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이채훈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지난 1월 세월호 유가족들은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절규했다. 세월호와 관련한 MBC의 왜곡 보도에 항의하려 모인 것이었다. 기자수첩에 끼적이기도 어려웠던 혹한 속에서 이채훈 전 MBC PD는 유가족의 절규를 몸으로 듣고 있었다. 유달리 슬픈 눈을 하고서.
지난주 다시 만난 이채훈 PD는 아이 같이 해맑은 눈빛이었다. 그는 콧소리를 내며 클래식 서적을 탐독하고 있었다.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이것저것 뒤적이던 그가 말했다. “그땐 참으로 슬펐죠. MBC 앞인데 정작 MBC 사람들은 유가족 옆에 나타나지 않았지요. 미안하니까 나와 보지도 못했겠지만, 정말 미안했다면 밖으로 나와 ‘미안하다’고 했어야 옳지요. 그게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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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훈 전 MBC PD가 지난 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 (사진= 김도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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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은 해직 언론인이다. 2012년 파업 과정에서 해고됐다. 최승호 PD, 이용마 기자 등은 해직 언론인으로서 기억 속에 있지만, 이채훈은 어느덧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고, 그는 가해자로 낙인찍혔다. 법원으로부터 징역형(집행유예)을 선고받고, 그 이유로 MBC에서 해고된 뒤 조금씩 잊힌 것이다.
드러나진 않아도 그는 끊임없이 기고를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했고, 우울한 시대의 우리를 위무해왔다. 그 결과물이 최근 두 편의 책을 통해 완성됐다. <ET가 인간을 보면?>은 시대를 딛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 인간을, <클래식 400년의 산책>은 위로와 용기를 주는 클래식 음악을 다뤘다.
슬픈 눈의 이채훈은 상상 속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클래식을 설명할 때면 아이 같은 눈을 하고 있었고, 현실의 모순을 얘기할 때면 어떤 인터뷰이보다 뜨거웠다. 그가 생각하는 클래식과 인간의 내면은 무엇인지 제대로 들어봤다.
- 최근 클래식 입문 서적 <클래식 400년의 산책>을 써 냈다. 본인은 어떻게 음악에 입문했는지 궁금하다.
“누나의 영향이 컸다. 저보다 9살 위 누나였다. 대학 졸업해서 1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누나가 클래식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클래식이 친숙했다. 누나가 남기고 간 LP를 들으면서 ‘클래식이 위대한 유산이구나’ 깨달았다.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그러면 음악을 왜 포기했나.
“아버지가 반대하셨다. (웃음) 법대 가길 원하셨다. 독학으로 음악을 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음대 진학을 포기하고 인문대 쪽으로 갔다. (이채훈 PD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넥타이 차고 일하는 데는 싫었고, 그러다 보니 MBC에 입사했다. MBC 다니면서 클래식 프로그램을 꽤 했다.”
- 다루던 악기가 있었나.
“피아노 독학하다 포기했다. 집에서 피아노를 안 사줬다.(웃음) 당시 피아노 있는 집이 많지 않았다. 집에 피아노 있는 친구에게 ‘너희 집 피아노 좀 치게 해 달라’고 했더니 컨닝을 요구하더라. 그게 들통 나서 먼지 털리듯 맞았던 기억도 있다.(웃음) 헨델은 12살 때 독학으로 시작해서 오르간 거장이 됐다. 나도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는 얘기였지.”
- 학창 시절은 군사정권 때였다. 클래식을 탐닉하기 어려운 시대 아닌가.
