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수도자의 마지막 가는길
» 기도하는 모습의 박공순 원장. 사진 김원
벽제 동광원의 박공순 원장이 지난 8월 14일 별세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87살이었다. 몸소 농사일과 공동체 집안일을 다 해온 박원장은 노환으로 거동이 어려워지자 한 달 반 동안 곡기를 끊고 단식을 하고선 귀천했다. 밝고 맑은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갔다.
내가 벽제동광원에 가서 박공순 원장을 인터뷰한 것이 2005년이었다. 김원 사진작가도 그 해부터 매주 벽제동광원을 방문해 박 원장과 공동체의 삶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의 마지막 가는 모습도 찍어 <한겨레> 사진웹진 <사진마을>의 `작가마당'에 있는 ‘김원의 여시아견’에 올렸다. 그 사진을 보면, 박 원장이 어떻게 갔는지 잘 알수 있다.
오늘 점심 때 동료들과 식사를 하면서, 추석을 앞두고 ‘앞으로 우리들 세대엔 성묘도 하기 어렵고, 제사도 지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대화 끝에 죽음에 대해서까지 얘기했다. 수명이 길어져 거동도 제대로 못하고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는 상태로 장수를 누린다는 게 축복만은 아닐 것이라는 얘기들을 하다가 박공순 원장의 부음을 들었다.
미국의 환경가 스콧니어링도 백세가 되자 곡기를 끊었다. 간디의 제자 비노바바베도 생의 마지막에 80일간 단식으로 삶을 마무리지었다.
인간이 연로해 신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박약해지면 생명에 대한 본능이 더욱 강하게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스콧니어링이나 비노바바베나 박공순과 같은 삶은 평소에 수도로 연단해온 강한 정신력으로 인해 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까지 생과 사가 둘이 아닌 여여한 모습을 보인 고승이나 기쁨으로 생을 마감한 박공순의 스승 이현필의 모습은 수도자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박공순의 스승 이현필(1913~1964)은 ‘맨발의 성자’ 또는 ‘동방의 성 프란체스코’로 불린다. 이현필은 1950년 한국전쟁 중 전라도 광주에서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리스도적 사랑의 실천과 완전한 순결의 기독교공동체를 꿈꾼 이현필 선생은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던 당시 “내가 밥을 먹으면 다른 사람이 먹을 몫이 줄어든다”며 거의 밥을 입에 대지 못한 채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겨울철 눈보라 속에서도 맨발로 걸어다니며 고아와 장애인들을 먹여살렸다. 그는 폐결핵 환자를 돌보다 쉰한 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예수 그리스도가 산상수훈에서 말한 사랑을 그만큼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을까.
이현필이 설립한 동광원에서 고아를 돌보는 이들은 이현필을 따르는 언님들이었다. 언님들은 자녀를 데리고 집을 나와 동광원에 합류한 이들이기에 자기들 자식들도 있었다. 그런데 동광원에서는 자기 자식들과 고아들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자기 자녀들을 고아들의 무리 속에 넣어 똑같이 키웠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똑같았다.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었다.
그 때 아이들이 오는대로 받다보니 먹이고 재우는 아이들이 무려 6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제대로 허가받은 고아원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많아지자 시청에서 아이들을 모두 다른 고아원으로 분산시켰다. 가까운 데로 보내면 아이들이 다시 찾아온다며 멀리 순천과 목포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 아이들이 절반 이상이 돌아왔다고 한다. 걸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빼고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며칠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동광원을 찾아왔다. 먹을 것도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동광원이 그래도 좋다고 찾아온 것이다. 고아들을 자식처럼 대하는 그곳이 어떤 곳보다 좋았던 것이다.
동광원이 특이한 것은 헌신적인 사랑만이 아니었다. 이현필로부터 훈련 받은 언님들의 삶은 경이로움 자체다. 늘 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대하는 겸손함이 몸에 베인 태도와 엄격한 순결, 그리고 애처롭고 아름다운 찬송과 절제된 규율이 있다.
