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광주민중항쟁 실상의 절반이 은폐되었다 2. 전라남도 근해 상공에 나타난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 3. 루이제 린저의 북조선 방문기에 들어있는 짤막한 문장 4. 미 제국의 광란적인 북침 핵도발 위협
1. 광주민중항쟁 실상의 절반이 은폐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43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는 그 항쟁의 성격을 광주 민중 대 군사파쇼집단(military fascist group)의 싸움으로 인식해왔다. (군사파쇼집단을 ‘신군부’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흉악한 학살범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하지만 광주민중항쟁을 광주 민중 대 군사파쇼집단의 싸움으로만 인식하면, 그것은 실체의 절반밖에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나머지 절반까지 인식해야 광주민중항쟁을 전체적으로 인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을 서술하는 출발점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핵무기 개발을 고집하다가 미 제국의 버림을 받은 박정희(1917~1979)는 1979년 10월 26일 미 제국의 하수인이 쏜 총탄에 암살당했고, 미 제국은 박정희가 비밀리에 건설한 핵시설을 전부 해체해버렸다. 보안사령관 전두환(1931~2021)을 우두머리로 삼은 군사파쇼집단은 박정희 암살사건으로 발생한 극심한 정치 혼란이 계속되던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육군 참모총장,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육군 헌병감 등 한국군 수뇌부를 전격 체포하고 권력을 찬탈했다.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은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민주주의를 압살하려고 미쳐 날뛰었다.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증오는 날로 격화되었다. 민중의 반감과 증오는 항쟁 폭발로 차츰 다가서고 있었다. 미 제국은 중앙정보국(CIA)의 간첩망을 통하여 그런 현실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한미련합군사령관 존 위컴(John A. Wickham, 1928~2023년 현재 생존)은 광주민중항쟁 3개월 전인 1980년 2월 18일부터 한국군 전투부대 일부를 ‘폭동진압훈련’에 내몰았다.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가장 강한 도시는 전라남도 광주였다. 미 제국은 중앙정보국의 간첩망을 통하여 그런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점령군사령관 존 위컴은 광주에서 어느 순간 폭발할지 모르는 항쟁에 대비해 ‘폭동 진압 작전 명령서’를 작성했다. 위컴은 광주민중항쟁 이틀 전인 1980년 5월 16일 한국군 제20보병사단 사단장 박준병(1933~2016)에게 ‘폭동 진압 작전’ 준비태세를 갖추고 자기의 진압 명령을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위컴은 한국군 특전사령관 정호용(1932~2023년 현재 생존)에게 제3공수려단, 제7공수려단, 제11공수려단으로 편성된 또 다른 ‘폭동진압부대’를 광주 외곽으로 이동시키고 자기의 진압 명령을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그날은 1980년 5월 18일이었다. 위컴의 진압 명령에 따라 광주 시내로 일제히 난입한 ‘폭동진압부대(공수려단)’는 천인공노할 살육 만행을 저지르며 미쳐 날뛰었다. 이것이 제1차 광주 진압 작전이다. 이에 격분한 광주 민중은 총궐기하여 싸웠다.
1980년 5월 20일 위컴의 진압 명령에 따라 ‘폭동진압부대’로 차출된 한국군 제20보병사단이 광주 외곽에 추가로 배치되었다.
1980년 5월 22일 이른 아침, 무기 반납을 거부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600여 명의 청년이 민중무장대를 조직하였다. 민중무장대는 전남도청을 점거하고, 화순광업소에서 가져온 폭약 뭉치 2,100개를 수류탄 신관 450개에 연결하여 전남도청 지하실에 쌓아놓았다. 그 폭약 더미가 폭발하면, 광주시 절반이 날아갈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폭동진압부대’는 겁을 먹고 시외로 퇴각했다.
1980년 5월 26일 전남도청 지하실에 쌓아놓은 폭약 더미에서 뇌관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국군 제20보병사단은 위컴의 진압 명령에 따라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광주 시내로 일제히 난입하였다. 이것이 제2차 광주 진압 작전이다. ‘폭동진압부대’의 공격에 맞서 전남도청을 사수한 민중무장대는 장렬히 전사했고, 마지막 총격전은 1시간 30분 만에 종결되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미 제국은 무차별 살육 만행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한 주범이 분명한데도, 민중무장대는 제2차 광주 진압 작전 하루 전인 1980년 5월 26일 서울 주재 미 제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1926~2002)에게 평화적 해결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 민중무장대는 전사하는 순간까지도 미국의 흉악한 제국주의적 정체를 알지 못했다.
