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25 10:13
최종 업데이트 17.09.25 10:13
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미세먼지 오염, 그리고 후쿠시마 참사가 보여 준 원전재난의 가능성은 '더 이상 위험한 에너지에 기댈 수 없다'는 깨달음을 확산시키고 있다.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중단으로 본격화한 탈핵 논쟁은 우리 사회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에너지체제를 전환할 수 있을 것인지 가늠 할 시험대가 되고 있다. <단비뉴스>는 기후변화와 원전사고의 재앙을 막고 '안전하며 지속가능한 에너지구조'를 만들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 지 모색하는 심층기획을 연재한다. (편집자)
"지진은 예고 없다!"
"원전 말고 안전!"
지난 9일 오후 4시, 울산 남구 삼산로 롯데백화점 앞 광장에서 시민 수천 명이 일제히 목청을 높였다. 국내 관측 역사상 최강의 5.8규모 지진이 경주에서 일어난 지 1년(9월 12일)을 맞아 최대 원전밀집지역인 울산에서 열린 탈핵 집회였다.
노인부터 어린이까지 목청 높여 '탈핵'
"지진은 예고 없다!"
"원전 말고 안전!"
지난 9일 오후 4시, 울산 남구 삼산로 롯데백화점 앞 광장에서 시민 수천 명이 일제히 목청을 높였다. 국내 관측 역사상 최강의 5.8규모 지진이 경주에서 일어난 지 1년(9월 12일)을 맞아 최대 원전밀집지역인 울산에서 열린 탈핵 집회였다.
노인부터 어린이까지 목청 높여 '탈핵'
▲ 지난 9일 울산 롯데백화점 앞에서 열린 탈핵 집회에서 ‘원전 말고 안전’ 등 손팻말을 들어 올리는 참가자들 | |
ⓒ 서지연 |
'안전한 사회를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이 이끈 이날 행사에서 시민 5천여 명(주최 측 추산)은 집회에 앞서 남구 번영로 울산문화예술회관부터 삼산로 롯데백화점까지 1.6킬로미터(km) 가량 가두행진을 벌였다. '핵발전소 14기도 모자라서 2기를 더 짓나'라고 쓴 현수막 뒤로 액운을 막아준다는 '삼두매' 조형물이 바람에 흔들리며 뒤따랐다. '핵발전소 14기'는 울산 반경 30km 내에서 이미 가동 중이거나 건설 중인 원전을 말한다. 그 뒤로 핵발전소를 덮칠 수 있는 해일, 붉은 악마 얼굴의 쓰나미, 멸종위기의 긴 다리 저어새, 방독면을 쓴 학생 등 다양한 상징물로 분한 참가자들이 발걸음을 이어갔다.
탈핵 대회, 탈핵 콘서트 등 3부로 나뉘어 저녁 9시까지 이어진 집회에는 환경운동연합·전국YWCA연합회 등의 활동가 뿐 아니라 80대 노인에서 초등학교 어린이까지 다양한 세대가 참여했다. 이들은 전인권, 안치환, 크리잉넛 등 가수들과 사물놀이패의 공연에 맞춰 어깨춤을 추고 손뼉을 치며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등 탈핵 구호를 외쳤다.
▲ 가두행진에 앞장선 ‘신고리5·6호기 백지화 울산시민운동본부’ 현수막과 그 뒤를 따르는 삼두매 | |
ⓒ 서지연 |
▲ 다양한 상징물로 분한 시민들이 가두행진에 나섰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방독면을 쓴 학생들과 저어새, 해일, 개구리로 분장한 참가자들. 개구리 분장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인근 개구리에서 고농도 세슘이 검출된 사건을 환기시킨다 | |
ⓒ 서지연 |
원전밀집지에 지진 공포, 수백만 시민 어쩌라고
참가자들은 수백만이 살고 있는 울산, 경주, 부산 일대가 '세계 최대의 원전 밀집지대'가 됐고 지진 등 재난 가능성이 있는데도 핵발전소를 더 짓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다울(39‧서울) 그린피스 활동가는 "부산과 울산에 위치한 고리원자력 발전소는 전 세계 186개 원전 단지 중 이미 가장 큰 규모이고 원전 인근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원전을 짓지 않아도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가능하며, 향후 5~10년 내에 대체에너지의 경제성이 원전을 웃돌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제원자력기구 원자로정보시스템(IAEA PRIS)을 보면 건설 완료된 신고리 4호기가 가동될 경우 고리‧신고리 원전 단지는 캐나다 브루스 원전 단지와 함께 각 8기의 원전을 보유한 세계 최대 원전밀집지가 된다. 여기에 신고리5‧6호기를 포함하면 총 10기로 캐나다 브루스를 밀어내고 단독 1위가 된다.
초등학생 아들의 손을 잡고 집회에 나온 조영(39‧여‧울산 매곡동)씨는 "지금 당장 우리가 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위험은) 우리 아이, 그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가 짊어져야 할 몫이 된다"며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 탈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버스로 3시간을 달려왔다는 곽이경(38‧여‧주부)씨는 "세계의 흐름이 탈핵인데 우리는 왜 거꾸로 가는가"라고 되물었다.
