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부터 기록 남은 '상서로운 동물', 실제론 색소 결핍 돌연변이
4년 전부터 홍천 출현, 율무밭에서 보통 새끼들과 먹이 찾고 모래목욕
» 눈과 뺨의 새깔을 뺀 몸의 다른 부위가 흰 꿩. 색소 결핍(루시즘) 현상으로 드물게 나타나 과거에는 상서로운 동물로 취급하기도 했다.
지난 7월 초 강원도 홍천에 흰꿩이 나타난다는 소식 전해 듣고 장마가 소강상태를 보일 때마다 들러 탐색했다. 날아다니지 않고 풀숲이 우거진 곳에서 땅으로 은밀하게 걸어 다니는 꿩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봄이나 초겨울이었다면 오히려 눈에 잘 띄었을 것이다.
동네 주변을 몇 바퀴씩 돌기도 하고 나타날 만한 장소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찜통 같은 더위가 더 덥게 느껴졌다.
동네 분들에게서 자주 목격되는 장소와 시간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큰 도움이 되었다. 이동 동선과 자주 나타나는 곳을 파악하고 주변의 환경과 정황들을 정리해 가며 탐색 범위를 좁혀갔다.
» 흰꿩이 출현하는 장소를 볼 수 있는 오이밭.
오이 밭에서 일을 하시던 동네 아주머니께서 보다 못해 지금은 숲이 우거져 보기 힘드니 내년 3월에 오면 잘 보일 것이라고 말을 건넸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셨다. 언제든지 나타나면 연락을 해줄 테니 더운데 괜한 고생하지 말라고. 흰 꿩은 4년 전부터 보이기 시작했고 며칠씩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다고 한다.
흰 꿩이 서식하는 이곳은 12채 정도의 가옥이 있는 작은 마을로 옥수수, 율무, 오이 밭과 다락 논이 조성돼 있는 깊은 산골이다. 주변엔 산이 울타리처럼 동네를 감싸고 꿩들은 그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밭 주변 둘레를 탐색하는 거리는 1.3㎞ 정도다. 옥수수와 율무 밭이 대부분이다. 꿩들에게는 은신처와 훌륭한 먹이터가 있는 셈이다.
» 보통의 어린 꿩. 갈색의 보호색을 띤다. 암수를 구별할 만큼 자랐다.
올해 태어난 꿩 새끼가 옥수수밭과 율무밭을 헤집고 다닌다. 땅 색과 비슷해 잘 보이지 않는다. 인기척이 나면 숨거나 움직이지 않아 더더욱 보기 힘들다. 열 마리가 넘는 꿩 새끼가 무리를 지어 흙 목욕을 하고 먹이를 찾으며 빠르고 흐트러지지 않게 행동한다. 체계가 잘 잡혀 있다. 어린 꿩은 무리를 지어 행동해야 위험에서 쉽게 벗어나는 생존전략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새끼들은 제법 암꿩과 수꿩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어른 꿩에 미치지 못하는 미성숙 단계의 어린 꿩을 꺼벙이라 부르기도 한다. 흰꿩 영역에서 새끼들이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흰 꿩의 새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번식기에 수컷 한 마리에 암컷 몇 마리가 작은 무리를 지으나 겨울에는 암수가 따로 무리를 만든다. 번식기에는 가장 힘세고 나이 든 수컷이 여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린다.
» 어린 꿩들이 무리지어 흙목욕을 하며 진드기를 비롯해 몸에 달라붙은 해충을 털어내고 있다. 꿩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다.
» 목욕 중에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7월 21일 아침, 율무밭에서 흰색 물체가 어른거린다. 움직이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흰꿩이었다. 처음 마주한 흰꿩이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흰꿩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카메라 파인더 안을 꽉 채워 흰꿩 몸 전체가 나오질 않는다. 율무잎 때문에 흰꿩 모습이 가려져 촬영조건은 좋지 않았다.
잠시 후 흰꿩은 우거진 율무밭으로 사라지더니 모습을 감췄다. 몸 전체를 촬영하지 못했지만 흰꿩을 확인해 다행이었다.
꿩은 위급상황이 아니면 잘 날지 않는다. 날더라도 멀리 날지 않는다. 너무 놀라면 머리만 풀숲에 처박는 습성도 있다. 꿩은 대부분 땅에서 재빠르게 걸어 다니며 생활한다.
