 채권을 발행해서 조달하는 게 공적 자금이다. 부실기업으로 흘러가는 돈이므로, 상환되지 않는 돈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건 결국 재정으로 메워야 한다. 재정, 즉 국민의 세금이 쓰일 것이므로 국회 동의 절차가 필요하다. 2009년 조성한 금융안정기금을 앞서 언급했다. 그걸 활용하면 수십 조 원까지 확보할 수 있다. 

▲ ⓒ매일노동뉴스(정기훈)


"실업 대책은 정부 재정으로거제, 울산에 공공 인프라 짓자"

그 다음에는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개별 기업의 구조 조정이 진행되면, 가계와 지역에 충격이 온다.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줄어든 사람들이 생기니까. 여기에 대한 대책은 공적 자금 투입으로 마련할 수 없다. 공적 자금은 기업과 가계에 직접 전달되는 게 아니다. 일단 은행으로 흘러간다. 은행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니까 구조 조정 충격에 대한 대책 마련은 결국 다른 재원으로 해야 한다. 다시 정부 재정이다. 다만 여기서 바로 사회안전망 확충 문제로 건너뛰는 데 대해선 신중해야 한다. 사회안전망은 전 국민에게 적용돼야 한다. 따라서 한번 도입하면 돌이키기 힘들다. 그러니까 논의 과정이 길고 복잡하다. 그런데 구조 조정의 충격은 당장 급한 일이다.

예컨대 거제와 울산의 대형 조선소에서 곧 실업자가 대거 쏟아질 수 있다. 실업 급여를 확대하는 등의 대책으론 어림없다. 일반적인 의미의 사회안전망이 아닌,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 여기에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 거제와 울산 지역에 꼭 필요한 공공 인프라 건설 사업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조선소 사내 하청 노동자가 하는 업무는 건설업과 닮은 점이 많다. 그걸 고려한 대책이다. 물론 한계 역시 분명하다. 실업자를 완전히 흡수하긴 어려울 게다. 따라서 다른 대책이 곁들여져야 한다. 다양한 정책의 조합(Policy Mix)가 필수적이다.

"양적 완화, 위기 대책으로 남겨둬야" 

그래도 남은 문제가 있다. 예컨대 중국 경제가 경착륙한다고 하자. 하필 그 시기에 가계 부채 문제가 터졌다고 하자.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앞서 언급한 '양적 완화'는 그때 해야 한다. 최후의 수단인 양적 완화를 정부가 엉뚱한 상황에서 꺼내는 바람에 논의가 꼬여 버렸다. 양적 완화란 중앙은행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범정부, 범정치권 차원의 합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중앙은행에 양적 완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양적 완화를 실시한 모든 나라가 이런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런 과정을 무시했다.

다만 위기 상황에서 양적 완화에 대한 폭넓은 합의가 이뤄진다고 해도, 과거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이 했던 방식은 찬성하지 않는다. 한국의 원화는 국제 교환성이 없는 탓에, 미국, 일본 식 양적 완화를 하면 부작용이 심각할 수 있다. 대외 교역에서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양적 완화를 해야 한다면, 선별적 방식이 옳다고 본다. (외환 관리를 받지 않고, 미국의 달러화 등 주요 국가 통화와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화폐를 '경화(硬貨, 하드커런시(Hard Currency))'라고 한다. 예전에는 금과 교환되는 화폐만을 '경화'라고 했으나, 지금은 보다 폭넓은 뜻으로 쓰인다. 한국의 원화는 '경화'가 아니다. 국제 교환성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화폐를 쓰는 국가가 무리하게 통화 공급을 늘리면(양적 완화), 환율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편집자)  

"부실 책임 규명과 구조 조정, 동시에 하려면…" 

