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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일 화요일

"'장'자 붙은 자 다 죽여라", 이승만 정부의 광기


16.02.02 20:58l최종 업데이트 16.02.02 20:58l




지난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나는 신기철 선생과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한국의 과거사정리에 참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명박정권에 의해서 '폐업처리' 되자 졸지에 40, 50대 가장인 신기철 선생과 나는 실업수당 한 달 80만 원으로 4, 5인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구직자'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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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춘 시간> 책표지
ⓒ 인권평화연구소
지난 2011년 2월 추운 겨울, '구직자' 신기철 선생이 누런 봉투를 하나들고 '구직자'인 나를 찾아왔다. 불기라곤 하나 없는 차디찬 우리 집 온돌방에서 손님을 맞았다. 그가 건네 준 누런 봉투에는 따듯한 군고구마가 아니라 그가 막 펴낸 뜨끈뜨끈한 책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가 들어있었다.

부인과 딸 셋을 둔 가장이 그 추운 겨울 '구직자'로 지내면서도 책을 쓰고 펴낸 정성과 정열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그가 건네 준 뜨끈뜨끈하게 막 나온 책이 어느 따듯한 군고구마보다도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 후 신기철은 들판에서 책 세 권을 더 썼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전쟁범죄> 그리고 이번에 쓴 책은 <멈춘 시간 1950: 못다 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이야기>가 그것이다. 

<멈춘 시간>을 쓰기 위해 신기철은 지난 2014년과 2015년에 과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하지 못했던 민간인 학살자 유족들을 면담했다.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그는 경기지역 고양과 김포, 광주, 용인을 비롯해 강원지역 홍천, 충북지역 충주, 보은, 옥천, 충남지역 대전, 공주, 부여, 서산, 태안, 전남지역 영암, 순천, 경북지역 상주, 경남지역 합천지역을 자비를 털어서 쏘다녔다. 

<멈춘 시간>은 지난 2년 동안 신기철이 만났던 99명의 증언을 기초로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의 고의적 국가 범죄에 의해 희생당한 민간인학살 사건을 시간과 성격에 따라 구분해 소개하고 있다. 신기철은 말한다. 

"(학살)희생자들에 대한 유가족들의 기억이 멈춘 곳, 그 곳에서 시작된 아픔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 다른 비극의 재발이 멈추도록."

그렇다! 또 다른 비극의 재발을 멈추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다음은 <멈춘 시간>의 저자 신기철 선생과 지난 한 달 간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99분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들을 상대로 전국을 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책까지 내셨는데 시간과 비용이 꽤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부지런히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 동력이 어디서 오나? 
"위안부 할머니들께서도 한 분 두 분씩 돌아가시고 계시지만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도 마찬가지다. 반성해야 할 소중한 기억들, 진실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사라진 지금 과거 4년 동안 조사된 자료들을 꺼내보는 것도 불가능하고 국가가 해야 할 후속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민간에서라도 추진해야 한다. 나는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고양금정굴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받은 승소금으로 마련된 재단이다. 비록 작은 규모의 재단이지만 전국유족회 회원들의 도움으로 조금씩이나마 작업을 진척시키고 있다.

- 대한민국의 소위 '국부'라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한국전쟁 기간 자국민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학살한 이유나 동기가 어디에 있다고 평가하는가?  
"나는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의 수립을 기점으로 국가의 억압이 본격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신생 정권의 안정을 위해 억압적인 정책을 폈다고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정권이다 보니 생긴 현상이라고 본다. 

영호남 지역에서 벌어진 토벌작전은 물론이지만 충청이나 경기지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는 데 주목했다. 대량 살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 마을을 초토화시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대규모 연행이 곳곳에서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학살당한 주민들도 여럿이 있었다. 이때 총살을 피해 연행당한 주민들이 형무소로 가든가 아니면 국민보도연맹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친일파 중용을 반대한 자국민들을 상대로 학살 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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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신기철, 학살지 금정굴 현장에서
ⓒ 신기철

- 항일운동세력이 강했던 충남 부여군 장암면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 주민들이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 정부를 반대했고, 이는 곧 부여경찰서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부여군 장암면의 경우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 중용을 반대한 자국민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인 것인가?
"부여 장암면의 피해는 토벌작전식 대규모 연행이었는데, 유족들의 증언을 듣다보면 마치 식민주의자들이 아프리카에서 벌였던 노예사냥과 비슷한 모습이 연상되었다."