여기까지가 광주민중항쟁 실상의 절반에 해당한다. 이제부터는 미 제국이 은폐하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광주민중항쟁 실상의 나머지 절반을 파헤쳐 보자.
2. 전라남도 근해 상공에 나타난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
2017년 1월 미 제국 태평양사령부 1급 비밀문서가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1980년 5월 23일에 작성된 20쪽 분량의 1급 비밀문서에서 이상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해상자위대가 남한 서남부지역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라는 문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해상자위대’는 일본 해상자위대를 뜻하고, ‘남한 서남부지역 상황’은 광주민중항쟁을 뜻하고, ‘유심히 관찰한다’는 것은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P-2 초계기가 전라남도 근해 상공에서 정찰비행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광주민중항쟁과 일본 자위대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해상자위대는 P-2 초계기를 전라남도 근해로 출동시켜 정찰비행을 감행하였다.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P-2 초계기가 전라남도 근해에 들어가 정찰비행을 감행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영공침범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일본 해상자위대의 전라남도 근해 정찰비행에 관한 기록이 미 제국 태평양사령부의 1급 비밀문서에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미 제국 태평양사령부가 일본 해상자위대에 전라남도 근해 정찰비행을 명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미 제국 태평양사령부는 P-2 초계기를 전라남도 근해로 출동시켜 정찰비행을 감행하라는 명령을 일본 자위대 통합막료감부에 하달했던 것이 분명하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전라남도 근해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라는 사실이 수록된 1급 비밀문서의 작성날짜가 1980년 5월 23일이었으므로,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P-2 초계기가 전라남도 근해 상공에 처음 출동한 날은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는 5월 21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판단하는 까닭은, 1980년 5월 21일 오전 8시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이 위컴의 지시에 따라 전라남도 전역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돗개’는 적의 침투 작전에 대처하는 경계경보를 뜻한다. 평시에는 ‘진돗개 셋’이 유지되다가, 적의 침투징후가 나타났을 때는 ‘진돗개 둘’이 발령되고, 적의 침투상황이 발생하였을 때는 ‘진돗개 하나’로 격상된다.
전라남도 전역에 최고 수준의 경계경보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됨에 따라, 1980년 5월 21일 오전 8시 한국군 제31보병사단 예하 3개 연대가 전라남도 해안지대로 출동했다. 제93보병련대는 목포지역 해안으로 출동했고, 제95보병련대는 고흥-여수지역 해안으로 출동했고, 제96보병련대는 무안-영광지역 해안으로 출동했다.
위에 서술한 정황을 보면, 미 제국은 1980년 5월 21일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P-2 초계기를 전라남도 근해에 출동시켰고, 그와 동시에 한국군 제31보병사단 예하 3개 연대를 전라남도 해안지대에 출동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P-2 초계기의 작전 임무는 바닷속에서 전라남도 해안으로 은밀히 접근하는 적 잠수함을 탐지하는 것이다. 전라남도 해안지대에 출동한 한국군 제31보병사단의 작전 임무는 해안에 기습적으로 상륙하는 적 침투부대를 격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 제국은 조선인민군이 전라남도 해안지대에 기습적으로 상륙할 것에 대비해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P-2 초계기를 전라남도 근해에 출동시켰고, 한국군 제31보병사단을 전라남도 해안지대에 출동시킨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은 1980년 5월 23일 해양경찰에 해안 경계 태세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본 자위대와 한국군이 전라남도 근해와 해안지대에서 각각 정찰비행과 경계 태세를 대폭 강화한 것을 보면, 당시 미 제국도 정찰기와 해상초계기를 동원하여 전라남도 근해 상공에서 정찰비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루이제 린저의 북조선 방문기에 들어있는 짤막한 문장
