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영화 <암살>에서 친일파 척결에 나선 안옥윤 속사포 황덕삼(위 왼쪽),
고량주를 따라 죽은 지사들을 추모하는 약산 김원봉(위 오른쪽), 약산 김원봉과 백범 김구(아래)
영화 <암살>에서 일제가 항복한 날, 약산 김원봉은 백범 김구 앞에서 고량주에 불을 붙여 동지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너무 많이 죽었다’면서 “잊혀지겠지요. 미안합니다”라며 비탄한다.
그러나 미안한 것은 조국 동포를 위해 헌신한 그들이 아니다. 영화 속 염석진보다 더 악랄하게 독립군들을 잡아 고문했던 노덕술 같은 친일파에게 약산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 고초를 당하게 한 이 나라다. 이 나라는 해방 후에도 이강국과 염석진과 노덕술의 나라였다.
외세에 기생해 영화를 누린 게 그 개인들만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소외됐던 불교는 일제 때를 반전의 기회로 삼았다. 백용성, 한용운 같은 지사들도 있었지만, 불교 중흥을 명분으로 전투기까지 헌납하며 친일한 이들이 많았다. 3·1운동의 주축이었다가 일제 말 주요 교단들이 신사참배로 생존을 꾀한 개신교는 미군정 이후 미국을 등에 업고 이 땅을 개신교 국가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일제에 가장 협조적이던 가톨릭도 미군정의 수혜로 교세 확장에 열중했다.
그들은 민족이나 나라보다 더 보편적인 진리를 앞세웠다. 그러나 민족 동포와 나라를 버린 채 진리만을 내세운 종교가 있던가. 2천년 전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보면, 알렉산더가 북인도에 침략했을 때 세속을 버리고 나체로 살아가던 고행승마저 격렬하게 저항한다. 로마가 가톨릭을 공인한 것도 국가 지배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고, 루터가 교황에 맞서 개신교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독일 민족주의의 호응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선 단재 신채호가 “왜 조선의 공자, 조선의 석가, 조선의 예수가 되지 못하고 공자의 조선, 석가의 조선, 예수의 조선이 되느냐”고 비판한 ‘식민 종교’가 주류였다. 민족 동포의 해방을 외면한 이기적 종교들이 득세했다.
해방 뒤 백범김구와 함께 한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심산 김창숙 유택에 큰절을 올리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사진 심산사상연구회 제공
2000년 김수환 추기경이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의 묘소를 찾아 큰절 6번을 올렸다. 일제의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가 됐던 심산은 백범 암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이승만에게 서릿발 같은 하야 경고문을 발표했던 선비다. 추기경의 절은 종교 간 금기를 깬 행동으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그건 친일 천주교의 참회의 절이 아니었을까. 김 추기경은 나중에 심산연구회의 살림이 어렵자 상금 700만원에 300만원을 더 보태 기부했다.
그런데 일제와 미국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종교들이 미안해야 할 종교는 따로 있다. 무려 10만여명이 일제에 의해 순교당해 아예 뿌리가 잘린 대종교다. 대종교를 연 홍암 나철은 구한말 장원급제를 한 당대의 사상가였다. 일제가 이 땅을 삼키려는 을사조약을 맺자 가장 먼저 을사 5적의 ‘암살’을 꾀한 이가 그다.
1909년 대종교를 연 홍암 나철. 구한말 과거에 장원급제한 그는 1905년 일제와
친일 대신들이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을사5적의 암살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자
대종교를 중광(다시 열다)시켰다.
청산리대첩을 이끈 대종교인들의 북로군정서. 왼쪽부터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청산리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 앉아있는 이가 대종교인 백야 김좌진
21년째 항일독립운동 유적지순례를 하면서 연변 회룡시 들판에 방치된 홍암 나철, 서일, 김교헌 대종교 세지도자의
묘지를 찾아 벌초를 하고, 참배를 하는 정토회 법륜 스님을 비롯한 순례단.
대종교의 항일 지사들. 위 왼쪽부터 김동삼, 김좌진, 신채호, 우덕순, 이동녕, 이병기,
이상설, 이시영, 이회영,장지연, 정인보, 주시경, 지청천, 최현배, 홍명희, 홍범도.
그는 국가 패망의 원인을 기득권의 사대주의로 보았다. 강한 외세가 밀려오면 민족과 국가를 수호하기보다는 힘센 외세에 붙어 자신의 영화와 출세만을 추구하고, 세력을 확장해가는 데만 급급한 기회주의가 멸망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가 민족정신을 되찾기 위해 1909년 대종교를 열자, 5년 만에 30여만명이 몰렸다. 대종교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자 일제의 탄압이 집중됐다. 나철이 1916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절로써 항거하자 지사들이 더욱더 대종교로 모여들었다.
나철의 뒤를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석학인 김교헌이 이었다. 그는 동만주에 군관학교를 열어 독립군을 양성했다. 3·1운동에 불을 지핀 1918년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한 39인의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이어 1920년 백포 서일과 김좌진, 이범석 등 대종교인들의 북로군정서는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참혹한 보복을 당했다. 독립운동사는 대종교를 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러나 해방 뒤 이승만은 대종교 독립지사들 대부분의 단물만 빼먹고 버렸다.
친일·친미의 종교들이 해방 조국의 안방을 차지한 사이 나철과 서일, 김교헌은 죽어서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민족 동포를 위해 살신성인한 3인의 무덤은 중국 연변 화룡시의 야산에 여전히 방치돼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종교다움의 첫걸음이다. 참회 없는, 참된 종교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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