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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총을 든 빨치산 철학자 박치우가 묻다

김무성의 '자유'는 이승만과 어떻게 연결되나

15.08.17 10:24l최종 업데이트 15.08.17 10:24l





[장면 하나] 김무성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8일 제주 KAL 호텔에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초석을 다졌고, 6.25 당시 공산화를 막고 한미동맹을 체결해 안보를 지켰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진보 세력들이 "학생들에게 우리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굴욕의 역사'라고 가르친다"며 "어린이들에게 부정적 역사관을 심어주는 이런 역사 교육체계를 바꾸기 위해 역사를 국정교과서로 바꿔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물론 정치인들이 '자유'를 앞세우는 일이 새삼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래서 자유라는 말은 참 블랙홀 같기도 하다. 이 말을 누가 운운하든 이런 질문을 던질 겨를이 없어서, 부지불식 간에 빨려들기 십상이니까.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자유는 정확히 어떤 자유고, 이승만과는 어떻게 연결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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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서대무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해 사형장을 둘러보던 중 교수대를 직접 만져보고 있다. 김 대표는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이곳에서 희생됐을까"라고 말했다.
ⓒ 연합뉴스

[장면 둘] 누가 '이승만 두상'을 샀을까

최근 '자유'경제원은 "대한민국의 중심 광화문에 국민들에게 자유와 부국을 선물한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작은 출발"로 "두상을 제작하여 퍼뜨리"겠다고 밝혔다. 두상은 50개 한정 선착순 각 15만 원에 판매됐다. 판매 공지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는 홈페이지 슬로건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이렇게 상품화된 자유는 누가 살까. 구글에서 '이승만 두상'을 검색했다. 구매인증 사진이 떠서, 출처를 유심히 보니 '일베저장소'였다. 구매자는 이승만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만들어"줬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밖에 누가 '저런 자유'를 샀는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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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두상 지난 6일,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 올라온 이승만 두상 구매후기 글. 해당 두상은 '자유경제원'에서 15만원에 50개 한정으로 판매했다.
ⓒ 일베 갈무리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김 대표와 자유경제원은 모두 '이승만'을 '자유'와 연결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 등으로 하야했다는 걸 상기한다면, 자유보다는 '독재'나 '권력욕'이 훨씬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아리송할 때는, 말의 배후에 있는 철학을 간파해야 한다.

어떤 철학이 정치적 성격을 가질 때 말은 무기가 된다. 자유라는 말이 정치적 맥락에서 들려온다는 건, 총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총질도 총질 나름이다. 누가 총을 들고 있는지, 총부리가 어디를 향하는지, 지키려는 가치가 무엇인지 '맥락'이 중요하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긴장하며 피아식별부터 들어간다.

"당신이 말하는 자유는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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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치우(1909~1949)와 부인 김종숙 박치우는 함경북도 성진에서 출생해 1936년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전까지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박헌영과 남로당 활동을 전개하며 <현대일보> 편집인으로 있다가, 우익의 탄압이 심해지자 어쩔 수 없이 월북했다. 김일성의 만주파와는 거리를 뒀고 1949년 빨치산으로 남파 돼 유격활동을 벌이다 태백산에서 사살됐다.
ⓒ 여성
단순히 이승만이 건국에 참여했고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보다, 누구를 위해 참여했고 추구했느냐가 중요하다. 이승만과 동시대를 살았던 박치우는 이 점에서 철학의 '당파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철학자였다. 당파성(黨派性)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철학도 현실사회의 무리와 파벌에 따라 이해관계를 가지며, 서로 다른 실천적 지향성을 띠게 된다는 뜻이다.

조선의 사대부는 유학사상, 동학농민운동은 동학사상, 서양의 중세 성직자들은 스콜라 철학, 프랑스혁명 때 부르주아들은 사회계약론인 식이다. 그밖에 철학이 당파성을 띠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결국 철학의 출발은 삶과 사회에 대한 순수한 고민이지만, 현실에 실현하고자 실천과 결합할 때 정치적 당파성을 띠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박치우는 이를 자연스러운 일로 보면서, 8.15 해방정국에서 이승만과는 차별화된 당파성을 보였다.