“고등학교 때 이미 레디메이드(Ready-made) 인생, 주어진 길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 안 간다고 땡깡을 부린 적도 있다. 막판 되니까 겁나서 대학 시험을 보게 됐다. 음악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게 1972년 유신 때였다. 대학에 진학한 1978년은 유신 말기다. 대학교 3학년 때 5·18이 일어났다. 친구들은 광주 학살에 대한 분노, 살인자가 대통령이 된 현실에 대한 분노로 급진적이 됐다. 음지에서 마르크스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반면 나는 키에르케고르, 도스도예프스키에 미쳐 있었다. 그러면서 혼자 클래식 음악 많이 들었다. 죄책감도 있었다. 이게 무슨 사치란 말이냐, 자기 분열 같은 느낌도 많이 받았고, 굉장히 오래갔다. 클래식 좋아한다고 말도 꺼내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 엄혹한 군부 독재 시절인 1984년 MBC에 입사했다. 1987년엔 MBC노조가 탄생했고.
“적극적으로 노조 결성 등에 참여했는데, 그때도 어디 가서 클래식 좋아한다는 소리는 못했다. 1999년부터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하면서 제주4·3, 여순사건, 보도연맹 사건을 취재를 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동료가 그랬다. ‘엄중한 시기에 너는 무슨 모차르트냐’라고. 쉽게 반박을 할 수 없었다.”
- 지금은 클래식 전도사 아닌가.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다른가.
“뻔뻔스러워졌지.(웃음) ‘좋은 건 모든 사람이 다 들어야 한다’는 주의다. 1989년에 만난 시인 김정환 형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시 그는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의장으로, 우리 노조와 교류가 있었다. 그분 집에 놀러갔는데, 모차르트를 듣고 있더라. 그는 ‘노동자들이 모차르트 들으면 안 되냐? 좋은 건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더라. 이 말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 분 말씀이 맞다는 걸 곧 깨닫게 됐다. 정환 형, 참 대단한 사람이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만 좋은 음악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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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훈 著, 클래식 400년의 산책. 1: 몬테베르디에서 하이든까지, 출판사 호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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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대중이 클래식 음악에 접근하는데 한계가 있지 않나.
“클래식이 돈과 시간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그런 생각은 봉건 시대의 유물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활약한 시민 혁명 시기 이후 클래식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했고, 부조리 현실을 타개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됐다. 한국 전쟁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민간인에 대한 연민, 함께 아파하는 마음, 이런 것과 통할 수 있는 게 클래식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은 공감이니까.”
이채훈 PD의 대표작은 한국 근현대사를 고발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다. 제주4‧3, 여순사건, 보도연맹 등 기존 방송이 다룰 수 없었던 소재가 그의 손에 의해 제작, 방영됐다. 그는 만들면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이 제작진에게 오롯하게 전달돼서다.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당시의 얘기를 듣고 싶다.
“내가 잘 했다기보다 정길화, 곽동국, 김환균, 한홍석 같은 훌륭한 동료들이 같이 열심히 한 결과물이었다. 비극의 현대사를 다뤄보자는 얘기는 1988년부터 계속 있었다. 하지만 간부들의 자기 검열이 심했다. 1999년, 김대중 정부 들어와서야 할 수 있게 됐다. 만 7년 동안 100편 정도하고 충분히 하지 않았나 하고 접었는데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현대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을 위해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대중적으로 계속하는 방법을 더 고민하지 못한 게 무척 아쉽다.”
- 제작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피해자의 트라우마가 전염됐다. 억울하게, 비인간적으로 희생된 이들이 많았다. 그런 증언과 현장을 직접 경험했고, 아픔을 몸으로 느꼈다. ”취재 다니다가 죽어야지“ 생각이 여러 번 들더라. 보도연맹 같은 경우는 우리 윗세대는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게 제일 무서웠다. 감추어진 역사, 입을 열면 다치는 역사였다. 역사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 제작한 것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들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런 다큐가 없어지니까 역사 왜곡을 일삼는 극우들이 득세하고 있지 않나? 이승만을 국부라고 하는데, 그만큼 무고한 인명을 많이 살상한 사람이 없다. 김동춘 선생이 <대한민국 잔혹사>라는 책에서 ‘비명령적 명령’이란 말을 썼는데, 모든 학살은 이승만이 명령 안 하는 체 하면서 실제로 모두 명령한 것이다. 이런 사람을 국부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학살 책임자를 국부라 부른다면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 클래식 다큐가 치유가 됐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하면서 트라우마 입고, 클래식 다큐멘터리 하면서 치유를 하고, 이게 되풀이 된 것 같다. MBC에 감사할 일이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현대사, 클래식 두 상반된 장르는 결국 뿌리가 같았던 것 같다. 함께 아파한다는 것, 공감한다는 마음은 같은 것 아닌가.”
