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비온뒤무지개재단 이신영 이사장, 류홀릭 이사
14.11.05 10:45l최종 업데이트 14.11.05 10:45l김예지(jeor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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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비온뒤무지개재단 사무실 입구에 있는 올해 퀴어문화페스티벌 슬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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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9일, 저녁 찬거리를 준비할 시간에 망원동 재래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휴대폰으로 길찾기 앱을 켜고 시장 중앙 길을 헤매다,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빨간 벽돌의 다세대 주택들이 이어졌다. 분명 길찾기 앱의 화살표는 이 근방에 도착지가 있다고 표시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재단이라는 단체이면, '번듯한' 간판이라도 하나 보여야 할 것 아닌가.
약속된 인터뷰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도 혹여 늦지는 않을까 마음이 초조해졌다. 결국 재단에 전화를 했고, 상근 간사님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그토록 찾던 '비온뒤무지개재단' 사무실은 무심코 지나쳤던 그 빨간 벽돌의 건물 2층에 위치해있었다. 이런 익숙한 삶의 공간에 낯선 단체가 둥지를 틀고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비온뒤무지개재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적소수자를 위한 비영리 재단이다. 2012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워크숍에서 '새로운 형식의 성적소수자 재단'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 그 시초다. 그 후 2년이 지난 지금, 그 단순한 상상은 비온뒤무지개재단으로 실현되었다.
재단 사무실에 들어섰을 땐 한 방송사의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최근에 재단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꽤나 바쁜 모양이었다. 잠시 기다려서야 사무실 내 성적소수자의 역사를 수집하는 아카이브 공간인 '퀴어락'에서 이신영(53·트랜스젠더 부모모임 대표) 이사장과 류홀릭(38·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 이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단순한 아이디어로 성적소수자의 희망을 말하다
- '비온뒤무지개재단'이라는 이름이 예쁜데, 어떻게 지은 것인가요?
이신영 : "무지개가 희망을 상징하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성적소수자 인권 운동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는데 차별은 여전해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않겠는 의미에요. 또 무지개가 다양성을 상징하잖아요.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타고난 자기만의 색깔로 빛나기를 바라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다양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짓게 된 이름이에요."
- 앞서 말한 것처럼 성적소수자를 위한 국내 운동의 역사가 20년이 넘었어요. 그간 성적소수자를 위한 단순한 커뮤니티도 있었고, 운동을 하는 단체도 존재했어요. 그런데 모든 성적소수자를 아우르는 '재단' 형태의 단체는 처음 아닌가요?
류홀릭 : "만들어진 지 15년 정도 된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을 이어오다가 활동가들이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사실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잖아요. 인권단체이지만 나라의 후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요.
개개인의 성적소수자들이 돈이 없어서 학업 중단하거나 꿈을 포기하는 것과 같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재단이란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에요. 단순한 아이디어로 시작을 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큰일이에요."
이신영 : "저도 아이의 성정체성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그냥 정신이 없었어요. 나중에야 성적소수자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지나 가족 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는 다른 성적소수자 아이들을 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또 (성적소수자 단체의) 활동가들은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보수도 별로 없고,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일을 병행해야 해요. 그런데 성적소수자들이 꼭 필요로 하는 곳에 금전적 지원을 주려면 기부를 받을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해요. 재단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기부를 받고, 그것을 꼭 필요한 곳에 배분하는 일입니다. (성적소수자) 단체는 그런 일을 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재단이라는 틀이 필요했어요. 기부를 하는 분들도 아무래도 재단이라면 믿고 기부를 하시고요."
성적소수자의 '삶'을 기반으로 한 지원 사업
- 재단이 준비하고 있는 사업에는 성적소수자의 실생활에 밀접한 활동이 많은 것으로 알아요. 특별히 눈길을 끄는 사업은 의료 지원, 장학 지원, 지역 지원인데요.
이신영 : "의료 지원은 성적소수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트랜스젠더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트랜스젠더는 신체적 수술을 경험하고, 호르몬을 투여하기 때문에 사실 건강관리가 평생 필요합니다. 의료적 비용 문제도 걸리지만, 성적소수자에게 우호적이면서 인권 감수성을 가진 의료진을 만나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적소수자들이 병원 진료를 받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성적소수자에게) 우호적인 의료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류홀릭 : "(지역 지원 같은 경우) 성적소수자들이 외계에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에요. (성적소수자는) 이 지역에, 어디에나 같이 있습니다. '성적소수자는 내 주변에 없다', '(성적소수자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하지만 사실은 (성적소수자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마을 운동과 지역 운동 활성화, 그 안에 성적소수자가 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필요해요. 종로에는 게이바가 많아요. 그래서 게이들이 많이 있지만, 그에 비례해 혐오 범죄도 많죠. 지역에서 같이 (성적소수자를) 받아들이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사회는 성적 소수자를 없는 존재로 보게 됩니다.
