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이 다시 오셔도...
이기심에 굴복해버리면 마구니가 되는 것
» 프란치스코 교황과 도널드 트럼프의 ‘멕시코 난민 장벽’ 설전을 보도하는 CNN 뉴스.
-김형태 <공동선> 발행인·<법무법인 덕수> 대표변호사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건 뭐, 공자님, 부처님, 예수님이 오셔도 별 대책이 없으시겠다 싶습니다.
“공자 당신, 어느 편이야? 공화당이야, 민주당이야? 예수 당신, 진보야, 보수야, 어느 편이야?” 아마 이런 다그침을 받고는 그저 하릴없이 빙긋이 웃으시거나, 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는 군중들 앞에서처럼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언가 글자나 쓰고 계실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왜곡한 언론 호들갑
얼마 전 전세계 언론들이 예의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단죄했고, 트럼프는 이에 대해 종교 지도자가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판단하는 건 수치스런 일이라고 받아쳤다고. 교황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지중해 바다에서 혹은 멕시코 국경에서 집과 먹을 것을 찾아 목숨을 걸고 있는 난민이나 이민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다리를 놓으려 하지 않고 장벽을 쌓으려는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복음적 권고를 하신 것이지, 언론들이 흥밋거리로 왜곡시킨 것처럼 트럼프 개인에 대해 혹은 공화당에 대해 편가르기를 해서 반대하거나 찍지 말라고 호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교황이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방향으로 사건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언론들 역시 자신들의 기사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어야 돈을 벌 수 있으니, 멕시코 이민자들에게 장벽을 세우자는 트럼프나 이런류의 기사에 생각 없이 재미있어 하는 대중들이나, 언론들 모두 다 이기심의 바벨탑을 쌓는 이들입니다.
종북신부·종북주교로 몰아 신문광고 내고 축출 데모까지
우리 형편은 어떤가요.
천주교 주교회의가 4대강사업이나 핵발전, 노동법 개악, 국정 교과서에 반대하는 공식입장을 발표하자 일부 가톨릭 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신부들은 물론이고 일부 주교들을 종북 신부, 종북 주교로 몰아 신문광고를 내고 축출 데모까지 벌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사회에 널리 알려진 분들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가치가 상대적이라지만, 이기심을 털어버리고, 나, 우리 가족, 우리나라, 내 생각, 내 이익만을 내세우는 울타리를 허는 일. 이건 그 어느 것에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 가치요, 기독교의 복음이며, 모든 종교에 공통된 알짬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정치적이니 종교인답지 못하니 하면서 어느 한편으로 몰아 상대화시키는 건 마구니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 개인이 마구니가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마구니요, 나중에 꼭 대가를 받아야 할 업(業)입니다.
요즈음 남북관계가 파탄나고 미국과 중국이 맞서게 되면서 가장 즐거워하는 이들은 무기 만들어 팔아 돈 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사회주의자라고 딱지 붙이고, 정치적이라고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이들도 대부분 트럼프처럼 스스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부하며 자신의 믿음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큰소리 칩니다. 종북 주교 운운하는 우리 일부 신자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이들이 큰소리 치는 종교적 근거는 “예수 믿어 천당”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찬 곳이니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해주심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시작이자 끝이다. 세상 일은 교회가 간여할 바가 아니니 난민들이 몰려 와 우리의 안온한 삶을 위협하는 건 절대 안 된다. 무기 팔아 돈 벌고, 말 잘 안 듣는 노동자를 해고할 자유가 있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건 교회가 해서는 안 될 정치 간여다.’
» 기독교의 일방적인 전도는 가끔씩 사회적인 문제로 거론된다. 3일 오후 서울 명동 입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문구를 한글뿐만이 아닌 중궁어, 일본어, 영어까지 동원해서 적은 피켓을 지고 이곳을 누비는 교인. 윤운식 기자
“예수 믿어 천당”은 이기심의 나락으로
하지만 “예수 믿어 천당”은 그러지 않아도 날 때부터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철저한 이기심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겝니다. 살아서는 물론, 죽은 후에도 영원히 천당의 복락을 누리는 나. 이리되면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는 무슨 주술사의 부적처럼 한낱 종이 쪼가리가 되고 맙니다.