프레시안 : 공적 자금 조성에 대한 논의를 하자고 했다. 여기에 대해선 관료들의 거부감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김상조 : 맞다. 한국이 공적 자금을 두 번 조성했다. 1997년 외환위기, 그리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직후다. 그런데 두 번 모두 청문회를 했고, 관료들이 불려 나갔다. 관료 입장에선 추가경정예산 편성보다 공적 자금 조성이 더 싫은 선택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정치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정치권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공적 자금 조성이 필요한 상황은 구조 조정을 할 때라는 말이다. 실무 측면에선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야 한다. 한편으론 부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선 미래를 내다보고 부실을 정리한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종종 같은 사람이 하게 된다는 점이다. 과거 부실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 구조 조정 실무자가 된다. 결국 둘 다 안 하게 된다. 자기에게 책임 묻는 일을 열심히 할 리가 없다. 과거 부실에 대한 책임 규명과 미래를 내다본 구조 조정은 서로 맞물려 있으므로, 구조 조정 실무도 소홀해진다.

"여야정 협의체가 책임 범위 정해줘야"  

이 문제는 관료 스스로 풀 수 없다. 정치권이 나서서 책임의 범위를 정해야 한다. 머리 가르마를 타듯, 경계를 정해줘야 한다. 예컨대 산업은행 부실 문제라면, 역대 수장에 대해선 단호하게 책임을 묻되, 지금 실무를 담당한 이들은 오로지 구조 조정 업무에만 매진하게끔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져야만 구조 조정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방식, 즉 책임 규명을 전제로 자금 지원을 하는 방식으론 아무 것도 못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다면 책임 규명과 자금 지원 사이에 경계를 정해야 하는데, 이런 결정을 누가 할 수 있나. 정치권 외에는 없다. 여당, 야당, 정부가 만나는 여야정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다.

아울러 내가 '정치권은 구조 조정에서 손을 떼라'는 식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유다. 정치권 등 외부 개입 없이 기업이 자율적으로 하는 구조 조정이 더 효율적인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때 이야기다. 시장 기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려면 '예측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다들 '복지부동'한다. 지금 시장에 없는 게 바로 '예측 가능성'이다. 그걸 부여하는 건, 결국 정치의 역할이다. 책임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재원 조달은 어떻게 할 건지 등을 여야정 협의체가 정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 참가자들이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

"1980년대 S&L 파산 처리에서 배우자"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미국 사례를 되짚어봤다. 미국은 1980년대 S&L(Savings and Loan Association, 저축대부조합) 파산 사태로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미국은 이걸 어떻게 해결했나. 크게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책임에서 자유로운 다른 기관이 문제를 처리하게끔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문제, 과거 책임 규명과 구조 조정 실무를 같은 사람이 담당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한 조치다. 두 번째는 아주 길고 끈질긴 책임 규명이다. 책임 추궁을 결코 한 번에 끝내지 않는다. 정교하게 책임 소재를 따지는 작업이 10년 가까이 진행됐다. 이 두 가지는 앞으로 한국에서 진행될 구조 조정 작업에도 큰 시사점을 준다고 본다.

다만, S&L(저축대부조합) 파산 사태 당시 미국 사회가 보여준 저력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는 사라져버렸다. 모두가 공범이 돼버린 탓이다. 책임에서 자유로운 주체를 찾을 수 없다. 다들 공범이니까 정교하게 책임을 묻는 절차도 사라졌다. 결국 '양적 완화'로 곧장 달려갔다. 미국의 퇴화 조짐이라고 본다. 한국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의 미국이 아니라 1980년대 S&L 파산 사태 이후의 미국에서 배울 점을 찾아야 한다.

"대우조선해양, (주)대우 방식으로 쪼개자" 

프레시안 : 산업 구조 조정을 오로지 재무적인 관점에서만 진행해야하는지는 의문이다. 조선 산업 구조 조정을 놓고서도 비슷한 논란이 인다. 산업의 특수성을 무시한 구조 조정은, 장기적인 경쟁력을 망친다는 게다.  

