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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양기백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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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도서관에서 45년간 근무하며 한국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양기백(梁基伯) 씨가 16일 미 워싱턴DC 근교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유족들이 28일 밝혔다. 향년 96세. 양씨는 1949년 국비장학생으로 도미(渡美), 1950년부터 95년까지 미 의회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한국과장과 동양학부장 등을 지냈다. 이 기간 중 한국 관련 자료를 270권에서 12만5,000권으로 늘리는 데 앞장섰다. 퇴임 이후에도 주미 한국대사관 한미외교사료실 고문으로 일하며, ‘미 의회 의사록 한국관계 기록 요약집’ 등을 펴냈다. 유족은 딸 양원경·아경·말경 씨가 있다. 장례식은 2월1일 오후 1시 메릴랜드 베데스다 펌프리 장례식장에서 열린다.”
위 내용은 지난 1월 29일자 국내 몇몇 신문에 실린 양기백 박사의 부음기사다. 원고지 2매 분량도 안 되는 이 정도로 미국 내 한국학의 최고 권위자로 불린 양 박사의 일생을 평가, 기록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명사(名士)의 경우 부음기사에 이어 지인이나 후학들의 고인에 대한 추억담, 회고담 같은 게 실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양 박사의 경우는 그런 것도 없었다. 국내인사가 아닌 재미교포인데다 이미 양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신문사에 거의 없는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생전에 양 박사와 다소의 교분도 있는데다 또 후학을 자처하는 필자라도 양 박사의 삶과 업적을 기록해둬야 할 것 같다.
1. 양 박사와의 만남, 미래의 한국 국기 구상
먼저 사적인 얘기부터 시작하자면, 1995년 4월 중앙일보 근무 당시 미국 워싱턴에 업무차 출장을 갔다가 양기백 박사를 만나 뵌 적이 있다. 당시 양 박사는 미국 의회도서관(LC, Library of Congress) 한국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계셨다. 필자 같은 문헌정보학(옛 도서관학) 전공자들은 세계 도서관의 상징과도 같은 미국 의회도서관을 한번 방문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다. 그런데 그곳에 한국인이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반가움이 더할 수밖에. 출장을 가기 전에 편지로 한번 뵙기를 청하였더니 일부러 내게 시간을 내주셨다.
집무실에서 인사를 나눈 후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양 박사는 내게 한국과 서고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서고로 안내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한국과 서고는 지하에 있었는데 철제서가 양면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당시 내 눈에 확 띈 것은 북한 책이 한국 책들과 나란히 꽂혀 있었던 게 인상적이었다. 서고를 들러본 후 내 관심사인 한국사 코너엘 들렀더니 뜻밖에도 그곳엔 내가 펴낸 <친일파·Ⅱ>(공저·91·학민사)와 <창씨개명>(편역·93·학민사) 두 권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미국 의회도서관에 졸저가 두 권이나 소장돼 있다는 사실에 당시 나는 적잖이 고무됐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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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사무실에서 양기백 박사와 함께 한 필자(1995.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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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서고에서 졸저 <친일파·Ⅱ>를 들고 선 필자(1995.4.11) |
첫날은 양 박사께서 일정이 바빠 이튿날 다시 찾아뵈었다. 미국 가톨릭대학에서 도서관학 석사학위를 받은 양 박사는 내가 같은 분야 전공자임을 알고는 더욱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그리고는 그간 모은 한국학 관련 자료 파일을 여럿 꺼내 보이며 이를 서지학적으로 정리중이라고 하셨다. (물론 이 자료들은 나중에 국내에서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헤어질 무렵 양 박사는 한 파일에서 미래 한국의 국기(國旗)를 구상한 것이라며 보여주셨다. 태극문양과 건곤이감 4괘 대신 깃발의 절반 아래는 흰색, 위는 푸른색이었다. 특별한 문양 같은 것은 없었다.