이채훈 PD는 클래식 다큐로 유명세를 떨쳤다.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 <비엔나의 선율, 마음에서 마음으로>, <정상의 음악가족 정트리오>, <21세기 음악의 주역 장영주> 등 화제의 음악 다큐는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클래식 다큐를 만들 때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클래식 음악 얘기를 꺼내자 그는 앳된 미소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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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부터 방영됐던 MBC 시사다큐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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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히 좋아하는 연주자가 있나.
“간단한 질문이 아닌데….(한참 고민하더니) 우크라니아 출신 발렌티나 리시차(42, Valentina Lisitsa)라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네 차례 방한했기 때문에 많이들 아실 거다. 테크닉도 잘 연마했고, 쇼팽이나 모차르트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듣는 이와 교감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다. 연주회 하면 세 시간 이상 청중과 교감하며 피아노의 모든 것을 들려준다. 그녀가 연주회 하면 꼭 가서 보시라. 절대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테니까. 과거의 연주자는 누가 있을까… 녹음 기술이 크게 발전한 1950년대 후반 굉장히 뛰어난 음반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은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년 9월15일 - 1962년 2월17일)다. 그가 지휘한 곡들은 인간애가 넘친다. 피아니스트로는 비슷한 시기 베토벤 전곡을 녹음한 빌헬름 바크하우스(Wilhelm Backhaus, 1884년 3월26일 - 1969년 7월5일)의 베토벤 전집이 떠오른다. 그는 호탕하고 열정적인 베토벤의 특성을 잘 살렸다. 쇼팽을 근사하게 연주한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 1887년 1월28일 - 1982년 12월20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질서 있게 연주하면서도 섬세한 루바토(rubato, ‘자유로운 템포로’라는 의미)를 잘 살린 쇼팽을 들려주었다. 84살에 베토벤 말기 소나타를 녹음한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 1903년 3월28일 - 1991년 5월8일)도 깊은 내면의 세계를 표현했다. 위대한 연주자들인데 잊히는 게 안타깝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나 같은 늙다리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내가 너무 말이 많았네.(웃음)”
- 서양 클래식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클래식의 역사를 하루라고 한다면, 모차르트 이전은 오전, 모차르트‧베토벤은 정오, 그 뒤 낭만시대부터 20세기말까지 오후라고 본다.(웃음)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시민 계급의 진보성과 혁명성이 정점이던 18세기 말-19세기 초, 이 시기에 활동했다. 인간 지성이 만개한 시절이랄까. 20세기 무조 음악(조성調性이 없는 음악)의 탄생과 함께 클래식 음악이 결정적으로 대중과 멀어졌다. 음악에서 감정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래서 과격하게 이야기하면 ‘클래식은 죽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도 보면 다변화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영화 음악도 있고, 여러 실용 음악도 성장했으니까. 클래식 음악만 본다면 1600년대 나타나서 진화하다가 2000년대 사망하신 ‘위대한 과거 유산’이랄까.”
- 음악 평론하는 데 주안을 두는 게 무엇인가.
“한국의 경우 음악만 보는 경향이 적지 않다. 역사‧사회를 제쳐두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지 않나. 문화·사회적 맥락에서 다 나온 것인데. 그걸 알기 위해서는 인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모든 작곡가들이 사회 속에서 고뇌하며 음악을 만들었다. 사회‧역사가 음악을 규정한다는 식의 결정론적 해석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음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시대가 이렇게 모순으로 가득하고 부조리가 많은데…”
- 한국 클래식만의 느낌이나 특성, 문화가 있을 텐데.