존재를 넘어서 우리의 생각으론 알 수가 없는 전체의 전체이신 그분께서 이 세상, 이 개체들을 낳지 않으셨더면 개체들의 이기심이 빚어내는 이 세상의 험한 꼴은 없었을 터. 이 개체들을 낳으시고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이 험한 꼴을 보시고 그 원인인 우리들의 이기심을 버리라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보내셨다’는 말을 내가 아들을 심부름 보낼 때의 ‘보냄’식으로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우리는 또 그분은 어디 어떤 모습으로 계시고 어떻게 보내셨나를 둘러싸고 수많은 혼란과 미혹에 빠질 것이니, ‘보내셨다’는 말은 언어 문자가 아니라 은유로, 마음으로 이해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서른세 해의 짧은 삶 동안 오로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는 데 매달리셨으니 우리에게 이 세상 바로 지금 여기서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게 곧 하느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이기심과 겨루신 겁니다. 그분이 몇 번을 다시 오셔도 우리의 이기심은 그분을 몇 번이고 십자가에 매달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라는 우리도 저 아스라한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나 자신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이기심과 겨루는 겁니다.
‘해탈’이란 말도 마치 ‘예수 믿어 천국’처럼
어디 예수님 가르침만 그러한가요. 불가의 금강경에도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달마 대사의 법을 잇는 선종의 6대조인 당나라 때 혜능 선사는 젊은 시절 노모를 봉양하면서 나무꾼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우연히 이 대목을 읽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우쳤다고 합니다. 마땅히 그 어디에도, 이 세상 그 무엇에도,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도 마음에 집착을 두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세상 모든 것과 나 자신에 대해서 마음을 일으키라.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세상에 대한 애착,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일 어려운 일인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고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게 되는 상태를 도가 통한 걸로, 종교의 최고 경지에 이른 걸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처님 제자들도 이 고통의 바다를 떠나서 다시는 윤회하여 이 세상에 돌아오는 일이 없이 해탈하려 합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 말씀은 모든 것에 대해 마음이 머물지 않은 바로 그 상태에서 다시 세상과 나에 대해 마음을 내라고 합니다. 분별심, 집착, 이기심에 빠져나와서 다시 세상과 나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해탈이니...
아니, ‘해탈’이란 말은 마치 “예수 믿어 천국”처럼 실체로서 존재하는 내가 무슨 높은 경지로 옮겨가는 느낌을 주고, 이는 다른 것과 독립하여 변함 없이 존재하는 실체나 경지는 없고 모든 게 서로서로 기대어 있어 변해 간다는 연기(緣起)의 진리에 반하니, 해탈보다는 해방이란 말이 더 좋아 보입니다.
이기심을 버린 이 세상이 바로 열반
해방!
그래서 용수 보살은 <중론>에서 세간(世間)을 떠나서 열반(涅槃)이 어디 따로 있지 않다고 분명히 못박으셨습니다. 이기심을 버린 세간, 이 세상이 바로 열반이라.
그런데 이렇게 스승님들이 아무리 이기심을 버리는 게 하느님 나라요, 구원이요, 열반이요, 해탈이라 가르쳐 주셔도, 우리는 다시 이 가르침을 우리가 타고난 이기심에 맞게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트럼프는 교황님께 내 믿음을 판단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고, 한국의 어떤 신자들은 종북 주교 물러가라고 외쳐 댑니다.
이건 개체로 태어난, 우리 개체들의 운명입니다. 그래도 스승님들께서는 그게 아니라시니, 우리는 별 수 없이 ‘나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이기심과 죽자고 싸울 일입니다. 그러다가 나의 이기심에 굴복해버리면 나는 마구니가 되는 거고, 다행히 죽을 때까지 싸울 힘이 있어도, 이기심을 버리는 게 너무나 두려운 다른 이들에 의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수도 있겠지요. 스승님들처럼...
※<공동선 2016. 3-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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