근 반세기를 미국서 살아오신 분이 어떤 연유로 한국의 국기를 새로 만들게 됐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그 연유를 양 박사께서 찬찬히 설명해주셨다. 언젠가 중국과(課)에서 들러달라고 해서 갔더니 한 미국인 젊은이가 태극기를 가지고 와서 기증하겠다며 맡기고 갔다는 거였다. 그 미국인은 2차 대전(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손자인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던 중 태극기를 발견하고는 이를 중국 국기라고 여겨 중국과로 가지고 왔더라는 거였다. 그 미국인은 태극기의 ‘태극문양’을 중국 문양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 박사는 ‘태극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한다. 우선 그 미국인이 태극기를 중국 국기로 인식한 것은 ‘태극문양’ 때문인데 이는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또 ‘태극기’가 그리기가 어려워 친근함을 주지 못하는 점도 국기로서 한번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양 박사는 ‘국기’를 나타내는 영어단어 가운데는 ‘colors’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국기가 그 나라를 상징하는 ‘색’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양 박사는 고금의 문서를 통해 ‘한국(인)의 색’을 찾아 나선 끝에 ‘백의(白衣)민족’과 ‘푸른 하늘’에서 흰색과 푸른색을 우리민족의 색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아래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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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상징인 ‘백의민족’과 ‘푸른하늘’에서 착상해 양기백 박사가 구상한 대한민국 국기(사진-백용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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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신, 가족사항, 학력, 경력, 저서
양기백 박사는 미 의회도서관에서 ‘KP Yang’(Key Paik Yang)으로 통했다. 내가 양 박사의 집무실을 방문해 대화중에도 연신 전화가 걸려왔다. 그 때 마다 양 박사는 수화기를 들고는 “KP Yang”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는데 아직도 그 소리가 귀에 익다. 먼저 양 박사의 학력, 주요 이력 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양 박사가 작성한 이력서에 따르면, 1920년 1월 20일(일부 자료에서는 1919년생으로 알려짐) 전남 나주 태생으로, 가족은 아내와 세 딸(원경, 안경, 말경)을 두었다. 어떤 연우에선지 몰라도 학교는 이북에서 다녔다. 평양3중, 숭실고 졸업(1939)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 상학과(현 상대)를 졸업(1943)했다. (해방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 일리노이주 몬마우스대학 정치학과 졸업(1950) 후 아메리칸대학에서 행정학 석사학위(1958)를, 가톨릭대학에서 도서관학 석사학위(1960)를, 1975년 동국대에서 명예 정치학박사를 받았다.)
일본서 귀국 후 양 박사는 공직자로 변신했다. 첫 직장은 조선총독부 산하 경기도청에서 주사(6급)로 근무한 걸로 알려져 있는 데 이력서에는 해방 전 경력은 나와 있지 않다. 이력서에 따르면, 양 박사의 초기 경력은 해방 후 미 군정청 관재과장(1945~46)을 시작으로 경기도청 행정과장(1947~48)과 공보과장(1948~49)을 역임했다. (언젠가 양 박사가 일제 고등문관시험(고문) 합격자 출신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으나 공식문서로 확인하진 못했다. 다만 해방 직후 경력을 감안하면 양 박사가 고문 합격자라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또 해방 후 당시 토목국(현 국토교통부) 서무과장을 지냈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1949년 한국정부의 미국 국비유학생 1호 선발돼 미국으로 건너간 양 박사는 이듬해(1950) 한국전쟁이 터지자 귀국하지 못한 채 현지에 눌러 앉았다. 그리고는 그해 미 의회도서관 한국문헌과(한국과) 직원 모집에서 공채 1호로 채용돼 이후 한국과장(1950~94), 아시아부장(1994~95) 등을 지내면서 46년 6개월간 한국 전문가로 근무했다. 1984년 미 의회도서관으로부터 공로상을 받았으며, 미국 내 유력인사들을 수록한 에 수년간 등재(1997~2009)되기도 했다. 1995년 은퇴 후에는 주미 한국대사관 고문 겸 문서담당(archivist)을 2000년까지 맡았다. 양 박사의 주요저서는 아래와 같다.