‘폭동 진압 부대’로 차출된 한국군 제20보병사단이 위컴의 진압 명령에 따라 광주 외곽에 추가로 배치되었던 1980년 5월 20일 평양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날 김일성 주석은 조선을 방문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이췰란드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1911~2002)를 접견하였다. 접견 담화 중에 광주민중항쟁이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제 린저는 조선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여 북조선 방문기를 집필했는데, 그 방문기에 1980년 5월 20일 접견 담화의 내용 일부가 짤막하게 수록되었다. 루이제 린저의 북조선 방문기에 의하면, 김일성 주석은 그날 접견 담화에서 “광주학살 중에 그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청년들을 도와주러 가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짤막한 문장 속에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중대한 사연들이 들어있다. 접견 담화 중에 김일성 주석은 광주민중항쟁에 관해 길게 언급하였으나, 당시에 조성된 긴박한 정치·군사 정세를 알지 못한 루이제 린저는 북조선 방문기에서 중요한 내용을 서술하지 못했다. 루이제 린저가 서술하지 못한 중요한 내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직후, 평양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지도 밑에 긴급대책회의가 소집되었다. 긴급대책회의에서는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이 위컴의 진압 명령에 따라 ‘폭동진압부대’를 광주 시내로 난입시켜 무고한 광주 민중을 무참히 살육한 정황이 보고되었다. 북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을 빌린다면, 당시 광주의 상황은 “봉기에 떨쳐나선 광주 인민을 무참히 살육하는 미제침략군과 괴뢰군의 만행을 듣고 분노와 적개심이 끓어 올랐다”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적 양심은 무고한 광주 민중이 처참하게 살육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수수방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긴급대책회의에서는 미 제국과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의 ‘폭동 진압 작전’으로 무참히 희생당하는 광주 민중을 지원하기 위한 비상 대책이 논의되었다. 그것은 고도로 훈련된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전투원들을 광주로 보내 ‘폭동 진압 작전’을 무력으로 저지하고, 광주 민중의 생명을 지켜주는 광주민중항쟁 지원작전이었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전투원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전라남도 광주까지 가는 육로침투, 공중침투, 해상침투는 한미련합군의 방어선과 비상 경계 태세에 가로막혀 전연 불가능하였다. 그들을 광주로 보내는 방도는 잠수정을 이용하여 은밀히 침투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1980년 5월 당시 조선에는 1960년대에 독자적인 기술로 건조한 110t급 침투잠수정 25척이 준비되어 있었다. 침투잠수정 한 척은 완전무장한 특수부대 전투원 12명을 바닷속에서 은밀히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침투잠수정 25척을 전부 동원하면, 특수부대 전투원 300명을 광주민중항쟁 지원작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110t급 침투잠수정의 잠항 속도는 시속 7.4km다. 북측 남포항을 출발한 침투잠수정 25척이 전라남도 해안에 상륙하기까지 서해 바닷속에서 약 450km를 잠항해야 했다. 잠항 시간만 2일 13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전투원들이 광주 외곽에 접근하여 ‘폭동진압부대’와 격전을 벌이면 위컴이 지휘하는 ‘폭동진압작전’을 일단 저지시킬 수는 있지만, 특수부대 전투원 300명이 한미련합군의 포위망을 뚫고 북에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1980년 5월 20일 김일성 주석이 루이제 린저에게 광주민중항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청년들을 도와주러 가지 않은 것은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고 언급한 것은 긴급대책회의에서 광주민중항쟁 지원작전이 진지하게 검토되었으나 그 작전을 실행하지 못한 사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북이 광주민중항쟁 지원작전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북이 광주민중항쟁 지원작전을 결행하더라도, 광주민중항쟁이 여러 도시로 확산될 가능성은 불투명하였다. 조선인민군 특수부대 전투원 300명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광주민중항쟁이 여러 도시로 확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닐 수 없었다.
둘째, 북이 광주민중항쟁 지원작전을 결행하면, 미 제국과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이 그것을 구실로 하여 북침 전쟁을 도발할 수 있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에 조성된 위태로운 군사 상황을 살펴보자. 1999년에 출판된 글라이스틴의 회고록 ‘엄청난 뒤엉킴, 사소한 영향: 카터와 위기 속의 코리아(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에 의하면,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미 제국은 다음과 같은 군사행동을 취했다고 한다.
1) 한미련합군 전투준비태세가 데프콘(DEFCON) 5에서 데프콘 3으로 격상되었다.
해설 - 데프콘 3은 준전시상태에서 발령되는 것이다. 데프콘 3이 발령되면 한미련합군은 외출을 전면 금지하고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한다. 미 제국이 데프콘 3을 발령한 사례는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격투 사건과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밖에 없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한미련합군이 준전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2) 공중조기경보기와 정찰기들이 남측 공역에 증강·배치되었다.