- 한국전쟁 전 국군의 토벌작전 시기 10만여 명, 전쟁 직후 재소자 3만여 명과 국민보도연맹원 34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런데 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이승만 정권은 추가 부역자처벌 대상자를 55만 명으로 보았다.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이미 반정부 세력의 씨를 말려버린 지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곱절도 넘게 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단지 3개월 만에 어떻게 55만 명의 추가 '빨갱이'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1950년 8월 부산에서 수복을 준비하던 이승만 정권은 수복할 경우 처단할 대상들에 대해 결정했다고 한다. 미군 CIC자료를 보면 그 지휘를 미군이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미군이나 이승만 정권이나 입장이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노동당, 내무서는 물론 산하 대중단체와 행정단체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물론 다 죽이라고 적어놓은 것은 아니겠지만 인천상륙 배 위에서 "<장>자 붙은 자는 다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증언들을 보면 미군 문서의 '처단"은 곧 '살인허가'를 의미했다고 본다.

고양지역의 경우 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해 선출된 주민이 549명이었다. 이 사람들이 이른바 <장>자 붙은 사람들이었을 테고 여기에 소속된 회원들과 서기나 교원 등 교육과 행정사무원들을 합치면 아마 1천여 명이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 가족들이 대신 희생되었다는 것에 있다. 당시 지자체를 200곳으로 보고 단순 계산해도 이승만 정부가 55만 명을 처단대상으로 봤다는 말이 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정말 나쁜 정부였다."

이승만에게 100만 민간인 학살은 곧 장기 집권의 수단

한국전쟁 기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약 100만 명의 한국 민간인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당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희생자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승만은 약 100만 명의 자국민들을 그렇게 대량학살 했다고 보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출범한 이승만 정권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 전에 이미 10만 명에 이르는 국민들을 학살했다. 거기에 놀라운 일은 이러한 극단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1950년 5․10선거에서 이승만 정부가 대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한 달 조금 지나 전쟁이 났다. 우연도 이런 우연은 참 드문 일이 아니었을까.

아마 전쟁이 나지 않았더라도 이승만 정부는 쿠데타를 통해 장기 집권을 관철했으리라 본다. 어쨌든 전쟁은 이승만에게 반대세력을 절멸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승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전쟁 발발일 공포된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주목한다. 어떻게 전쟁 발발 당일 기다렸다는 듯이 부역자 처벌에 관한 법을 가장 먼저 신속하게 공포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이 법령은 마치 학살의 신호탄처럼 작동했다. 

이승만은 후퇴하면서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일으켰고 수복하면서 다시 부역혐의 사건을 일으켰다. 그 뒤 결국 이승만은 1952년 부산에서 친위쿠데타에 성공하게 된다. 이승만 정부에게 100만 학살은 곧 장기 집권의 수단이었다. 물론 전시 지휘권을 장악한 미국의 지휘 아래 벌어진 일이었다." 

최근 소송에서 사법부는 형무소사건 학살 희생자들에 대해 일반 민간인 희생자에 비교해 위자료의 금액을 삭감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법부가 위자료의 금액을 삭감하는 논리적 근거가 무엇인지? 그런 사법부의 논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법원의 지침에 의해 일괄적으로 그동안 학살 희생자 본인의 위자료를 8천만 원으로 판결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형무소 재소자의 경우 6천만 원으로 삭감했다. 좌익 활동을 한 사실이 판결문으로 확인되었으니 그만큼을 공제하겠다는 발상인 것이다.

형무소에 가두었던 사형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절차에 의하지 않고 임의로 형을 집행할 수 없는 것은 상식이고 명백한 불법이다. 일반 재소자의 경우는 어떨까? 이들을 살해하는 것은 반인륜적인 학살행위임이 또한 명백하다. 심지어 석방일이 넘은 사람들까지 학살했가. 여기에다 무슨 이유를 더 달 수 있겠나?