<비동맹운동> (Non-Alignment Movement, Seoul: Institute of Foreign Affaires and National Security, 1980)
<한국전쟁서지목록> (Korean War Bibliography, Washington, D.C.: Library of Congress, 1990)
<국가와 문화와 국학이란 뭘까요?> (서울: 선인, 2006)
<미국 의사록 한국관계 기록 요약집 : 1887-1949> (Washington, D.C.: Embassy of Korea, 2001)
<생각케 하는 말과 글: 한 아름> (서울: 송학, 2005)
<우리 책 말풀이> (서울: 송학, 2005)
<한국 문화와 예술과 문명의 생리와 걸림돌> (서울: 송학, 2005)
<한·일·중 전통 사회의 모습> (서울: 송학, 2005)
"An Outlin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18, No. 1(1958)
"The School of Yi Confucianism,"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18, No. 2(1959)
"Present Conditions of Libraries in North Korea," Korean Affaires, Vol. 2, No. 2(1963)
<한국공산주의운동사>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1968,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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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는 미 의회도서관. 양기백 박사는 이곳에서 46년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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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학 사료수집의 대가, 한국계 연구자에게 자료제공 등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 양 박사는 ‘국비 유학생 1호’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고인이 된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고광림 박사,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신한수 박사(의사)와 함께였다. 당시만 해도 직항로는커녕 여객선도 없던 시절이었다. 6개월을 기다려 인천항에 짐을 내리고 돌아가는 화물선을 타고 40여일 항해 끝에 미국 땅에 도착했다. 일리노이주 몬마우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 양 박사는 이듬해(1950년) 워싱턴 D.C. 미 의회도서관에 한국과가 신설되면서 한국과 직원 1호로 채용됐다. 한국과는 이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 정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한국과로 발령을 받을 당시 미 의회도서관 내에 한국 관련 서적은 총 220권에 불과했다. 한국 관련 부서나 서고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일본과에 그냥 포함돼 있었다. 당시 한국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양 박사는 우선 미국 내 유관기관이나 단체·대학 등을 찾아다니며 한국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심지어는 북한이 펴낸 ‘이조실록’ 등 북한 관련 서적을 모으기 위해 추가예산을 요구하면서까지 한국 관련 자료 확충에 진력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책과 자료는 전부 손수 분류해 목록을 만들고 라벨을 붙였다. 그의 손때가 묻은 자료는 1995년 6월 그가 은퇴할 당시 12만권으로 늘었다. 또 초창기 그 혼자였던 한국과 직원도 5명으로 늘었다.
양 박사를 따라다니는 수식어 가운데는 ‘국비 유학생 1호’ ‘미 국회 도서관 한국과 직원 1호’ 말고도 ‘한국학 사료수집의 대가’ ‘이민 초창기 유학생들의 대부’ 등이 있다. 미 의회도서관에 근무하면서 한국학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이를 체계화 하고 편찬하는 데 일생을 바쳐온 그는 미국 내 한국학 사료수집의 대가로 불려왔다. 95년 6월 정년퇴임 후에는 주미 한국대사관 고문 겸 문서담당(archivist)을 맡아 ‘사료실’을 만드는 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미국 정부기관을 찾아다니며 한미관계의 중요한 사건이나 정책, 기록물을 일일이 복사해 『주미 한국대사관 50년사』(99년), 『미 의회 의사록-한국관계 요약집(1878~1949)』(2001년) 등 7권의 사료집을 펴내기도 했다. 『미 의회 의사록』 출간 후 ‘Radio Free Asia’와의 인터뷰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 이번에 어떻게 이 자료집을 펴내셨는지요?
“내가 도서관에서 일 하면서 의회 회의록을 다루다 보니 우리나라에 관한 정보가 있어 모아 사전식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대사관에서 이를 보고 외교관들도 보고 읽어야 하니 출판하자고 해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 의회 의사록에 한국관련 부분은 언제부터 기록이 되어 있는지요? “우리나라에 관한 기록은 1846년부터 있다고 하는데 그때는 꼭 한번 일본과 조선이 무역을 한다는 조항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1882년 한미조약을 맺을 때 슈펠트가 조선과 미국의 조약에 대해 협의한 것 그것이 의사록에 실렸습니다. 그래서 민영식 공사가 처음 미국에 올 때 기록이 있고 그 후 우리 공관이 문을 닫았다가 1888년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교환공사를 임명해 거기에 대한 답례로 조선 공사를 처음으로 보냈죠.”
- 그런데 미 의회에서는 이런 자료들이 어떻게 모두 모아졌는지요? “의회에 이런 사연들이 모아진 것은 처음에 미국이 외국과의 외교 협정을 해군에서 했습니다. 당시 해군제독들이 자기 함대를 이끌고 가서 외교협정을 맺었는데 한국에는 슈펠트가 해군장성으로 한국과 교섭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 외교협정을 국무성에도 보고를 하고 의회에도 보고를 했기 때문에 의회에 자료가 있습니다.”