해설 -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1980년 5월 23일에 작성된 미 제국 태평양사령부 1급 비밀문서에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P-2 초계기가 전라남도 근해에서 정찰비행을 하고 있었다고 수록되었는데, 그것은 조선인민군 특수부대가 잠수정을 타고 전라남도 해안으로 침투할 것에 대비한 조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 제국 공중조기경보기와 정찰기들이 군사분계선 남측 상공을 비행하면서 조선인민군 주력부대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3) 항공모함이 남측 해역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해설 -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자 미 제국은 64,000t급 항공모함 미드웨이호(USS Midway)를 일본 요꼬스까[요코스카](橫須賀) 해군기지에서 제주도 남쪽 바다로 긴급히 이동시켰다. 한미련합군이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준전시 상황에서 미 제국 7함대 항모강습단이 남측 해역에 진입한 것이다.
위에 열거한 현상들을 종합하면, 광주민중항쟁을 빌미로 북침 전쟁 도발 위험을 조성해놓고 광분하는 미 제국의 흉악한 몰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글라이스틴이 회고록에서 언급하지 않은 중대한 군사행동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광주민중항쟁 당시 미 제국의 북침 핵도발 징후다.
1980년 5월 당시 미 제국은 전라북도 군산 공군기지 핵무기고에 전술핵폭탄 150발을 보관하고 있었고, 주한 미 제국군 8군 사령부 산하에 ‘핵계획 및 핵작전 부서’를 두고 있었다. 1980년 당시 ‘단일 통합 작전계획(Single Integrated Operational Plan)'이라고 불리는 미 제국의 북침 핵타격 계획을 보면, 전라북도 군산 공군기지에 주둔하는 미 제국 공군 제8전술비행단 소속 F-4D 전폭기 4대가 전술핵폭탄을 장착하고 활주로 끝에서 출격 명령을 24시간 대기하는 이른바 ’신속 대응 경계(Quick Reaction Alert)‘를 연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9년 미 제국 국방부 장관 멜빈 레어드(Melvin R. Laird, 1922~2016)는 국방부 내부회의 중에 군산 공군기지에서 전술핵폭탄을 장착하고 출격한 F-4D 전폭기들이 15분 안에 북조선 비행장들을 타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미 제국에 비해, 1980년 5월 당시 조선은 미 제국의 공중 핵타격을 보복할 핵타격 능력을 아직 갖지 못했고, 미 제국의 공중 핵타격을 차단할 반항공 체계도 지금처럼 조밀하고 견고하지 못했다. 군산 공군기지에서 F-4D 전폭기들이 전술핵폭탄을 장착하고 출격하면, 15분 안에 북조선 비행장들을 타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멜빈 레어드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4. 미 제국의 광란적인 북침 핵도발 위협
1980년 5월 22일 600여 명의 열혈청년들로 조직된 민중무장대가 폭약뭉치 2,100개를 수류탄 신관 450개에 연결하여 전남도청 지하실에 쌓아놓았다는 사실을 파악한 ‘폭동진압부대’는 겁을 먹고 광주 시외로 물러났다. 그런 사정을 인지한 백악관은 광주민중항쟁이 자칫 장기화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했다. 백악관은 긴급 대책 수립을 서둘러야 했다.
1980년 5월 23일 백악관에서 긴급대책회의가 소집되었다. 긴급대책회의에는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E. Carter, 1924~2023년 현재 생존), 국무장관 에드먼드 머스키(Edmund S. Muskie, 1914~1996),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1928~2017), 국방부 장관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 1927~2019), 중앙정보국장 스탠스필드 터너(Stansfield Turner, 1923~2018), 국무부 부장관 워런 크리스토퍼(Warren M. Christopher, 1925~2011),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리처드 홀브룩(Richard C. R. Holbrooke, 1941~2010), 그 밖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들이 참석했다.
그 무렵 백악관 긴급대책회의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던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리처드 홀브룩은 긴급대책회의 하루 전인 5월 22일 서울로 비선 전화를 걸어 미 제국 대사 글라이스틴과 통화했다. 글라이스틴의 회고록에 의하면, 홀브룩과 글라이스틴은 비선 통화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중대사안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1) 폭동(광주민중항쟁을 비하하는 말-옮긴이)이 남측 전역으로 확산될 것인가?