나는 사법부의 이런 논리는 '이념적 증오'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합리적 근거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증오는 주관적 감정이지만 사회적으로 형성될 때는 '유대인 학살'이나 '인종청소'처럼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된다. 한 번 처벌받은 사람은 두 번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장 잘 아는 사법부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으로 법관의 자격이 없는 행위다."

이승만 정권의 식량수탈, 일본보다도 심해

- 지난 1949년에 이승만 정권의 국가폭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 희생자들이 도대체 어떤 처지였기에 65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학살 희생자들을 동정보다는 증오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70년 전 일제에서 해방된 분들이 분단을 상상이나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해방소식조차도 일부 지식인들을 제외하고 일반 시민들 대부분은 나중에 알았다. 분단의 경우는 더 했다. 어떻게 남북이 갈릴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해방되고 1년이 미처 지나지 않아 미군정은 북이나 남로당을 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북을 적으로 규정하는 사회규범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시 한국 국민의 95%가 좌익에 동조했다는 미군 측 보고가 있다.

그런데 실제 문제는 훨씬 첨예했다. 일제경찰들이 그대로 경찰이 되었고, 식량수탈은 일본보다도 심했다. 대구 10월항쟁이나 여순사건의 발단도 지역 경찰의 만행에서 비롯되었고 호남의 추수봉기도 식량수탈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각자들이 앞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이 분들 대부분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게 학살당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앞에 부여 장암면의 사례처럼 노예사냥처럼 잡혀갔던 사람들이 심한 고문으로 조작되어 국가보안법 위반범죄자가 되었던 것이다. 제주는 물론 여수 순천이나 산청 함양 등 영호남 곳곳에서 잡혀 온 분들도 대부분 마찬가지 사정이었다.

이런 사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가해자의 자기합리화 논리다. 피해자들보다 가해자 자신들이 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괴상한 논리를 말한다. 이거 환장할 노릇이다. 사죄하기는커녕 자신들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면서 피해자들을 더 증오하는 논리다. 나는 우리 사법부의 태도가 이와 똑같다. 배상금 때문에 나라 재정이 휘청댄다고 하는데 이것은 객관적 입장에 있어야 할 사법부가 할 말은 아니다."

- 학살 대상자 중에는 가해자들에게 돈이 나 쌀을 뇌물로 주고 간신히 학살을 면한 분들도 있고 정말 쌀 한 톨, 돈 한 푼 없어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학살의 현장에서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었나'?
"당시 학살의 과정에는 몇 개의 단계와 이를 집행하는 각 계층이 있었다. 맨 위에는 정책결정자가 있고 맨 아래에는 정보제공자와 연행자들이 있었다. 위에서는 할당명령을 내리고 아래에서는 이를 채우는 것이다. '재판 없는 처형'이다보니 규칙보다는 관계가 결정적이었고 그 관계는 돈에 의해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좋은 말로 실무자에게 준 '자율성', '실무적 권한'이었겠지만 그것이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었고 엄청난 권한이었다. 그리고 그 특권은 먹이사슬에 의해 나뉘어 상납되었다. 살기 위해 소를 한 마리 주었다느니 논을 한 마지기 주었다느니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알아서 공정하게 처리해 주려니 앉아서 기다리다가는 호되게 당하는 모습은 오늘날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권리 위에 잠자는 자"라는 말을 이런 경우까지 적용하겠나? 양팔과 다리 다 묶어놓고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정말 비열한 짓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잔재, 여전히 진행형