- 이번 자료집을 내시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919년 3.1운동 관련 기록인데 3.1운동이 일어나니까 미국 선교사들이 기록들을 다 모아 가지고 자기 본부에다 보고를 하고 또 자기 지역 국회의원들에게 보고를 하면서 의사록이 싣도록 했습니다. 3.1운동이 아주 미묘합니다. 처음에 선교사들이 3.1운동에 가담을 하지 않다가 일본인들의 만행을 보고 동조하기 시작... 특히 제임스 게일 라는 선교사는 유명한 학자이기도 한데 처음에 이 사람은 친일파였습니다. 그러다 일본인들의 만행을 보고 반일파로 돌아섰습니다. 이 사람은 조선이 깨이려면 일본과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의 만행을 보니 친일 한 것이 잘못 되었다고 본인이 직접 말하기도 했는데 특히 수원의 제암리 교회에 교인들을 가두고 불을 질러 모두 죽인 사건으로 선교사들이 3.1운동에 동조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요즘 한국과 일본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로 떠들썩한데 이런 자료가 실제적으로 좋을 증거가 아닙니까?
“그렇죠. 우리 자료가 아닌 미 의사록의 자료이니까 우리가 말하기가 더 좋습니다. 이런 사건이 의사록 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잘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말로만 합니다. 반드시 서류로서 정정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의사록 몇 페이지에 다 실려 있다는 것을 서류로서 제시해야...”
- 이번 자료집에는 1949년까지 자료를 조사하셨는데 북미 관계 작업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는 1949년 이후로 보아야 하는데 너무 방대합니다. 큰 작업입니다. 의사록이 굉장히 두껍고 크기 때문에 한번 뒤지기에도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데 1950년부터는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거의 3분의2가 한국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 작업은 국가에서 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양 박사가 주미 한국대사관 고문 겸 문서담당을 맡게 된 것은 당시 주미대사였던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국비 유학생 1호’다 보니 양 박사는 이민 초창기 한인 유학생들의 ‘기댈 언덕’ 겸 한국학 기초자료 안내자 역할도 담당해야만 했다. 한인 유학생들은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미 의회도서관 출입이 잦았고, 그 과정에서 그의 도움을 적잖이 받았다. 고 이정식 박사를 비롯해 오세웅 전 국회부의장, 이홍구 전 총리 등이 그들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 내 대학에서도 한인 유학생들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컬럼비아대학의 경우 그를 논문 심사위원으로 위촉해 20여 년간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수백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그의 도움을 받아 석·박사 학위논문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 박사의 대표저서로 <국가와 문화와 국학이란 뭘까요>(선인, 2006)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양 박사가 미 의회도서관에서 찾아내 정리해 둔 19~20세기 한국 관련 도서에서 한국 관련 지식을 가나다순으로 풀어낸, 말하자면 ‘양기백식 개념어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95년 필자가 그의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한창 정리 중이었다. 원래 2005년 출간됐다 사장된 <량기백 산고(散稿)>(전 6권, 송학)의 제3권을 보완해서 별도의 책으로 다시 펴낸 것으로, 저자는 이를 서지백과학(bibliopedics) 또는 서지백과사전(bibliopedia)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책은 한국학은 물론 문헌정보학(도서관학) 측면에서도 귀중한 성과로 평가할 만하다.
양 박사가 이런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측면에서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태어나(1920년생) 자랐고,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생애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덕분에 그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에 모두 능통했다. 게다가 정치학, 행정학, 도서관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며, 정보의 보고인 미 의회도서관에서 직접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폭넓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근대’에 대한 개념의 뿌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또 이를 주체적으로 해석했다. 한 예로 ‘국가’ 항목에서 ‘내셔널리즘’을 국가주의가 아닌 민족주의로 수용한 한국적 특수성을 이야기하면서 “국가주의의 홍역을 거쳐야 성숙한 국민이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시각을 견지했다.
이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장 서술방식이다. 그는 ‘국민(國民)’을 ‘궁민’으로, 즉 소리 나는 대로 읽고 또 표기했다. 또 주격 조사와 목적격 조사를 일부러 붙이지 않았다. 이밖에도 이 책에서 그는 지금은 사라진 옛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국문학적 가치도 큰 것으로 평가됐다. 그만의 독특한 표기방식은 평소 그의 소신으로, 이런 식으로 쓴 문장을 읽어보았더니 읽고 쓰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95년 미국 방문 때 그가 내게 보여준 몇몇 문건은 전부 이런 식으로 표기돼 있었다. 구체적인 표기 사례는 <4> 항목에서 그가 지인에게 보낸 이메일의 한 대목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이름 앞에 따라붙은 ‘한국학 사료수집의 대가’라는 수식어는 결코 허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묶어 책으로 펴내기도 하고 더러는 동학(同學)이나 후배들에게 자료를 제공해 활용되도록 했다. 90년대 초반 출판 분야 일을 하다가 대학 은사를 통해 양 박사와 인연을 맺은 백용(56·서울 거주) 씨에 따르면, 북한 김일성의 진위 여부로 한국 현대사학계가 시끄러울 때 미 의회도서관 차원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다. 당시 주제발표를 맡은 양 박사는 발표 자료를 준비 중이었는데, 절친한 미 의회 의원 한 사람이 발표를 만류해 결국 발표하지는 못했다. 이 때 준비한 자료는 김일성 연구 및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자들에게 값지게 활용된 바 있다고 한다.