초등학생 아들의 손을 잡고 집회에 나온 조영(39‧여‧울산 매곡동)씨는 "지금 당장 우리가 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위험은) 우리 아이, 그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가 짊어져야 할 몫이 된다"며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 탈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버스로 3시간을 달려왔다는 곽이경(38‧여‧주부)씨는 "세계의 흐름이 탈핵인데 우리는 왜 거꾸로 가는가"라고 되물었다.
▲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탈핵 집회에서 진지하게 연설을 듣고 있는 어린이 | |
ⓒ 윤연정 |
신고리5·6호기 건설지역인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의 이종원(64) 상가발전협의회장은 "(과거에) 신고리3·4호기가 건설되면 관광객이 연 1천만 명 들어올 것이라고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이 말했지만, 실제로는 발전소가 들어선 후 지역경제가 다 죽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럼에도 탈핵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많은 데 대해 윤종오(45·새민중정당) 울산 북구 국회의원은 "한수원 등이 지역 언론을 매수해 여론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아이슬란드 부근의 섬나라 페로제도에서 온 케니스 폰슨(58·조선해양 엔지니어)씨는 "우리나라엔 원전이 없고 수력, 풍력 등을 사용한다"며 "해로운 에너지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시민적 합의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길가다 집회를 지켜보는 중이었다는 그는 "가장 걱정되는 것이 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인데, 처리하지 못할 거면 원전을 짓지 않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 '원전 말고 안전' 탈핵 집회 영상 | |
ⓒ 서지연, 박진홍 |
찬핵 집회에선 삭발 결의까지
그러나 탈핵을 외치는 목소리만큼 찬핵 주장도 거셌다. 비슷한 시각 울산 남구 태화강역 광장에서는 신고리5‧6호기 건설 중단에 반대하는 단체가 맞불 집회를 열었다. 한수원 노조원‧가족과 울주군 서생면 주민 등 7개 단체가 참여한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8천여 명이 모였다.
무대에 오른 김병기(55) 한수원 노조위원장은 "원전 시공사와 협력사, 원전을 자율 유치한 주민들 모두 나라를 생각한 죄밖에 없다"며 "원전을 없애면 에너지안보가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과 이상대(60) 서생면주민협의회장 등 4명은 신고리5·6호기 건설 중단 저지를 결의하며 현장에서 삭발을 하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이후 "전기요금 폭등으로 국민요금 배가 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태화강역에서 터미널사거리까지 2.3km 구간을 행진했다.
▲ 김병기 한수원노조위원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상대 서생면주민협의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등 4명이 삭발식을 하고 있다 | |
ⓒ 손복락 |
생업 잃은 주민, 이주 무산될까 '건설 중단 반대'
찬핵 집회의 구호가 '에너지안보'나 '전기요금 폭등 우려' 등이었던 것과 달리, 신고리5·6호기 건설예정지인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신리마을 주민 다수의 걱정은 '이주와 보상 무산'이었다. 지난달 10일 <단비뉴스> 취재진이 마을을 찾았을 때, 한 달여 전(7월 14일) 공사가 중단된 78만 평(257만4002㎡) 가량의 부지에는 수십 미터(m) 높이의 크레인 9대가 멈춰선 채 흙먼지만 일고 있었다.
공정률 30%에서 중단된 건설 현장은 땅바닥이 파헤쳐진 채 방치됐거나 파란색 비닐이 덮여 을씨년스런 모습이었다. 자줏빛으로 녹슨 철근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깨진 돌무더기와 잡초 사이로 물이 고인 웅덩이는 폐수에 녹조가 엉겨 거무죽죽했다. 농지와 집이 수용돼 이주한 골매마을 주민들에게서 한수원이 어업보상으로 사들인 어선 20여 척은 공사장 한편에 방치돼 있었다. 인기척 없는 현장에는 세찬 파도 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 지난 8월 10일 찾아간 신고리5·6호기 공사현장.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신고리 3·4호기 | |
ⓒ 강민혜 |
▲ 신고리 5·6호기 공사 반경 내 모습 | |
ⓒ 서지연, 박진홍 |
▲ 신고리5·6호기 현장인 골매마을의 빈 집들이 헐린 자리에 한수원이 주민들에게서 사들인 어선들이 방치돼 있다 | |
ⓒ 박진홍 |
가까이에 이미 신고리 1·2호기와 3·4호기가 있는 신리마을의 주민 500여명은 원전으로 인해 일상이 거듭 무너졌다. 이곳이 고향이라는 정옥진(73·여·가명)씨는 "(2008년 공사가 시작된) 신고리3·4호기 때부터 근 10년 간 공사 분진 때문에 빨래를 널면 새카맣게 먼지가 묻었다"며 "호흡기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신고리 5·6호기 공사가 시작되고부터는 매일 밤 돌 깨는 소리(기초굴착작업)에 잠을 못 이루었을 정도라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마을 중간쯤에 있는 박봉남(81·여)씨의 식품잡화점은 곧 무너질 듯한 모습이었다. 기초굴착작업 이후 지반이 흔들리면서 무너진 천장 틈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내부 모서리마다 검푸른 곰팡이가 슬었다. 건물 외벽에는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물이 흘러내려 언뜻 보면 폐가처럼 느껴졌다.