해설 - 이것은 광주민중항쟁이 장기화되어 남측 도시들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당시 미 제국은 광주민중항쟁을 조기에 진압하여 민중항쟁이 남측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다급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2) 우리 군대(주한 미국군을 뜻함-옮긴이)가 위험에 처해 있는가?
해설 - 이것은 광주민중항쟁으로 조선인민군의 대남공격이 임박해 주한 미국군이 위험에 빠졌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당시 미 제국이 광주민중항쟁과 조선인민군의 대남공격을 결부시켜 상황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우리 군대를 철수해야 하는가?
해설 - 1980년 당시 미 제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주한 미국군 철 수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미 카터가 제기한 철군 문제에 광주민중항쟁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4) 혹시 북조선이 “어떤 위험한 일(something dangerous)”을 시도하지 않겠는가?
해설 - 홀브룩이 말한 ‘어떤 위험한 일’은 조선인민군의 대남 공격을 뜻한다. 이 질문을 받은 글라이스틴은 홀브룩에게 자기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조선인민군이 대남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아마도(probably)”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홀브룩은 글라이스틴으로부터 들은,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중대사안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홀브룩의 보고서는 이튿날 백악관 긴급대책회의에 제출되었다. 그러므로 1980년 5월 23일 백악관 긴급대책회의에서는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중대사안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날 백악관 긴급대책회의에서 의결된 결정 사항이 무엇인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 제국이 백악관 긴급대책회의 직후 다음과 같이 행동한 것을 보면, 결정 사항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백악관 긴급대책회의 다음날인 1980년 5월 24일 한미련합사령관 존 위컴은 미 제국 항공모함 코럴씨호(USS Coral Sea)가 남측 해역에 도착할 때까지 광주진압작전을 연기하라는 명령을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에 하달했다. 이 명령이 무슨 뜻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직후,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제주도 남쪽 바다에 이동, 배치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5월 23일 긴급대책회의에서 항공모함 1척을 남측 해역에 더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결정에 따라 필리핀 근해에서 대기하고 있던 60,000t급 항공모함 코럴씨호가 제주도 남쪽 바다로 긴급히 이동했고, 제주도 남쪽 바다에 배치되었던 미드웨이호는 동해로 진입했다.
항공모함 코럴씨호가 필리핀 근해에서 제주도 남쪽 바다까지 이동하려면 시간이 걸렸으므로, 위컴은 항공모함 코럴씨호가 제주도 남쪽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광주 진압 작전을 연기하라는 명령을 전두환 군사파쇼집단에 하달했던 것이다.
위컴의 진압 명령을 받은 ‘폭동진압부대’가 제2차 광주 진압 작전을 개시한 시각은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였다. 그러므로 필리핀 근해를 출발한 항공모함 코럴씨호가 전속력으로 항행하여 제주도 남쪽 바다에 도착한 날은 1980년 5월 26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미 제국의 북침 핵도발 만행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1980년 5월 26일 미 제국의 전략핵잠수함 패트릭 헨리호(USS Patrick Henry)가 동해에 진입했다. 6,800t급 전략핵잠수함 패트릭 헨리호는 핵탄두를 장착한 폴라리스(Polaris)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16발을 탑재하였다.
위에 서술한 내용을 보면, 광주민중항쟁 당시 한미련합군에 준전시 상태를 발령한 미 제국은 조선이 광주민중항쟁 지원작전을 결행하는 경우 그것을 구실로 대북 핵공격을 감행하려고 획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미 제국은 핵공격 위험을 고조시켜 북침 전쟁을 도발하려는 엄중한 사태를 벌여놓은 것이다. 조선이 광주민중항쟁 지원작전을 진지하게 검토하였으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오늘 군사 정세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고도화된 전략핵무력과 전술핵무력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핵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로써 미 제국은 핵제국의 압도적인 지위를 상실하였다. 조선의 대미 전략핵타격 준비태세는 미 제국의 대북 핵공격 위험을 근원적으로 억제하고 있으며, 조선의 대남 전술핵타격 준비태세는 윤석열 종미우익 정권과 한미련합군을 치명적인 위험 속에 몰아넣었다. 국제정세를 보면, 미 제국의 군사력은 중국의 대만해방전쟁 준비와 로씨야[러시아]의 노보로씨야 해방작전으로 분산되었다. 오늘의 정세는 조선이 영토완정을 실현하기 위한 ‘남반부 해방전쟁’을 결행할 주·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음을 보여준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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