또 모든 (성적소수자) 운동들이 서울 중심, 수도권 중심이거든요. 사실 지금은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깨달아도,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많아서 크게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부모님이나 트랜스젠더는 앞으로 어떤 의료적 조치를 받아야 하는지, 상담은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 정보를 얻으려면 한계가 있습니다. 매번 서울에 오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요. 따라서 (성적소수자에 대한) 지역 지원이 필요합니다."
- 다른 사업들은 내년부터 그 지원이 본격화 되지만, '이창국 장학 사업'은 이미 시작이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이신영 : "고 이창국님은 저희 돌아가신 아버님입니다. 살아계실 때 개인적으로 장학 사업을 하셨어요. 제가 장학 사업을 지원하게 된 것도 아버님의 뜻을 받은 것이에요. 저희 형제들도 이 재단을 만들 때 도와주었고요.
저희 가족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안 해요. 내 형제의 일이고, 내 조카의 일이니까요. 성적소수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없더라도 가족의 일이니까 (장학 지원을 통해) 마음을 보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거든요. 아버지가 아마 살아 계셨더라면, 정말 좋아해주셨을 것 같아요. 정말 잘한다고 격려해주셨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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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가 진행된 '퀴어락’ 비온뒤무지개재단 부설 기관으로, 성적소수자의 역사적 기록물을 보관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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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공간 한 곳만 있어도 사람을 살리더라"
- 재단의 부설 기관으로 '별의별상담연구소'와 '퀴어락 아카이브'가 있는데, 어떤 곳인가요?
류홀릭 : "원래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같이 하던 것들이에요. 재단에 발기인들이 모여서 어떤 재단을 꿈꾸는지 이야기를 했을 때, 퀴어락이라는 역사적 공간을 가져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 했어요. 별의별상담연구소도 상담소라고 만들어져 있지만 공간 문제도 그렇고 지원을 받는 것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재단 부설로 들어가면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부설 기관은 모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고 바닥부터 시작한 것들이에요. (상담소의 경우) 상근자가 있을 정도의 안정은 아니지만, 각자 직업을 가지신 분들이 일을 끝내고 시간을 쪼개 이곳에 오세요. 지금의 퀴어락도 굉장히 많이 발전한 상태입니다. 조그만 방 한 칸에서 시작했거든요. 그래도 관심 있는 분들이 와서 간행물 정리하고, 자료에 라벨을 붙이고, 자료들을 어떻게 보관할지 고민합니다. 굉장히 소중한 자원과 인력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이신영 : "오랜 현장 경험에서 나온 결과물인 것 같아요. 시간이 없었더라면, 세월이 없었더라면 못했겠죠."
류홀릭 : "저도 활동한 지 몇 년 됐지만, 처음 (성적소수자 활동에) 뛰어든 사람이 없었다면 저도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처음 저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나의 (성) 정체성을 상담할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거든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이 공간이, 이런 상담 공간 한 곳이 사람을 살리는 공간이 되더라고요."
차별과 싸우는 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
- 재단 홈페이지 오픈 한달 사이에 창립회원이 100명을 넘었고, 지난 7월에는 창립 기금 1억 원을 돌파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재단에 관심을 가지고, 또 마음을 나누고 있는데 혹시 어려움은 없나요?
이신영 : "어려움이 있죠. 저희가 올 봄부터 재단 등록하려고 모든 준비를 해두었어요. 정관도 만들었고, 창립총회도 열었습니다. 그리고 재단 등록을 하기 전, 분위기를 살피려 서울시청 담당 공무원과 연락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성적소수자 관련 부분은 미풍양속을 저해되는 사안이라 재단 등록이 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시더라고요.