김상조 : 어려운 문제다. 산업의 경쟁력은 구조 조정 이슈와는 별개로 봐야 한다. 조선 산업의 과잉 설비를 잘라내면(구조 조정 하면), 그 혜택이 한국 기업에게 오나. 그렇지 않다. 한국과 '치킨 게임'을 하고 있는 중국 기업이 혜택을 본다.  

이렇게 보면, 대우조선해양을 통째로 법정관리에 넘겨서 문 닫게 하자는 건, 어리석은 소리다. 물론, 부채 비율이 4000%(연결 기준)를 넘긴 대우조선해양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과거 김우중 회장이 이끌던 대우 그룹이 망했을 때, (주)대우 등을 정리했던 방식을 참고할 수 있다. 당시 (주)대우를 세 개로 쪼갰었다. 경쟁력 없는 부문은 한데 모아서 청산했다. 나머지는 둘로 나눴다. 각각 대우인터내셔널과 대우건설이 됐다. 대우조선해양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정리해서 각각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고 본다.  

"삼성중공업에 국민 세금 들어가면 이재용 자리 못 지켜"

일부 경제지는 대우조선해양을 정리하자고 한다. 의구심이 드는 주장이다. 배후에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이 있다고 본다. 이들 두 회사에게만 좋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또 이른바 조선업 빅 쓰리(Big 3 :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를 한 덩어리로 취급하는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다. 현대중공업은 다른 두 업체보다 수준이 높은 기업이다. 총수인 정몽준 회장 탓에 경영이 어려워졌지만, 경쟁력이 탄탄하다. 일각에선 삼성중공업의 부실을 털기 위해 국민 세금을 쓸 수 있다고도 한다. 그 역시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만약 그런 상황이 되면, 이재용 부회장은 자리를 지키기 힘들다. 사회적 비난이 엄청날 것이다.

"현대, 동부, 두산, 한화, 한진…미래 어둡다" 

프레시안 : 김 소장이 이사로 있는 경제개혁연구소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연결재무비율 분석> 보고서를 꾸준히 내고 있다. 이걸 보니까, 한국 경제의 미래가 참 어두워 보인다.

김상조 : 지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주요 그룹의 재무 자료를 분석해서 연결부채비율 및 연결이자보상배율을 계산했다. 이걸 보면, 3년 연속 빨간불이 들어온 그룹은 예외 없이 해체됐다. 금호, 동양, 대한전선, STX 등이 그렇다. 지금 위험 신호가 켜진 그룹은 현대, 동부, 두산, 한화, 한진 그룹 등이다. 이들 역시 그룹이 사라지거나, 규모가 확 줄어들 것이다. (연결부채비율이란 기업 집단의 계열사를 포함해 부채 총액을 자기 자본으로 나눈 비율이다. 계열사간 출자와 내부 거래를 제거한 연결 기준을 적용하므로 그룹 단위 재무 건전성을 파악하기에 좋다. 

연결이자보상배율이란 연결 기준으로 구한 이자보상배율이다. 이자보상배율은 기업이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돈(영업 이익)이 그해에 갚아야 할 이자 비용에 비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이자보상배율이 1미만이라는 건, 한 해 동안 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는다는 뜻이다. 김 교수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그룹들은 이 두 가지 지표가 모두 나빴던 경우다. 편집자)

"중국 경제, 9월 G20 회의 이후가 불안하다" 

프레시안 : 김 소장이 동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한국의 루비니"로 불린다고 들었다. 중국 경제의 경착륙 위험, 가계 부채의 심각성에 대해 예민하게 살핀다고 알고 있다.
▲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김상조 : 중국이 과거 한국이 겪었던 IMF 외환위기 수준의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건 경착륙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중국 경제가 올해 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다 3, 4월 들어 반등했다. 그게 좋은 징조라고 보지 않는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구조 개혁을 포기한 측면이 많이 작용했다고 본다. 중국 기업의 부채는 더 쌓였다. 올해 9월, 중국 항저우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중국 공산당의 특성을 고려하면, 그때까지는 지금 기조를 유지하리라고 본다. 문제는 그 이후다. 구조 개혁을 계속 미루면서, 올 연말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하필 그때, 집단 대출 만기가 대거 돌아오면서 가계 부채 문제가 불거지면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비관론을 자주 이야기하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내가 조금 지나치게 비관적인 전망을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 나름대로 의도가 있다.