그런 삶을 따르는 제자들이 남원동광원과 벽제동광원, 화순동광원, 무등산동광원, 광주 귀일원 등에서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다.
» 박공순 원장 지난 7월의 모습. 사진 김원
» 죽음의 단식을 하며 미소짓는 박공순 원장. 사진 김원
경기도 벽제 동광원에서 본 박공순 등 언님들도 감동 그 자체였다. 벽제동광원은 벽제 시립묘지에서 광탄쪽 외길로 20여분을 달려 개명산 자락에서 흘러온 계곡물을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그곳을 찾았을 때 박공순 원장은 한국 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 오래된 홀태로 벼를 탈곡하고 있었다. 그 옆에선 80~90살 할머니들이 토란대를 다듬고 있었다.
부양 받아야할 나이의 노인들이 많아 스스로 힘으로 살아가기엔 벅차보이기만 하지만, 이들은 일체의 원조 없이 자립하고 있었다.
수입이 거의 없으니 오직 집앞 밭과 산에서 나는 제철 음식과 나물들만으로 살아갔다. 그러니 이곳에선 무 꼬랑지 하나도 버려지는 것이 없었다. 땅 한 뼘에 들이는 공도 남달랐다. 홀태질하는 벼도 밭고랑 사이 두세 뼘의 땅에 남이 버린 모를 꽃아 놓았던 것이 자랐다.
흙집 뒤 처마 밑엔 이들이 지게지고 산에서 해온 겨우살이용 나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지난 56년 이곳보다 산에 더 가까운 앵무봉 밑에 풀로 엮은 초막에서 화롯불조차 없이 기도만으로 겨울을 날 때에 비하면 이마저도 호사라고 했다.
‘언님’들은 그 산에서 봄에는 나물만 뜯어먹고, 여름엔 쑥으로 죽을 쒀먹고, 가을엔 도토리를 주어 삶아 먹으며 버려진 땅 4천여 평을 개간해서 80년까지 가꿔 자립 기반을 닦았다. 그 뒤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80년대 초반 수도자들이 대부분 광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40~50명이 이 산에서 나는 것만으로 연명하며 수도생활을 했다.
벽제동광원 언님들은 물질 세상에선 가장 뒤처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이곳에 정착한 지 20년도 넘은 77년에야 전기를 들여왔고, 95년에 방 한 칸에 보일러를 놓았다. 그마저 아까워 지금도 땔감으로 난방을 했다. 스물다섯 살에 이곳에 와 50년이 다 된 박공순 원장은 그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약 한 번 쳐본 적이 없고, 풀을 베 썩힌 것만을 거름으로 써왔다. 바깥 사람이 보기엔 너무도 힘든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군불 지피던 할머니는 “세상에 이보다 좋을 순 없다”고 한다. 이런 궁벽한 곳의 무엇이 이렇게 잔잔한 미소를 가져다주었을까. 박공순 원장은 “숨쉬는 것이 기도지요. 하나님이 주신 공기를 마시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했다. 그는 “가지면 더 갖고 싶고, 하나님마저 이기려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소”라고 했다.
박공순 원장은 후두결핵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대자연의 모든 것에 감사하던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었다. 이현필은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53살로 임종하면서 “내가 죽으면 죄인이 죽은 시체이니 절대로 관에는 넣지 말고 헌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길가에 묻어 주고, 죄인의 송장을 사람들이 밟게 하시오”라고 당부했다.
이현필은 황홀경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기뻐서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 거리에 나가서 전하고 싶다.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라고 눈을 감았다.
그는 마지막을 “아, 기쁘지 않은가. 아~ 사랑으로 모여서 사랑으로 지내다가 사랑으로 헤어지라!”고 그가 평생 살아온 삶 그대로를 유언으로 남겼다. 이현필은 “청빈과 순결만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언님들은 그 유언 대로 철저히 순결하고 청빈하게 살았다. 박공순 또한 그의 스승처럼 갔다.