“클래식 전공자의 90% 이상이 기독교다. 굉장히 보수적이다. 음악의 해석 자체나 저변에 깔린 분위기가 꽉 막힌 측면이 있다.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랄까, 조금 더 열려야 할 텐데... 그렇다고 수학 방정식 풀듯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고.(웃음)”
최근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 정명훈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가 고액연봉을 받고 있다, 편법-불법으로 비행기표 값을 유용(사기혐의)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단원에 대한 인사권 전횡 논란도 있었다. 작가 목수정은 정명훈을 “두 얼굴의 지휘자”라고 비판했다. 이채훈 PD는 지난해 미디어오늘 기고에서 ”정 감독은 ‘음악밖에 모른다’는 주술로 악단 운영의 문제점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수퍼갑’의 특권을 누리겠다는 게 아닌가?“ 캐묻는, 정명훈에 대한 공개편지를 쓴 바 있다.
<관련기사 : “음악밖에 모르는” 정명훈 감독의 사퇴를 권한다>
- ‘정명훈 논쟁’에서 정명훈을 세게 비판했다.
“김상수, 목수정씨의 문제의식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나는 그(정명훈)의 고액 연봉에는 관심이 없다. 쌍방이 계약을 체결해서 집행했다면 액수를 문제 삼는 건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다만 정명훈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그는 불투명한 예산집행에 대해 문제제기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음악밖에 모른다’고 했다. 그 말에 화가 났다. 진짜 훌륭한 음악가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위치에 걸맞은 책임 있는 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했는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정 감독은 ‘예순이 되면 일로서의 음악을 그만두고 진짜 음악을 하고 싶다, 내게 피아노는 진짜 음악’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같이 했던 서울시향 음악가들은 뭐가 되나.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거다. 정명훈 개인한테 억하심정이 있어서 비판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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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축하연주를 지휘한 정명훈 지휘자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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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텐데.
“유럽에서 인정받는 음악가가 서울시향을 만 10년 이끌었고 서울시향의 연주 역량을 끌어올려서 음악 팬들에게 좀 더 질 높은 연주를 선보인 건 당연히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뒤에도 ‘정명훈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건 논리에 맞지 않는다. ‘20년 걸릴 일을 10년 만에 하겠다’며 서울시향에 왔는데, 10년이 지났는데도 정명훈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자생성 있는 오케스트라를 만들지 못했다는 얘기다. 결국 정명훈이 부임할 때 내세운 목표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자기모순적 결론이 된다. 올해 말까지 하면 만 10년인데, 그만 하는 게 모양이 좋을 것 같다. 정명훈만한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겠지만, 이제 변화를 모색할 때가 된 것 같다.”
- 기고를 하고 난 뒤 반응은 어땠나.
“따로 살피지는 않았다. 나를 비난하는 댓글이 90%가 넘더라. 정명훈을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니 자연스런 현상인데, 나의 비판도 그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잘 이해해 주지 않더라.(웃음)”
- 현실을 도피하는 데 클래식이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
“개에게 전기충격을 주면 처음에는 깨깽하고 격하게 반응하지만, 이게 되풀이 되면 나중에는 찔러도 무반응이다. 현재 한국 사람들이 딱 이 모습이다. 분노가 쌓이는데 좌절이 되풀이되니까 우울증이 만연하는 것이다. 음악은 이러한 집단적 우울증을 완화시킬 수 있다. 물론 클래식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현실의 문제는 우리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혀야 하겠지. 현실을 떠난 음악은 존재할 수 없고, 어느 경우든 음악이 도피처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클래식에서 위안과 용기를 얻는 게 도피는 아니잖은가.”