65년 된 학살 희생자의 유골이 드러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박근혜 정권을 보면서 도대체 우리나라는 어디에서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보는지?
"이거 참 어려운 질문인데, 사소한 욕심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진보학계조차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박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근대 한국사회의 과제를 반봉건, 반제국주의, 반독재로 정리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반봉건의 과제는 어지간히 극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극복했는지, 독재정권의 반인륜 범죄를 극복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잘 아시다시피 친일파는 단 한 명도 청산하지 못했다.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회복 문제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니겠나? 그들이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들의 문제나 독재정권에 의한 수많은 학살 사건들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사과하는 듯 하지만 돌아서선 비웃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국가배상은 누구의 돈으로 했나? 학살자들이 한 것이 아니다. 고문 살해자들이 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름아래 똑같은 피해자였던 시민들이 낸 세금이다. 가해자인 이승만의 재산에, 박정희의 재산에, 전두환의 재산에 정부가 피해자들을 위해 구상권을 청구해 본 적이 없다.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진보세력이 언젠가 정권을 잡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어떤 집단이 집권은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할 것 같다. 힘들고 긴 싸움이어서 미래 세대의 성장까지 내다보는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 학살 희생자 유족들은 연로한 분들이 많다. 이 유족들의 건강이 더 악화되기 전에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생겨서 국가폭력에 대해 꼭 새로운 진실규명조사를 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국가의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연로한 유족들이나 인권단체들이 국회나 정부를 상대로 2기 진실화해위원회 설립을 위해 서명운동이나 캠페인 등을 하고 있는지?
"지금은 서명운동이나 캠페인의 단계는 지난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인 움직임은 아니지만 경산코발트광산사건 유족회를 중심으로 특별법 서명운동이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경주유족회나 여수유족회에서도 개별 특별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런 개별법안 외에도 지난 2012년부터 여러 개의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지만 다뤄지지 못하고 서랍 안에서 잠자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4월 총선거가 치러지고 새로 국회가 구성되면 다시 개정안을 제출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유족 분들이나 관련 단체들 입장에서는 지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의 후속작업과 새로 나타난 유족들에 대한 조사 과제가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각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해당 조직을 정비하고 역할을 조정하여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 은폐시도, 상당 부분 성공

- 99명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들과 장장 몇 년 간에 걸쳐서 개별 인터뷰를 하고 꼼꼼히 기록해 가면서 감회와 소감이 많을 것 같은데...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당시를 직접 경험하신 분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1930년생 정도 되셔야 직접 경험을 들을 수 있는데, 이런 분들께서 올해 만 86세가 되신다. 어쩌면 이제는 많은 진실이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싶다. 이는 반대로 이승만 정부의 사악한 시도, 곧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들을 영원히 은폐하려던 시도가 상당 부분 성공한 것을 의미한다.

이번 인터뷰에선 사건 당시 유복자였거나 갓난아이였던 분들이 많았다. 이 분들에겐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존재를 상상조차 못해 본 분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분들이 전쟁고아였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전혀 다르다. 

군인들의 자식이 아니라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자식이다, 전사한 국군이 20만 명 정도이고 학살당한 민간인이 100만 명 정도였음을 고려한다면 짐작이 갈 것이다. 내가 조사하면서 만난 분들 동생들은 살았을 경우 대부분 고아원으로 간 뒤 생이별 했다고 한다. 해외로 입양된 사례도 많았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상식은 대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게 되지만 가공된 것이 너무 많다."

- '재판 없는 총살' 은 전쟁범죄였고 재판에 적용된 법령은 위헌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이에 대해 사과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에게 사과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가해자 측의 입장을 두둔하는 경우는 두 가지로 나눠지는 것 같다. 하나는 학살 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인정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는 경우다. 앞의 경우는 '학살이 정당했다'는 것이고, 뒤의 경우는 '학살을 인정하겠지만 내 잘못은 아니다'는 것이겠다.

결과야 결국 똑같겠지만 나는 현재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문제를 둘러싼 박근혜 정부의 입장을 보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 정부의 입장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정부의 태도 변화야 물론 할머니들과 수많은 인권운동가들의 투쟁 때문이다. 

나는 박근혜 정부가 자신들의 입장을 1950년 당시 가해자의 입장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일본이 중국 난징학살 사실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잔혹한 학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유민주주의나 민족, 인권 등 건국의 이념이 모래 위의 집처럼 붕괴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나는 학살 사실의 인정이 우리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 저자 신기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다녔으며 금속노동자로 구로 영등포 등 서울남부지역 노동운동에, 1997년 지역공동체운동으로서 고양지역 시민운동과 진보정당운동에 참여했다.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사건의 진실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 사건의 재발방지, 인권과 민주주의의 확대, 평화사업을 추진 중이다. 저서로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전쟁범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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