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한국연구재단(이사장 정민근)이 지난 2월 말 학술·연구분야에 '새마을운동'을 신설한 것으로 확인됐다.
▲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분야 분류에 '새마을'이 신설·추가됐음을 알리는 공지글(사진). 재단 담당자는 정당한 개정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절차적인 하자와 재단 내부 인사들의 관련성 등을 살펴볼 때 무리한 임의 개정에 가까웠다. | |
ⓒ 한국연구재단 |
갑작스러운 새마을운동 신설을 두고 재단이 박근혜 정권에 '코드 맞추기'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가 재단을 통해 정부 차원에서 '박정희 띄우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한국연구재단 측은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신설이었고, 정부 차원의 지시는 전혀 없었다"라고 반박했다.
한국연구재단은 미래창조과학부의 지원금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준정부기관이다. 한국과학재단·한국학술진흥재단·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이 통합돼 지난 2009년 6월 출범했으며, 해당 분야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이 주 업무다. 2015년도 사업 총예산은 4조2224억 원이었고, 학술인문사회사업 예산만 2409억 원에 이르렀다.
1990년대 이후 처음으로 분류 개정... 새마을운동 신설돼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한국연구재단은 이전의 학술·연구분야 분류 중 지역개발과 지적학·지역경제·농촌개발계획 등을 삭제하고, 중분류에 '새마을/국제개발협력'과 더불어 '새마을개발협력' 관련 교육·훈련, 조직·리더십, 공동체·자원봉사 등의 분류를 신설했다. 이번에 신설된 새마을 학술·연구분야 영문명은 'Saemaul Undong(새마을운동)'이며, 목적은 '해당 분야 연구 활성화'다.
▲ 지난달 말,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분야 분류에 '새마을'이 신설·추가됐다(사진). | |
ⓒ 한국연구재단 개정내역 |
이는 향후 새마을운동 연구에 합법적 연구비 지원이 가능하며, 관련 연구를 독려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재단 측 담당자는 "분류 분야가 만들어지면 일단 관련 분야가 하나로 모이기 때문에, 해당 지원 과제가 많아질 수는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새마을운동이 신설된 학술·연구분야 분류 개정은 1990년대 이후 처음이다.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분류의 다른 항목이 사회복지학·인문지리학·교과교육학 등임을 고려하면 '새마을운동' 분야의 신설은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 때 추진된 새마을운동이 한국 경제성장에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관련 학회도 존재하고, 소수이긴 하지만 이를 학문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갑자기 새마을운동을 학술·연구분야에 신설한 것은 재단 차원의 '정권 코드 맞추기'거나 정부 차원의 '박정희 띄우기'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학문 분류에 정통한 인문학 분야 연구자인 A교수는 이런 사실을 제보하며 "언제부터 '새마을운동'이 공식 학문 분야로서 이런 위상을 주장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라며 "새마을을 연구하는 곳은 특정 대학과 소수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코드 맞추기'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A교수는 "연구재단의 분류체계 변경이 중요한 이유는 그에 따라 연구비 명목으로 세금이 투입되기 때문"이라며 "새마을 분야는 아직 학문으로 분류할 정도의 분야가 아니다, 과거 4대강 관련 온갖 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했듯 이를 통해 새마을운동을 연구하겠다는 일부 어용·관변학자들에게 연구비가 흘러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 새마을학회장 등 재단 내 '새마을 관계자' 다수
이와 관련, 흥미로운 사실은 재단 내에 이상하리만큼 '새마을 관계자'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번 학술·연구분야 분류 개정을 담당한 사람은 지난해 사회과학단에 근무했던 이광희 현 성과확산팀 팀장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팀장의 은사는 '새마을 전도사'로 알려진 노화준 영남대 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이다.
또한 같은 팀 직원인 노유진 연구원은 지난 2011년 1월 노화준 교수와 함께 '새마을운동의 추진논리와 발전전략의 재음미'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3월 학술진흥본부장으로 선임된 이상엽 한서대 교수의 경우, 과거 대전·충남 지역 새마을 학회장을 지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광희 팀장은 "참고하기 위해 은사(노화준 교수)에게서 새마을 대학원에서 뭘 가르치는지 커리큘럼을 받았고, 이상엽 본부장이 새마을 전문가라고 해서 관련 자료도 받았다"면서도 "이상엽 교수가 이전에 새마을 학회장이었던 것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상엽 학술진흥본부장은 특히 지난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만든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관련 사실 확인을 위해 수차례 재단 측에 전화했으나, 이 본부장은 비서를 통해 "지금 바쁘다", "실무자와 통화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만 답변하며 통화를 거부했다.