후에 (담당공무원이) 자신이 실수를 했다고 사과했지만, 서울시에는 성적소수자 인권 문제를 담당하는 과가 없어 아마 (재단 등록이) 안 될 것이라며 다른 곳에 문의해보라고 하더군요. 되도록 (재단 등록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만약 재단 등록을 받아주었을 경우 성적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이 괴롭힐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재단 등록 서류를 내고왔어요. 재단 등록 허가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최근 '모두에게 완자가'라는 성적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은 웹툰이 연재되고 있고, 지난해에는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의 첫 동성커플 공개 결혼식이 있었어요. 현재 제정되고 있는 서울시민인권헌장에 성적지향에 대한 차별 금지 조항을 넣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고요.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성적 지향, 성 정체성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아요.
류홀릭 : "각자의 운동 방식에 따라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성적소수자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마음에 동하는 것이 있어야 하잖아요. 만화 좋아하는 사람은 만화를 보고 성적소수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영화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로, 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인권 헌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같이 고민하는 것이 결국 이성애자를 더 자유롭게 하는 것"
- 지금은 LGBTAIQ(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간성, 퀘스처너리의 앞 글자를 딴 단어)를 모두 '성적소수자'라는 용어로 한데 아울러 칭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이들을 잘 구분하지 못해요.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를 게이나 레즈비언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죠.
류홀릭 : "예전에 단체 이름을 지었을 때는 '동성애자'인권연대, '게이'운동단체 친구사이, '레즈비언'상담소라는 식으로 지었어요. 그런데 이제 기존의 단어만으로 모든 성적소수자들이 표현 되지 않기 때문에 외국의 표현을 따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또다시 이것을 아우르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저는 명칭도 중요하지만, '왜 우리만 나누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요. 이성애자라는 정체 없는 개념 또한 해체하는 운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적소수자의 종류를 대체 어디까지 나열을 할 것인가, 한번쯤은 이성애자가 '나는 동성애자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성적 지향의) 개념을 나누고 쪼개는 것은 이성애자에게도 필요해요."
이신영 : "이성애자가 이곳에 오면 소수예요.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불편함을 느끼잖아요. 처음에는 제가 만나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사실 좀 불편했어요. 내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겠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요즘엔 그런 불편함이 자연스럽게 해체되면서 '나는 세상이 나누어 놓은 남자 여자라는 이분법에 묶여있었구나, 족쇄처럼.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구나. 나는 그냥 나를 여자라고만 생각했지, 내 안에 어떤 다른 것이 있을 것이란 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생각이 어떤 면에서 저를 굉장히 자유롭게 했어요. 되게 좋더라고요. 이런 문제를 같이 고민하는 것이 결국 이성애자를 더 자유롭게 하는 것 같아요."
"삶은 비가 오는 것과 무지개가 뜨는 것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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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영 이사장과 류홀릭 이사 이신영 이사장(왼쪽)과 류홀릭 이사(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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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 사회에서 성적소수자에 대한 논의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다고 보나요? 한국은 아직 비가 오는 중인가요, 비가 그치는 중인가요, 아니면 무지개가 뜨기 직전인가요.
이신영 : "저는 성적소수자 운동도 그렇고, 사람의 삶도 그렇고 늘 비가 오고 늘 무지개가 떠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비가 오다가, 무지개가 떴다가 그게 반복돼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비가 오는 중에도 무지개가 언젠간 뜰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죠. 그리고 무지개가 떴을 때도 또 비가 올 것이란 것을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그간 성적소수자를 위한 활동을 해오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물었다. 류홀릭 이사는 작년과 올해 있었던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의 기억을 되짚었다. 작년에는 퍼레이드 도중에 거짓말처럼 무지개가 떴다고 했다. 올해는 그 무지개를 보지 못했지만, 하늘에 뜬 무지개만큼 기억에 남을 광경을 목격한 듯했다.
"보수 기독교 세력과 맞붙으면서 퍼레이드가 5시간 정도 지연이 되었어요. 그런데 5시간이 지나고 모든 퀴어들이 다시 돌아와서 밤에 행진을 했던 기억이 잊히지 않아요. 이성애자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적소수자를 지지한다며 같이 걸어주는 것이, 그게 잊히지 않아요. 우리만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죠. 많은 이성애자들이 우리를 지지하고 함께 고민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퍼레이드 안에서 느꼈어요."
'혼자가 아니다'. 같은 고민을 하고 비슷한 혼란을 겪을 성적소수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을 때도 이들은 한목소리로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이신영 이사장의 말처럼 이들의 삶에 항상 비가 오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항상 무지개가 떠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삶 속에서 무지개가 뜰 때, 다른 사람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는 경험도 충분히 소중하다. 하지만 지금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비가 올 때 모두가 그 비를 함께 맞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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