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숙 칼럼] 농민은 죽고 세프만 산다?
행복한 농사를 꿈꾸며 씨앗을 넣던 백남기 농민이 지금도 병원에서 삶과 죽음의 어름을 헤매고 있다. 이 정권 누구도 나서서 미안해하거나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는 상황을 두고 나라가 아니라는 장탄식이 나오는 세상을, 죽지 못한 농민들이 살아내고 있는 세월이다.
참 선한 눈빛으로 밀 파종을 하면서 밀싹이 돋아난 파란 고향들판을 생각했을, 그것으로 세상이 선해지기를 욕망했던 철없는 농부는 지금 병상에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징을 울리며 동네를 돌며 복을 빌며 액을 쫒는 '설'이 돌아왔으니 신명나게 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민족의 대명절 '설'이 다시 돌아왔다. '설'이 지나고 나면 가정파탄이 늘어난다는 재미있는 보고가 있다. 지지고 볶는 전통적 농경가족 관계에 서툰 현대인들이 참는 법을 잊고 살다보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대명절이라는 미사여구로 '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떤 연유가 있기 때문일까.
한 해 농사의 시작인 설
'설'은 사실 입춘과 관련이 있다. 입춘은 농경과 끊을 수없는 관계가 있다. 농경사회는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야말로 모든 먹고 사는 문제의 출발이 담겨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요즘의 취업시즌과 같다고 해도 될성부른 것이다.
입춘은 지구 황도가 320도로 돌아간 상태로 기온이 서서히 올라가는 시기다. 태양력으로는 이미 일 년을 시작해 한 달이 넘어간 상태이지만 지구로 보면 비로소 긴 겨울을 지나 일 년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입춘과 음력 일 년의 시작인 '설'은 며칠 차이로 나타난다. 입춘과 '설'은 약간의 오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농경민족의 일 년의 시작이고 농기구를 손보고 장만해야하는 즉 농사를 준비 하는 시점이다.
실제 '설'은 보름날까지 기간이다. 지금은 설날 전후로 공휴일로 지정해 3일간 쉬도록 하고 있지만 농경시대엔 보름이라는 오랜 시간을 '설' 연휴로 즐겼다. 특히 이 기간 머슴들은 일을 하지 않았다. 보름날 오곡밥을 먹고 나서야 나무를 아홉짐 한다고 했으니 보름간의 긴 시간을 쉬면서 봄을 맞이하는 것이다. 오고가는 손님도 서두를 일이 없다. 어른들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것도 보름날까지 해도 무방하다. 음식도 보름까지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떡국을 설날 아침에 한 그릇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오면 무조건 오곡밥을 하는 보름 전까지 떡국을 끓이는 것이다. 가래떡이 딱딱해질 정도까지 먹고 또 먹는 것이 떡국이다.
'설'이 민족의 대명절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농사가 잘돼야 세상이 탈나지 않는 법, 풍흉을 점치고 농사준비에 부정 타는 일 없도록 치성을 드리고 몸을 추스른다. 그런 의미의 '설'이기에 농경민족인 우리들에게 큰 명절이 아닐 수 없다.
쓰러진 백남기 농민과 TV에 넘쳐나는 요리쇼
현대에 와서 민족의 대명절은 이만저만 비틀어진 게 아니다. 산업사회로의 이동이 잘 살게 된 것으로 착각들 하지만 사람은 없고 자본만 판을 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상생은 없고 경쟁만이 자리잡은 세상은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람이 상해나가기 쉽다. 그렇게 상한 사람이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백남기 농민이 저렇게 석 달 가까이 병원에서 의식조차 되돌리지 못한 채 누워있어도, 병원 앞에 엄동을 나는 농민들이 백남기를 살려 내라고 소리를 쳐도 TV에선 자막 하나도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음식을 만드는 이른바 '세프'들은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고 설탕이 어쩌고 소금이 저쩌고, "얼마나 맛있게요"를 외치며 살판이 났다. 생산자는 사라진 소비만 있으니 자본만 과대하게 비춰주는 꼴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가는가. 무생물이면서 스스로 자기증식이 가능한 자본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실로 인간은 무서운 괴물을 만들어놓았다.
그 결과는 인간소외, 노동소외로 나타난다. 노동의 가치가 인간을 빠트린 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니 일회용 나무젓가락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세상이다. 더욱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도록 법을 고치라며 종주먹을 대고 있는 대통령의 꼴을 보라. 오로지 자본만이 살길이라며 사람들을 다그치며 현혹하는 자본성장지상주의 권력의 전형적 모습이 아닌가.
농경문화의 생산적 문화, 농민적 문화는 모두 사라지고 소비적 문화가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소비만이 강조되는 '설'이 되어버렸다. 선물은 얼마가 좋고, 백화점은 어디가 좋고, 택배는 얼마나 늘고, 젯상은 얼마가 들고 하는 언론보도로 '설'이 채워지는 것은 우리의 삶을 유감스럽게도 돈의 사슬 속에 가두어 두려는 자본의 교묘한 책략 때문이다. 하다못해 어린아이들도 마음에서 우러난 어른존경의 세배를 드리는 것보다 세배돈 때문에 형식적인 절을 하게 되는, 젯밥에만 정신을 팔게 되는 것이다. 어른에 대한 존경이 돈의 크기에 좌우되는 슬픈 자본주의적 사고는 자승자박이 되어가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쌀값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려하는 정권에 대해 그것이 '언 발에 오줌 누기'로 나중에는 동상 걸린 발목을 잘라내야 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그러나 경고의 목소리는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 되었고, 당장 할 이유도 사라진 밥쌀 6만 톤의 수입은 결정났다. 더구나 TPP에 뒤늦은 승차비로 또 얼마간의 농민들의 울음을 바쳐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문제는 정치다. 이번 설 술안주는 총선이 될 것이다. 안주로만 삼을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우리의 삶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자세로 총선을 바라봐야 한다. 새누리당 모 국회의원이 한말이다. "당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국회의원을 만드세요." 뼈에 사무치는 말이다.
농경민족의 손에서 농사가 사라진다는 것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사는 협동과 상생을 지속적 생명을 만들어온 우리들의 삶이요 문화다. 오늘 아침, 민족의 대명절인 '설'이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할 것인가.
귀여재에서 새해 설날 아침 한도숙 독자들께 세배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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