4, 두 차례 서훈 추진과 불발, 노후생활
지금부터 16년 전인 지난 1999년 국내 몇몇 인사들이 양 박사에게 서훈을 추진한 바 있다. 이 일에 총대를 멘 사람은 건국대 신복룡 교수로, 신 교수 역시 양 박사에게 신세를 진 사람 가운데 하나다. 신 교수는 감영훈,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학준 당시 동아일보 회장(인천대 총장 역임) 등과 함께 양 박사와 방선주(당시 65세) 박사에 대한 한국정부의 서훈을 추진했다. 방 박사는 수십 년 동안 미 국립문서보관소를 중심으로 미국에 산재한 한국 근,현대사 관련 사료를 100만 건 이상을 발굴해 국내 학계 및 언론계에 제공하거나 자료집으로 엮어 냈다. 방 박사가 발굴한 미군정과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은 이 분야 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로 방 박사는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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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방선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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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백 박사는) 미국 국적의 학자이기는 하지만 그가 그의 조국을 위해 이룩한 공로는 어느 한국인보다 지대합니다. 그러나 조국은 그에게 아무런 보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미국 의회도서관 일본과장 구로다(黑田) 씨가 천황으로부터 국가 최고문화훈장을 받은 사실과 비교한다면 한국의 경우는 너무 박정(薄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여생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의 생전에 조국은 그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에 훈장 수여를 추천합니다.
2010.6
강영훈 전 국무총리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
강영훈, 이홍구, 김학준 등 3인은 서훈 추천서에서 양 박사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 박사에 대한 서훈 추진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유는 그 해 문화훈장 서훈 대상자가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고 한다. 물론 양 박사보다 더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이 서훈을 받았다면 구구하게 따질 일은 아니다. 양 박사에 대한 서훈 추진은 1999년에 이어 10년 뒤인 2009년에 재시도 됐다. 그러나 이때도 성사되지 못했다. 정부가 하는 일이니 그 내막을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만 아쉬움이 적지 않다. 추천서의 한 대목처럼 한국정부가 ‘너무 박정(薄情)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2009년 서훈 추진 건으로 백용 씨가 신 교수의 부탁을 받아 양 박사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양 박사는 다른 사람에게 그 공을 돌렸다.
“내게 한국에 공적 있다면 매 두째 화요일 모은 ‘화요회’ 주관한 거다. 연사 얻어오고, 엽서로 모임 알리고, 전화로 회의 참석 부탁 이 다 내가 했다. 역대 한국대사 비롯, 미국대사 Reischauer, 중국대사 Hammer, 우리나라 미국대사 Green, 이름난 역대 한국대사 비롯, 한국학 학자와 정부 높은 사람, 전 국무성 한국과장 Don MacDonald 박사에게 부탁 정중하게 초대했다.