인터뷰가 무르익자 조심스럽게 MBC 얘길 꺼냈다. 그는 2012년 파업이 끝난 뒤 그해 말에 해고됐다. 2010년 정릉천에서 일어난 사건이 문제가 됐다. 당시 이채훈 PD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귀가하던 중 굴삭기 유리창에 수차례 돌을 던졌고, 이를 저지하던 인부와 실랑이를 벌였다. 사건 당시 소지하고 있던 소주병으로 인부의 머리를 건드린 게 화근이었다. 굴삭기 수리비를 물어주고 위로비를 지급해 합의했으나 검찰은 그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특별법’으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그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조직폭력배를 다스리는 엄격한 법이 그에게 적용됐고, 그는 최종적으로 ‘폭행 사건의 가해자’가 됐다. 2년 뒤, MBC는 ‘대법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가차 없이 잘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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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훈 전 MBC PD. (사진= 김도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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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언론노조 MBC본부는 “이채훈 PD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줄 생각은 없다”면서도 "이채훈 PD가 파업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자유게시판에 김재철(전 사장)과 임원진의 양심을 촉구하는 글을 여러 차례 올리지도 않았다면, 만약 이채훈 PD가 극우 매체들과 그 선동가들이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현대사 전문 다큐멘터리스트가 아니었다면, 이채훈 PD는 해고라는 극형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 2012년 해고됐다. 당시 상황을 듣고 싶다.
“결과적으로 ‘저를 해고해 주십시오’라고 떠든 꼴이 됐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 일이지. 취김에 ‘4대강 사업 응징’ 퍼포먼스를 한 셈이다. 굴삭기 유리창을 깬 다음에 물어주려고 했던 거다. 인부를 소주병으로 때린 게 아니다. 실랑이가 벌어지자 경찰에 신고했다기에 상황 끝났구나 생각하며 걸어 나오다가 ‘당신이 무슨 짓 했는지 알기나 하라’며 가볍게 톡 건드린 거였다. 피해자가 사건 다음날 병원 가서 확인하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는데, 나중에 검찰이 병원에 연락해서 전치 2주 진단서를 요구했다더라. 소주병 같은 ‘위험한 물건’으로 사람을 치는 건 굉장한 중죄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따라 3년 이상 징역인데, 당시 전혀 몰랐다. 소주병으로 톡 건드린 게 문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힘을 실어서 때린 게 아니었으니까. 혹시 ‘위험한 물건’에 대한 법률을 잘 모르는 분들은 중요한 법률 상식이니까 꼭 알아 두시기 바란다. 나처럼 어리바리하게 걸리는 불행이 없어야 하니까.(웃음) 당시, PD수첩 <검사와 스폰서>와 관련한 재판이 진행 중일 때니까 검찰은 또 얼마나 벼르고 있었겠나. 어쨌든, 당시 MBC의 명예에 누가 된 건 무척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 2012년 파업에 참여하고 경영진을 비판하는 글을 써 해고까지 이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2012년 파업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해고까지 이어지진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겠지. 그런데 약점이 있다고 몸을 사리거나 이런 짓은 못하는 성격이다. 처음에는 고참 PD로서 (노사) 양쪽 의견 듣고 화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양쪽을 모두 만나고 다녔다. 그런데 나중엔 안 되겠더라고. 다시 노조에 가입하고 파업 동참했다. 바로 다음날 대기발령이 떨어졌다. 파업 끝나고 나서 인사위 열어서 해고하더라.”
- 그때 심정은 어땠나.
“잘못은 내가 했는데 처자식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다. 그래서 재심에 가서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풀어주면 또 회사 비판할 놈이다’ 생각했겠지. (이 대목에서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섭섭함이 컸다. 노조에서 조금 도와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폭력범으로 찍힌 마당에 노조에서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초기에는 이 두 가지가 트라우마였다. 1987년 노조 창립 때부터 구속(92년 파업)까지 당하면서 헌신적으로 노조 활동을 했는데 이런 식으로 외면할 수 있나, 솔직히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도 사람이니까.”
- 불명예스러운 해고인데, 많은 것을 잃었을 것 같다.
“두 손에 쥔 것들을 많이 잃은 건 틀림없다. 해고가 됐으니 월급과 학자금이 안 나오잖나. 글을 쓰고 강연을 해도 자녀들의 등록금을 벌기 쉽지 않더라. 하지만 그 덕분에 ‘인간’ 전반에 대해 성찰하게 됐다.(웃음)”
- 그래도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려 했을 텐데.