"비관론 강조하는 까닭" 

해운 및 조선 산업 구조 조정이라는, 돈으로 치면 5조~10조 원짜리 문제를 푸는데 정부는 정공법 대신 편법을 택했다. 이렇게 문제를 뒤로 넘기기만 하다가, 진짜 큰 문제, 방금 언급한 위험한 상황이 터지면 그땐 어쩔 건가 싶다. 계속 편법만 쓸 건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정치권이 역할을 해야 한다. 여야정 협의체가 원칙을 확인하고 가이드라인을 잡아줘야 한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비관론 이야기를 자주 한다.  

물론, 한국 경제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이유는 이밖에도 많다. 2010년대 들어서 한국 경제에서 경기 순환이 사라졌다. 대단히 위험한 신호다. 통계청도 인정했다. 경기 순환이 없으니까, 경지 사이클의 저점을 어디에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다. 예전엔 반대였다. 한국은 매우 굴곡이 심한 경기 순환 곡선을 그렸다. 경기가 나쁠 때는, 그저 수명만 이어가는 좀비 기업들이 대거 정리됐다. 살아남은 기업은 경기가 좋아졌을 때, 밤샘 조업을 하면서 부실을 털고 도약한다. 삼성전자 등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더 크게 성장한 기업들이 대개 이런 식이었다. 경기 순환 흐름을 잘 탔다. 반면, 이런 흐름을 제대로 못 탄 기업은 위상이 추락했다.

"죽어야 할 기업은 죽지 않고, 산 기업은 기회 못 잡는 경제"

그런데 이제는 굴곡이 사라졌다. 그냥 직선이다. 한국 경제에선 처음 있는 일이다. 죽어야 할 기업이 죽지 않는다. 살아남은 기업은 성장 기회를 못 잡는다. 온탕 속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길이다. 경기 사이클이 위로 향하는지, 아래로 향하는지 구별하지 못하는 침체 국면, 성장이 멈춘 상황이 지금이다.  

여기에 중국의 위협이 겹쳤다. 앞으로 겪을 위기가 1997년 외환위기와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1997년에는 재무적 구조조정만 하면 됐다. 지금은 산업 전체를 봐야 한다. 중국 변수까지 고려해서 산업을 재편해야 한다. 훨씬 어려운 문제다. 당연히 고용 문제가 불거진다. 이걸 정부 재정만으로 풀기는 어렵다. 다양한 정책 조합이 필요하다. 재정의 역할, 공적 자금의 역할을 각각 규정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이런 결정은 정치권 외에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중국 경제의 경착륙 가능성을 인정하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6개월 남짓이다. 하필 그 시기가 19대 국회가 끝나고 20대 국회가 시작되는 때다. 정치권이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답답하다.  

"천천히 망하는 게 더 괴롭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30대 그룹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1년 반 동안 문을 닫았다. 앞으로 전개될 위기 양상은 다를 것이라고 본다. 30대 그룹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사라질 것이다. 다만 천천히 망해갈 것이다. 그게 더 고통스럽다. 최상위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역시 전망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한성대학교 교수로 부임했을 때가 1994년이었다. 그때 입학한 학생들이 4학년이 되니까,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당시 생각이 자주 난다. 그 뒤로 지금까지 학생들은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린다. 아무리 열심히 '스펙'을 쌓아도 취업이 안 된다. 대학 시절 내내 놀아도 취업이 쉬웠던 우리 세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 세대가 지닌 생각의 관성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진보 진영이 흔히 갖고 있는 관성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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