이승만의 자유는 '우익'을 위한 자유

소련과 미국은 임의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해 각각 북쪽과 남쪽에 들어섰고,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입국했지만, 미군과 함께 들어온 이승만은 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잘 알려졌듯 극렬한 반공우익었던 이승만은 좌익들을 '싸잡아' 싫어했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이라도 거부하라.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이므로 전부 체포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 정부를 세워 38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내어 쫓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 ― 이승만(1946.5.20)

마르크시즘에 영향을 받은 박치우도 좌익이었다. 그는 <현대일보> 편집인으로 언론활동을 하면서 좌익의 관점에서 대중을 설득하고, 남로당(남조선 노동당)을 조직화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남한 내 그의 활동은 1년 만에 강제로 끝난다. 우익 청년조직이 그의 신문사에 테러를 가하고, 강한 비판 논조를 의식한 미군정이 정간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갔지만, 1946년 '10월 인민항쟁'으로 지명수배 되면서 그해 겨울 어쩔 수 없이 월북한다(남로당 지도부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체포를 당했다). 남한의 좌우익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으로서는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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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인민항쟁'은 미군정이 일제시대 관리와 경찰들을 그대로 고용해 식량공출을 강압하고 토지개혁을 지연시키는 학정을 저지르자, 식량부족을 겪던 시민들과 노동단체가 함께 10월 1일 대구에서 벌인 시위로부터 촉발돼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중항쟁이다. 이 때 시위에 가담한 좌파들을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반공 청년조직들의 테러가 속출하면서, 남로당 조직이 큰 타격을 입고 대부분 월북하거나 체포 당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10월 1일부터 이틀에 걸친 항쟁에서, 대구에서만 민간인 18명과 경찰 4명이 사망한 것으로 봤다. 그러나 유족회 측은 '24번'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린 주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망자가 최소 24명 이상이라고 봤다.
ⓒ 10월항쟁유족회

결국 이승만 주도로 남한 정부가 세워졌고, 그는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여순사건과 제주도 4·3사건 등 광기어린 좌우 대립 끝에, 우익들은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 남로당 등 133개 좌익 단체들을 싸잡아 불법화했다. 또한 이승만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했고, 친일파들은 반공우익으로 변신했다.

놀랍게도 이는 박치우가 이미 경고한 상황이었다. 그가 월북 전 남긴 글들을 엮은 <사상과 현실>을 보면,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면 한반도는 또 전체주의에 휘말릴 것이라고 봤다. 그가 짚은 근본적 원인은 일제가 수용해 극단화한 서양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였다.

이 사상은, 사회를 마치 원자 쪼개듯, 최소단위인 '개인'으로 나누어 공평한 '일 대 일'처럼 취급하는 사상이다. 그리고 사회가 이 관계를 잘 유지하면 개인들은 자유롭다고 본다. 그러나 박치우에게 '이런 식의' 자유와 평등은 아무 맥락도 내용도 반영이 안 된, 구체적 현실과 동떨어진 지극히 추상적인 '껍데기'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사회 구조와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엄연히 경제적·문화적 출발선이 다르며 어느 정도 세습이 이루어진다. 이 상황에서 공평한 '일 대 일' 경쟁은 애초에 허구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봉건체제에 대항하며 세계사에서 급부상했지만, 막상 봉건체제가 무너진 다음에는 투쟁과 해방의 무기가 아닌 이기적 지배체제를 공고화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익과 그 분배에 있어서는 유달리 앙칼지고 '현실적'인 시민사회가 유독 개인 개념에 있어서만은 왜 이처럼 이념적, 형식적, 추상적일까. … 형식논리적 일 대 일은 대상이 이념화될 때에만은 타당하나 현실 그대로일 때는 무력하다. … 형식논리적 공평은 그러므로 공평의 '픽션'일 수는 있어도 공평의 현실일 수는 없다." ― 박치우, <사상과 현실> 중.