“시사교양PD들을 비롯한 MBC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다. 그 덕분에 살 수 있었지. 그리고 PD저널이나 미디어오늘에서 글 쓸 기회를 주었고, 뉴스타파와 (재)진실의힘에서도 일을 주었다. 아, 후배들이 PD교육원 전문위원을 하면 어떻겠냐 해서 지금까지 계속 일하고 있다. 월급도 무려 세 자리수를 받는다. 나 백수 아니다.(웃음) 감사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아무튼, 음악과 인간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치유가 많이 된 게 분명하다.”
- 현재 MBC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
“해방 직후 좌우대립이나 한국전쟁과 비슷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웃이던 이들이 서로 총을 겨누고 목숨을 내걸고 싸우지 않나. 현 경영진들도 과거에 나름 노조 활동 참 열심히 했다. 김재철, 이진숙(현 대전 MBC 사장) 모두 내가 만든 노보를 거리에서 뿌리고 다닌 조합원 아니었나. 친하지는 않았어도 서로 호감을 갖고 같은 회사 다니던 선후배였다. 인생이라는 게 이렇다. 간단하지 않다. 이들이 악행을 저지른 것은 맞지만 원래 악한 자는 아니라는 거다. 사람이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을 성찰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누구나 변할 수 있으니 너무 자만하지 말자는 거다. 이런 의미에서 한길을 걷는 언론인 김중배 선생은 귀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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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훈 전 MBC PD는 MBC를 대표하는 시사·다큐멘터리 PD였다. 그는 ”MBC에 남아 있는 동지들과 후배들이 혹독한 시기를 견뎌내고 있다. 나는 MBC 밖에 나와 있지만 여전히 한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진= 김도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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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PD로서 권성민 PD가 해고될 때는 어떤 감정이었나.
“젊은 PD들이 자기 표현하는 걸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감정이 섬세하고, 세상의 부조리에 분노할 줄 아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꼭 좋은 사람만 골라서 자르더라.(웃음) 힘 있는 쪽에서 먼저 포용해야 하는데, 이런 식은 아니다. 성민씨를 해고한 사람은 후배들과 싸우는 못난 선배들이다. 길게 보면, 성민씨에게는 지금의 시간이 거름이 될 거라고 본다.”
- 향후 계획을 듣고 싶다.
“제 깜냥에 맞는, 또 스스로 보람을 느끼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우리나라 모차르트 연구가 황무지 상태다. 내년부터는 거기에 초석을 놓기 위한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 인문학 공부도 계속해야겠지. 이번에 나온 <ET가 인간을 보면?>에서는 인간이 찬란한 기술문명을 이뤘지만 오만과 이기심에 빠져 공존의 지혜를 잃어버렸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앞으로는 구체적인 희망을 만들 수 있는 사회적 통찰을 담은 책을 써야지 생각하고 있다.”
- 입문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음악이 있다면.
“귀에 익은 곡을 재발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드보르작의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는 어떨까? 드보르작은 아이 세 명을 잃은 뒤 그 슬픔을 어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승화시켰다. 세월호 비극과 맞닿아 있다.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모차르트 오페라 ‘편지 이중창’도 좋을 거다. 영화에서 재소자들은 그 노래를 들으며 ‘자유’를 느낀다. 아주 단순한 노래인데, 음악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곡이다. 마지막으로, 2012년 MBC 동지들과 같이 들어보자고 소개했던 곡이 떠오른다. MBC 시니어 노조원들을 가리키는 ‘오라누이’에게 바친 음악, 모차르트 교향곡 17번의 느린 악장이다. 따뜻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우리들의 행진곡, 힘든 시기지만 새 생명은 태어나고, 동지들이 있으니 이 또한 넉넉하지 아니한가라는 느낌을 주는 곡이다. MBC에 남아 있는 동지들과 후배들이 혹독한 시기를 견뎌내고 있다. 나는 MBC 밖에 나와 있지만 여전히 한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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