벽제 동광원의 박공순 원장이 지난 8월 14일 별세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87살이었다. 몸소 농사일과 공동체 집안일을 다 해온 박원장은 노환으로 거동이 어려워지자 한 달 반 동안 곡기를 끊고 단식을 하고선 귀천했다. 밝고 맑은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갔다.
내가 벽제동광원에 가서 박공순 원장을 인터뷰한 것이 2005년이었다. 김원 사진작가도 그 해부터 매주 벽제동광원을 방문해 박 원장과 공동체의 삶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의 마지막 가는 모습도 찍어 <한겨레> 사진웹진 <사진마을>의 `작가마당'에 있는 ‘김원의 여시아견’에 올렸다. 그 사진을 보면, 박 원장이 어떻게 갔는지 잘 알수 있다.
오늘 점심 때 동료들과 식사를 하면서, 추석을 앞두고 ‘앞으로 우리들 세대엔 성묘도 하기 어렵고, 제사도 지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대화 끝에 죽음에 대해서까지 얘기했다. 수명이 길어져 거동도 제대로 못하고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는 상태로 장수를 누린다는 게 축복만은 아닐 것이라는 얘기들을 하다가 박공순 원장의 부음을 들었다.
미국의 환경가 스콧니어링도 백세가 되자 곡기를 끊었다. 간디의 제자 비노바바베도 생의 마지막에 80일간 단식으로 삶을 마무리지었다.
인간이 연로해 신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박약해지면 생명에 대한 본능이 더욱 강하게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스콧니어링이나 비노바바베나 박공순과 같은 삶은 평소에 수도로 연단해온 강한 정신력으로 인해 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까지 생과 사가 둘이 아닌 여여한 모습을 보인 고승이나 기쁨으로 생을 마감한 박공순의 스승 이현필의 모습은 수도자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박공순의 스승 이현필(1913~1964)은 ‘맨발의 성자’ 또는 ‘동방의 성 프란체스코’로 불린다. 이현필은 1950년 한국전쟁 중 전라도 광주에서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리스도적 사랑의 실천과 완전한 순결의 기독교공동체를 꿈꾼 이현필 선생은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던 당시 “내가 밥을 먹으면 다른 사람이 먹을 몫이 줄어든다”며 거의 밥을 입에 대지 못한 채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겨울철 눈보라 속에서도 맨발로 걸어다니며 고아와 장애인들을 먹여살렸다. 그는 폐결핵 환자를 돌보다 쉰한 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예수 그리스도가 산상수훈에서 말한 사랑을 그만큼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을까.
이현필이 설립한 동광원에서 고아를 돌보는 이들은 이현필을 따르는 언님들이었다. 언님들은 자녀를 데리고 집을 나와 동광원에 합류한 이들이기에 자기들 자식들도 있었다. 그런데 동광원에서는 자기 자식들과 고아들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자기 자녀들을 고아들의 무리 속에 넣어 똑같이 키웠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똑같았다.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었다.
그 때 아이들이 오는대로 받다보니 먹이고 재우는 아이들이 무려 6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제대로 허가받은 고아원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많아지자 시청에서 아이들을 모두 다른 고아원으로 분산시켰다. 가까운 데로 보내면 아이들이 다시 찾아온다며 멀리 순천과 목포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 아이들이 절반 이상이 돌아왔다고 한다. 걸을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빼고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며칠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동광원을 찾아왔다. 먹을 것도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동광원이 그래도 좋다고 찾아온 것이다. 고아들을 자식처럼 대하는 그곳이 어떤 곳보다 좋았던 것이다.
동광원이 특이한 것은 헌신적인 사랑만이 아니었다. 이현필로부터 훈련 받은 언님들의 삶은 경이로움 자체다. 늘 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대하는 겸손함이 몸에 베인 태도와 엄격한 순결, 그리고 애처롭고 아름다운 찬송과 절제된 규율이 있다.