빨치산 철학자로 죽다... 남과 북 모두에 섞일 수 없었던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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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남부군 빨치산은 박헌영 등의 남로당계 노선에 따르되, 북한의 김일성과 거리를 두고 남한의 이승만에 반대하며 남한 산악지대에서 유격활동을 벌인 이들을 지칭한다. 박헌영은 이후 김일성이 자신이 일으킨 6.25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 숙청 시켰고, 한국전쟁 발발 후 남과 북 모두에게 버려진 빨치산들은 대부분 사살되거나 굶어죽거나 얼어죽는다. 영화 <남부군>은 특히 6.25 발발 이후 빨치산들의 애환을 담고있다.
ⓒ 정지영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전체주의로까지 치닫는 모순을 드러낸다. 사람들 사이의 맥락을 지워버리는 탓에, 각 개인들이 아무런 사연도 없는 '1'로 동질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도조 히데키, 히틀러 등과 같이 '애국' 완장을 단 지배자들이 등장해 민족의 이름을 참칭하며 정적들에게 '매국' 딱지를 붙여버리면 사회는 광기에 휩싸인다.

박치우의 진단은 오늘날도 유효한가. 이 시대 '애국' 프레임이 조금만 구조적 모순을 들추면, '종북 빨갱이'로 모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적 이익과 분배의 문제는 '개인의 노력'으로 환원되면서도, 기득권이 사회를 결속시켜야 할 때는 '애국' 프레임이 등장한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사회학)는 후기 산업화 시대를 "낮은 수준의 파시즘"이라고도 말한다(관련기사: 지옥보다 못한 '헬조선' "노오력은 해봤냐"는 꼰대들).

사실 지금 레드 컴플렉스를 걷어내고 보면, 박치우가 했던 말은 무슨 악마 취급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해 논할 때는, 엄연히 개인이 속한 맥락과 구조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건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주장하는 '서사적 자아' 개념과도 통한다.

그 자신도 반공우익이면서 독재를 했던 이승만과, 그 도움으로 친일에서 자본가로 둔갑한 친일파들도 '자유'로웠을지 모른다. 그 후손 중 한 명인 김무성 대표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나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롭다면 여생을 탑골 공원에서 비둘기 밥이나 주거나 <국제시장> 같은 영화로 대리만족하며 보낼 일도 없다.

박치우의 대안은 불합리한 현실적 관계를 외면하지 말고 저항하면서 역사를 진보시켜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개인들을 체제에 묶어둠으로써 유지되는데, 역사의 '진보'는 그 모순을 들춰내 체제를 계속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념 대립 시대에 남한 내 좌익들은 설자리를 잃었고, 소수가 산으로 들어가 이른바 '빨치산' 유격활동을 벌였다.

만주파 김일성이 북한 내 라이벌 정파들을 서서히 숙청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스탈린주의 경직성이 본격적으로 북한에 스며들자, 박치우도 그와 거리를 두고 남한으로 내려와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 11월 20일경 사살된다. 그는 철저한 경계인이었고, 이승만이든 김일성이든 독재와는 섞일 수 없는 자유를 지향했다. 그의 죽음에 관하여는 두상은 커녕, <동아일보>에 한 구절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태백산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 정치'>(김동춘 / 경제와 사회 101호 / 2014)
<사상과 현실>(박치우 / 윤대석·윤미란 편 / 인하대학교 출판부 / 2010 / 3만8000원)
<사상과 현실>(박치우 / 홍영두 편 / 역사와철학 / 2015 / 9000원)
<우리 사상 100년>(윤사순·이광래 / 현암사 / 2001 / 3만원)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 김영사 / 2009 / 1만5000원)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 / 동녘 / 2015 / 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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