첨 시작할 때 몇 사람 안 모였으나 한국에 관심 있는 미 정부와 재야인사 끊임없는 후원(Patron, Matron)으로 한 번도 빠짐없이 30년 넘어 성공리에 모였다. 이 공, 오로지 “Don MacDonald”에 돌린다. 그는 꾸준히 말없이 한국이라면 앞장서 도운 기특한 친한파(Koreaphile)다. 전남 광주에 파견된 (Foreign posting) 초창기 미국 외교관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 남달랐다. 내 부탁으로 역대 주미 한국대사 이 모임 회원들 초대 대사관에서 연회 베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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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교수 일행이 작성해 한국정부에 제출한 양기백 박사 공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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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을 방문해 양 박사를 만난 백용 씨는 방 박사로부터 재미난 일화를 한 가지 들었다고 내게 전해줬다. 얘기인즉슨, 과거 박정희 시절(70년대 중후반) 정부에서 양 박사에게 훈장 수여를 추진했었다고 한다. 당시 문공부장관이었던 김성진 씨 통해 이같은 제안을 받았는데 그때 양 박사는 김성진 장관에게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거절 사유가 좀 특별하다. 양 박사는 평양3중, 숭실고 출신으로서(당시 동문 중에는 김형석 연대교수도 있었음) 장준하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 정권하에서 의문사를 당했는데 그걸 아는 본인으로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70년대 초반에 한국을 방문했던 양 박사는 장준하 선생을 만나 반가운 해후를 했으며, 장 선생이 같은 학도병 탈출자인 김준엽 고려대 총장을 소개해 그때부터 김 총장과도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1920년생인 양 박사는 만 95세로 타계했다. 세속적으로 보자면 천수를 다한 셈이다. 단란했던 가족과 평생 건강이 함께 했다. 게다가 평생을 바쳐 할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해 생계와 나름의 명예도 얻었기에 선생의 삶은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하나 아쉬움이라면 2010년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인생 말년 몇 년간을 외로이 보냈다. 비록 부인은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세 딸들의 보살핌 속에서 그는 행복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2010년 양 박사가 백용 씨한테 보낸, 아내를 잃고 쓸쓸하게 보내는 심경을 담은 이메일의 한 대목을 양 박사의 말년 기록 겸 추억담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당시 나는 백용 씨를 통해 양 박사의 삶을 몇 차례 내 블로그에 연재할 계획을 밝힌 바 있어 양 박사 메일에 내 이름이 더러 등장한다.)
“Grace(셋째 딸 말경) Email로 보낸 편지 잘 받았오. 내 아내 무덤에 비석도 세웠고 나 또한 닥쳐 온 늙음맘과 몸으로 다짐하며 내 원고 색인 하는 Computer일 어서 끈내려 열심히 하고 있소. 정운현 씨 나와의 추억 기사화 무슨 말인가 잘 모르겠오. 좀 걱정되오. 기사화할 이력 없을뿐더러 겸손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움만 사게 되겠기에 한 말이오. 운현씨와 친분만으로도 난 반갑고 고맙소. 내 놀 (것) 엄는 나니 미안하지만 기사화 안 했으면한다 내 인사와 함께 꼭 전해주시오.
서로 터놓고 사귄 친구들 이젠 다 가고 없고 거기다 아내까지 죽으니 그 고독 이만자만 아니오. 딸들도 매날 와 도와주고 가나 내 맘 여전히 비여 있구려. 텅 빈집에 홀로 있어 오히려 짐 되기에 이집 팔고 이곳 떠나 어디로 갔으면도 하나 막상 갈 곳도 없오. 뒷방에 홀로 앉아 마당 큰 빨간 단풍나무 만 바라보고 이렇다 할 생각 없이 물그머니 처다 보오. 나만 두고 간 아내 원망스럽소. 앞음 없어 암 인는 줄 모르고 있었오. 진정제로 그는 아무 괴로움 없이 갔오. 내 손으로 그의 뜬눈 감겨 줬오. 죽기 앞서 엄마 병실에서 살다시피 한 셋 딸들 보고 “Take care of your father” 한담 갔오. 17살에 내 어머니 죽었을 때 그 슬픔 뒤풀이 하오. 아침 일찍 그의 산소에 가 여보 나 왔오 하고 한마디 한담 도라 오오. 내 푸념 털어놔 미안하오. 잘들 있으시오. 정운현씨에게 문안 부탁하오. 량기백.” (201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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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근교의 자택 앞에 선 양기백 박사 부부와 백용 씨(2009.10, 백용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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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을 맺으면서
양기백 박사는 일생을 미 의회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했다. 별로 빛도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묵묵히 맡은 바 업무에 충실했으며, 그 과정에서 미국 내 한국 관련 자료 수집 및 보급에 큰 공을 세웠다. 46년간 미 의회도서관에 근무한 후 은퇴해서도 주미 한국대사관 고문으로 초빙돼 한미관계 사료정리와 편찬에 기여했다. 그 때 박사의 나이 80세였다. 내가 한번 만나 뵌 기억으로는 온화한 성품에 자애롭고 관대한 분이었다. 챙기기보다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자리나 명예를 탐하지도 않는 분이었다. 양 박사 같은 분이야말로 지성인이요, 또 진정한 애국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에게 한국정부가 훈장 하나 바치지 못한 것은 크나큰 결례가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양 박사 영전에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훈장이나마 바쳐 은인에 대한 도리를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삼가 고 양기백 박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 이 글은 생전에 양기백 박사와 교류를 가졌던 백용 씨의 증언과 자료협조로 작성되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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