그런 삶을 따르는 제자들이 남원동광원과 벽제동광원, 화순동광원, 무등산동광원, 광주 귀일원 등에서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다.
» 박공순 원장 지난 7월의 모습. 사진 김원
» 사진을 찍는 김원 작가에게 잘가라며 이승의 이별을 고하는 박공순 원장. 사진 김원
경기도 벽제 동광원에서 본 박공순 등 언님들도 감동 그 자체였다. 벽제동광원은 벽제 시립묘지에서 광탄쪽 외길로 20여분을 달려 개명산 자락에서 흘러온 계곡물을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그곳을 찾았을 때 박공순 원장은 한국 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 오래된 홀태로 벼를 탈곡하고 있었다. 그 옆에선 80~90살 할머니들이 토란대를 다듬고 있었다.
부양 받아야할 나이의 노인들이 많아 스스로 힘으로 살아가기엔 벅차보이기만 하지만, 이들은 일체의 원조 없이 자립하고 있었다.
수입이 거의 없으니 오직 집앞 밭과 산에서 나는 제철 음식과 나물들만으로 살아갔다. 그러니 이곳에선 무 꼬랑지 하나도 버려지는 것이 없었다. 땅 한 뼘에 들이는 공도 남달랐다. 홀태질하는 벼도 밭고랑 사이 두세 뼘의 땅에 남이 버린 모를 꽃아 놓았던 것이 자랐다.
흙집 뒤 처마 밑엔 이들이 지게지고 산에서 해온 겨우살이용 나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지난 56년 이곳보다 산에 더 가까운 앵무봉 밑에 풀로 엮은 초막에서 화롯불조차 없이 기도만으로 겨울을 날 때에 비하면 이마저도 호사라고 했다.
‘언님’들은 그 산에서 봄에는 나물만 뜯어먹고, 여름엔 쑥으로 죽을 쒀먹고, 가을엔 도토리를 주어 삶아 먹으며 버려진 땅 4천여 평을 개간해서 80년까지 가꿔 자립 기반을 닦았다. 그 뒤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80년대 초반 수도자들이 대부분 광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40~50명이 이 산에서 나는 것만으로 연명하며 수도생활을 했다.
벽제동광원 언님들은 물질 세상에선 가장 뒤처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이곳에 정착한 지 20년도 넘은 77년에야 전기를 들여왔고, 95년에 방 한 칸에 보일러를 놓았다. 그마저 아까워 지금도 땔감으로 난방을 했다. 스물다섯 살에 이곳에 와 50년이 다 된 박공순 원장은 그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약 한 번 쳐본 적이 없고, 풀을 베 썩힌 것만을 거름으로 써왔다. 바깥 사람이 보기엔 너무도 힘든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군불 지피던 할머니는 “세상에 이보다 좋을 순 없다”고 한다. 이런 궁벽한 곳의 무엇이 이렇게 잔잔한 미소를 가져다주었을까. 박공순 원장은 “숨쉬는 것이 기도지요. 하나님이 주신 공기를 마시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했다. 그는 “가지면 더 갖고 싶고, 하나님마저 이기려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소”라고 했다.
박공순 원장은 후두결핵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대자연의 모든 것에 감사하던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었다. 이현필은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53살로 임종하면서 “내가 죽으면 죄인이 죽은 시체이니 절대로 관에는 넣지 말고 헌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길가에 묻어 주고, 죄인의 송장을 사람들이 밟게 하시오”라고 당부했다.
이현필은 황홀경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기뻐서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 거리에 나가서 전하고 싶다.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라고 눈을 감았다.
그는 마지막을 “아, 기쁘지 않은가. 아~ 사랑으로 모여서 사랑으로 지내다가 사랑으로 헤어지라!”고 그가 평생 살아온 삶 그대로를 유언으로 남겼다. 이현필은 “청빈과 순결만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언님들은 그 유언 대로 철저히 순결하고 청빈하게 살았다. 박공순 또한 그의 스승처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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