» 율무밭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흰꿩.
» 수컷 흰꿩이 율무밭에 모습을 드러냈다.
흰꿩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려도 나타나질 않는다. 안타까운 마음만 앞선다. 다시 율무밭과 옥수수밭 둘레를 서너 번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율무밭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뜻밖에 율무가 덜 자란 곳에서 흰꿩이 온몸을 훤히 드러낸 채 먹이를 찾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바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우거진 율무밭으로 몸을 숨긴다. 꿩은 이동 동선과 먹이터가 정해져 있으며 평생 그곳을 지키며 살아간다. 밤이면 천적을 피해 나무위에 앉아 잠을 잔다. 이른 아침에 꿩이 나무에서 내려와 지정해 놓은 영역에 앉는 것을 꿩이 내린다고 한다.
» 흰꿩이 목을 바짝 추켜들고 주변을 세밀하게 살핀다.
»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 조심스럽게 흰꿩이 먹이를 찾고 있다.
꿩은 예로부터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고 익숙한 동물이다. 보지 않던 흰색 꿩이 나타나면 눈에 뛸 것이고, 낯선 자연현상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역사서인 <동사강목>을 보면, 신라 소지왕 18년 "가야에서 꼬리 길이가 다섯 자인 흰꿩을 계림에 바쳤다"는 글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4년의 기록에도 "옛부터 상서로운 물건은 착한 임금의 세상에 감응하여 나오는 것"이라며 "전년도 평강에서 강무할 때 흰꿩이 임금의 수레 앞에 나타났다"는 사례를 들었다.
우리 민족은 흰색을 숭상했고 흰옷을 즐겨 입었다. 그래서인지 흰 동물의 출현을 국가의 태평성대를 알리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생각했다.
흰 동물은 드물게 나타나는 백색증(알비노)인 경우가 많다. 유전적인 원인에 의해 멜라닌 색소가 덜 생겨 털이 희고 눈과 피부는 혈액이 비쳐 붉게 보인다. 그러나 루시즘이 나타난 동물은 부분적이거나 불완전한 색소 결핍 현상을 보인다. 특히 백색증과 달리 눈 색깔은 일반 개체와 같다. 루시즘은 유전적 돌연변이로 생긴다.
» 일반적인 수컷 꿩의 깃털은 화려하다.
» 흰꿩은 깃털은 흰색이지만 눈과 볏은 일반 꿩과 같은 색이다.
흰 꿩과 꿩은 민화에도 나오는데, 높은 지위에 올라 고귀한 신분이 되고자 하는 마음과 출세와 길상 의미를 담는다. 꿩의 깃은 길고 아름다워, 예부터 머리 장식이나 농기의 장목으로 사용됐다.
깃발의 꼭대기에는 꿩의 깃털이 꽂혀 있다. 그것 자체가 신성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대 고구려에서는 개선한 장군의 머리에 꿩의 깃털을 꽂아 주었는데, 이는 영광과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암꿩은수꿩과 다르게 화려한 깃털 대신 단순한 갈색의 보호색 깃털을 가지고 있다.
» 흰꿩은 유달리 경계심이 많아 보인다. 아마도 주변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깃털 색깔 때문일 것이다.
꿩은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보는 텃새이다. 산란기는 4월 하순에서 6월까지이며 10∼18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 포란기간은 21일이다.
새끼는 알에서 깨어나면 곧 활동하고 스스로 먹이를 찾는다. 평지와 800m 이하의 산지에서 산다. 수십 종의 나무열매, 곡식, 풀씨 등과 각종 곤충, 작은 동물을 먹는 잡식성이나 찔레열매 같은 식물성 먹이를 더 좋아한다.
» 흰 깃털에 붉은 얼굴이 인상적이다.
암꿩은 수컷의 화려한 깃털과 다르게 단순한 갈색이며, 특히 꽁지 부분이 마른 풀과 비슷해 주변 환경과 잘 어울려 쉽게 보이지 않는다. 천적의 침입을 받으면 새끼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부러 부상당한 체하여 위험을 면하는 습성이 있다. 이런 행위는 지상에 알을 낳는 조류에게 발달해 있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환경생태 웹진 <물바람숲>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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