▲ 제4대 재단 이사장인 정민근 전 포항공대 교수(사진)는 박정희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70년~1974년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다녔다. | |
ⓒ 한국연구재단 |
재단 이사장인 정민근 포항공대 명예교수도 눈에 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재임 중인 1970~1974년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다녔다. 지난 2014년 취임한 정 이사장은 이후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 (이공계 우대 정책을) 잘 시작했는데, 최근 20년간 연구자들을 너무 몰아붙였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처럼 연구자의 기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광희 팀장은 '정부 차원의 박정희 띄우기' 시선에 대해 "(정권 차원의) 외압이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고 일축했다. 이어 "용어는 학술연구분야 분류지만, 우리 재단에서는 이걸 학문 분류가 아닌 연구 분류로 보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한편 2016년 행정자치부 예산안에 따르면 '새마을운동 지원예산'으로 143억 원이 책정됐으며, 행자부는 국비 296억 원 포함 총 사업비 866억 원을 투입해 2017년까지 새마을 전시관·테마촌 등을 조성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2017년은 '박정희 탄생 100주년'으로, <CBS>에 따르면 경북 구미시에서는 '(박정희) 탄신 TF팀'이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적합성 관련 공문 발송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문제는 이번 개정 과정이 합리적이었는지 여부다. 이 팀장은 "(이번 개정은) 2~3년 전부터 진행해왔고, 전체적인 분류체계 개정의 일환일 뿐"이라며 "제가 새마을 쪽 자료를 다 찾아봤고, 문제가 생길까 싶어 자문료를 주고 자문도 다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팀장이 "자문을 받았다"며 거론한 교수들은 "나는 개정에 반대했다, 공식 자문을 한 게 아니었다"거나 "(자문한 사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L교수는 기자가 '한국연구재단' 얘기를 꺼내자마자 "그건 대통령과 연결되는 굉장히 민감한 주제"라며 답변을 꺼렸다. M교수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지역개발쪽 의견을 구하긴 했다"라며 "그런데 새마을 항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L교수는 "사실 새마을 쪽이 경제학이나 법학처럼 독립된 학문이 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면서 "정상적인 과정이면 이게 의제로 상정되지 않았을 텐데 상정이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새마을 쪽이 너무 무리하게 국제개발 쪽에 들어온 것"이라며 "제가 정말 전문가로 꼽는 분이 몇 있는데, 그중 새마을학회에 가입하신 분은 한 분도 없다"고 꼬집었다.
절차상 문제도 있었다. 재단 홈페이지에 공시된 '학술·연구분야 분류의 개정'에 따르면 분류개정은 5개 절차를 거치게 돼 있다. 학회와 단체, 연구자들의 의견수렴을 시작으로 해, 학회 명의로 개정 요청 공문을 받은 뒤 적합성 검토 결과가 담긴 공문을 재단 명의로 발송해야 한다. 하지만 국제개발 분야 관련, 관련 학회의 공문을 받았으면서도 여기에 적합성 검토 공문 발송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 재단 홈페이지에 공시된 '학술연구분야분류의 개정(사진)'에 따르면 분류 개정은 5개 절차를 거치게 돼 있다. 하지만 이 팀장은 이 절차를 빼놓은 뒤, "연구자들에게 알려주는 것(공지)으로 갈음한 것 같다. 알리긴 알렸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 |
ⓒ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 |
담당자도 이러한 문제를 사실상 인정했다. 이광희 팀장은 "제가 관련 업무를 쭉 해왔는데 솔직히 이렇게 한 적은 없었다"며 "연구자들에게 알려주는 것(공지)으로 갈음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개정 절차가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지원이 많이 오면 수요를 다 반영할 수 없으니까 저렇게 (복잡한 절차를) 해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개정 과정을 담당하는 정책연구팀에서는 "이번 개정은 학회 요청이 아닌 해당 과학단의 판단이었기 때문에 따로 공문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세부 전공은 전적으로 학문단에 의존한다"며 "분야 신설과 관련한 모든 사유를 정량적으로 판단하는 게 쉽지는 않다"며 이 팀장과는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
"내부과제 분류하기 위한 기준" vs "가장 큰 목적은 연구비 지원"
이광희 팀장은 "새마을과 관련해 분류 개정 요청도 있었다"고 말했지만, 누가 요청했는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 팀장은 지난 2월 29일 대전청사에서 만난 기자에게 '새마을학 학문 분류 요청'이라는 문서를 보여줬지만 "개인 정보라서 연구자 이름은 말해 줄 수 없다"라며 "영남대 박 교수"라고만 말했다.
이 팀장은 "(개정 요청을) 보낸 건 연구자 1명이지만 나름 대표해서 보냈을 것"이라며 "요청이 왔는데 굳이 안 해줄 이유도 없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관련 지원 과제들이 있었다"며 그 근거로 2015년 출판지원사업 지원과제 200개 중 2개, 신진연구자사업 지원 1100여 개 중 9개가 새마을 관련 과제로 왔다"고 말했다.
적합성을 검토할 때는 개정 요청 분야의 연구자 수나 지원과제 건수 등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도 미흡했다. 예컨대 지리학의 경우 대한지리학회, 도시지리학회, 지리정보학회, 한국지역학회 등 수많은 학회가 있는 것에 반해 새마을 쪽은 '한국새마을학회', '새마을글로벌포럼' 외에는 찾기 힘들다. 공교롭게도 둘 다 경북 영남대학교 법정관 409호에 있다. 학회 인터넷 홈페이지는 접속이 안 될 뿐 아니라,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팀장은 "이쪽이 민감한 주제라 아무도 안 하려 했음에도 제가 진행했다"며 "저는 지역개발학회 자문을 받는 등 충분한 근거로, 소신 있게 판단해서 (새마을 분야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밖에서 보면 큰일인 것처럼 볼 수 있지만, (분류 개정은) 내부에서 과제들을 편하게 분류하기 위한 기준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이번 개정에 반대했다는 재단의 자문위원 L교수는 "분류 체계 변경의 가장 큰 목적은 연구비 지원"이라고 지적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