▲ 박봉남 씨의 점포. 공사 영향으로 곳곳이 무너지고 물이 새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다 | |
ⓒ 박진홍 |
그런데도 박씨는 집을 수리하지 못한다. 이 마을은 지난 2016년 집단 이주 및 보상을 조건으로 신고리5·6호기를 자율 유치했는데, 아직 협상과 보상 절차가 마무리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씨는 "집이며 농지며 다 가격 책정을 해 놓은 상태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다"며 "지금껏 참고 살아온 대가로 이주비용을 대주겠다고 했는데, 건설 중단이 웬 말이냐"고 목청을 높였다.
▲ 박봉남 씨 집의 무너진 천장. 굴착공사 등의 영향으로 땅이 울리고, 그 충격으로 집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 |
ⓒ 강민혜 |
"원전 옆 40년 거주, 합당한 보상 필요"
"신고리 1~4호기가 들어설 때는 우리 지역 주민들이 생업 전폐하고 매일 반대 시위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밀어붙였잖아요. 우리는 40년간 원전을 끼고 살면서 피해 본 사람들입니다."
이상대 서생면주민협의회장은 지난 2013년 신고리5·6호기 자율 유치에 앞장섰다. 어차피 지어질 원전이라면 1500억 원의 '자율유치 인센티브'를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다. 이 회장은 "솔직히 원전 8개 있으나 10개 있으나 뭐가 다르냐"며 "우리 주민들 좀 잘 살게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주민들 설득해서 자율 유치하는 데 5년 걸렸는데, 공론화위원회에서 3개월 만에 신고리5·6호기 건설 중단(백지화) 여부를 결정한다고 하니까 납득이 가겠냐"며 "신고리 5·6호기는 예정대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상대 회장은 “40년간 원전 주변에서 희생한 주민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며 신고리5·6호기 백지화에 반대했다 | |
ⓒ 박진홍 |
이 회장은 현재 신고리5·6호기 건설중단 반대 울주군 범군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반대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 달 1일에는 한국수력원자력 노동조합,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등과 함께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공론화위원회 활동 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땅도 바다도 잃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신리 마을은 '반농반업(반은 농업, 반은 어업)'이에요. 배 과수원을 비롯해 농가 소득이 괜찮았는데, 3·4호기부터 5·6호기까지 지으면서 부지에 과수원, 농지가 거의 다 편입됐어요. 바다 역시 마찬가집니다. 현재 우리 주민 생계수단이 없는 거예요. 이주 준비를 거의 다 했는데, 먹고 살 방도가 없어요."
최해철(65) 신리마을 임시 이장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마을에는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주민들이 많다. 최성근(60)씨는 1970년 고리 1호기가 들어서면서 고리에서 골매로, 신고리 3·4호기가 들어서면서 골매에서 신암으로 이주했다. 고기 잡던 배를 한수원에 팔아 어업보상을 받았다. 지금은 바다에 어망 몇 개를 던져두는 것 외에 벌이가 없어 "있는 돈을 까먹고 있다"고 말했다.
40여 년째 해녀 일을 해온 장금자(66)씨는 "예전엔 바다에 전복, 해삼 등 해물이 많아서 돈을 잘 벌었다"며 회고했다. 하지만 신고리 3·4·5·6호기 유치 이후로는 발전소에서 8km 거리바다에 울타리를 쳐 못 들어가게 막는다고 한다. 장 씨는 "물질 할 수 있는 해역이 줄어 생계가 어려운 형편"이라며 "발전소를 마저 지어서 이주와 보상을 해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 장금숙(오른쪽)씨와 언니 장금자씨. “신리마을에서 수십 년 해녀 일을 하며 살았지만 원전이 들어선 후 물질이 어려워졌다”며 보상을 받아 이주하길 원했다 | |
ⓒ 박진홍 |
"원전 옆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데 있노"
그렇다고 신리마을 주민들이 원전의 안전성을 믿는 건 아니다. 3대 째 신리 마을에 산다는 이병철(75·가명)씨는 기자에게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정부가 탈핵을 추진하려면 먼저 원전 지역 주민들의 피해를 살피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웠다.
"일본 원전사고 지역 사람들도 방사능 묻었다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근처에 못 오라 한단다. 원전 옆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데 있노? 경북에서 쓰는 발전소 경북에다 짓고, 전국에 쓸 발전소 전국에 지어야 하는 거 아니가. 3·4호기 들어올 때 반대 시위도 했는데 안 되더라. 정부 정책이니 별 수 있나. 우리 주민들도 같은 나라 사람인데, 대책을 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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