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은미교수와 황선 선생은 자신들의 방북담을 솔직하게 털어 놓으며 통일에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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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아줌마” 신은미 선생과 황선 씨의 서울토크쇼가 그처럼 커다란 풍파를 빚어낼 줄은 뜻밖이었다. 필자로서는 토크쇼내용을 《자주민보》에서 보면서 두 분의 전날 얘기들에 비해 별로 새로운 게 없어서 은근히 실망까지 했는데, 일부 세력들은 “종북”과 “빨갱이” 딱지를 붙이면서 야단법석이다. 신은미 선생은 이제 와서 “국가보안법”의 실체를 체감하는 모양이란다. 신은미 선생으로서야 숱한 글을 《오마이뉴스》에 발표했고 책으로 묶어 출판했으며, 전에도 여러 번 비슷한 내용으로 강연했는데도 큰 문제가 없다가, 이번에 떠드는 사람들이 유달리 많으니 당혹하지 않을 수 없겠다.
드디어 보수 종합편성채널이 신은미 선생을 “종북 인사”로 낙인찍고 법무부까지 나서서 신 선생의 재입국을 거부한다는 소식이 나오는 바람에, 12월 중순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던 강연 일정이 취소되고, 신 선생은 12월 6일께 조기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한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여행기가 인기를 끌긴 했다만 조회수가 수십 만 정도였다고 들었고, 조회자 가운데서 필자 같은 해외사람들을 빼면 한국국적자들의 수자는 훨씬 적어진다. 수십 만이라 봐주더라도 5천만에 가까운 한국인구수에 비기면 별거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수매체들이 괴상한 딱지를 붙이면서 떠들어대는 바람에 한국에서 《오마이뉴스》 같은 언론에 관심 없던 사람들마저 수동적으로 신은미 선생의 존재를 알게 되지 않겠는가. 사실 포털사이트에서 “신은미”와 “황선”의 검색결과도 늘어난다.
결과적으로 일부 세력들은 매도하려는 상대의 지명도를 높이고, 무관심하던 사람들마저 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했냐고 알아보게 만들었으니, 제 손가락으로 제 눈을 찌른 꼴이다.
▲관련 영화 '사랑의 거리' 대동강맥주공장 연구사 미선(공훈배우 김혜경 분) [자료사진= 인터넷화면 캡쳐, 중국시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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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왜선지 대동강맥주가 유난히 쟁점으로 떠올랐는데, 2012년 11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조선(북한)의 대동강맥주 맛이 한국맥주들보다 낫다고 평했을 때는 한국에서 한국맥주들이 조선의 대동강맥주를 따라잡으려면 어째야 되느냐, 한국에서 한때 잘 나가던 대동강맥주를 왜 한국인들이 마실 수 없게 됐느냐 등 반향들이 나왔다.([통일문화 만들어가며] 177편을 참조하시라. 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2879 ) 한국인인 황선 씨나 미국적을 가진 신은미 선생이 대동강맥주가 맛있더라고 말하면 “종북”이냐는 딱지가 붙여지는 것이 정상인가? 코크기와 피부색깔에 따라 “종북”이냐 아니냐가 정해지는지 원.
유신시대에 평양에 갔던 남쪽사람들이 옥류관의 국수가 맛있다면서 두 그릇을 먹고서도 서울에 돌아가서는 맛이 없더라는 글을 써, 옥류관사람들이 섭섭한 소리를 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지금 수중에 자료가 없어 출처를 찾지 못해 유감이다.
어느 네티즌은 요즈음 이렇게 주장했다. 대동강맥주가 아무리 맛있더라도 오줌보다도 못하더라고 말해야 한국에서 칭찬을 듣는다고. 얼핏 본 내용이라 원문 그대로 정확하게 적지는 못한다만, “오줌”이라는 단어에서 계시를 받아 남북사이에서 일어났던 웃지 못할 사건을 상기했다.
1989년에 북을 방문했다가 뒷날 남에서 감옥살이를 했던 황석영 소설가가 쓴 책 《사람이 살고 있었네》(1993)의 한 절인 “고려호텔의 회전전망대”를 통째로 인용한다.
“국제문화회관, 청년중앙회관, 고려호텔 그리고 광복거리에 건설되고 있는 건물들은 이른바 초현대식 건물들이다. 고려호텔은 40여 층의 갈색 벽돌타일을 바른 이른바 《쌍동이 빌딩》 형식의 쌍탑형 건물이다. 평양에서 국제적 행사가 많아지면서 70년대에 지어진 건물인데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하여 우리측 사람들이 머물고 나서 많이 알려진 그 호텔이다. 해외에서 고향방문으로 오는 동포들도 대개 이곳에 숙박한다. 객실을 둘러 보았는데 구조는 역시 내가 묵고있는 창작실의 방처럼 거실과 침실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응접세트의 장식이 우리 식의 문양으로 되어 있고 화문석 돗자리며 벽에 걸린 자수 그림 등이 이집의 주인이 누구임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두 개의 건물은 중간에서 통로로 연결되고 있었으며 연회장과 영화관이 있었다. 그리고 꼭대기는 회전하는 전망대식 바 겸 식당이었다. 시내는 물론이고 멀리 교외까지 고층아파트와 빌딩의 숲을 이룬 평양 시가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고 대동강과 만경대쪽은 발갛게 노을에 물들었다.
우리는 총지배인이 안내하는 대로 창가에 앉았는데 바닥이 서서히 회전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모든 탁자는 유리창 쪽에 바짝 대어졌고 좌석도 따라서 밖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었으며 풍경이 점차적으로 바뀌어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한 시간쯤 걸린다고 한다. 실내에는 서양사람 남녀 몇 사람이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서도 여성봉사원들은 한복차림이었다. 총지배인이 곁에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건물 이름을 말해주다가 내게 불쑥 묻는 것이었다.
《선생님도 기자십니까?》
《아뇨, 그렇게 보입니까?》
곁에서 다른 사람이 소설가 선생이라고 토를 달아준다. 그가 말을 흐렸다.
《난 또… 글을 쓰신다기에.》
원래가 보통과 다른 느낌이 들 때에는 놓치지 않고 캐는 것이 내 천성이어서 말꼬리를 잡기로 했다.
《왜요. 기자면 어떤데요?》
《아뇨,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궁금해서 못견디게 되자 곁에 있던 사람이 핀잔을 주었다.
《거, 뭐 좋은 일이라고 자꾸 그얘기를 꺼내요. 그만두기요.》
지배인이 얼굴이 벌개지더니 이번에는 말릴 사람도 없는데 곁에 나서 얘기를 꺼냈다.
《내가 아무래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아니 공산주의가 싫고 보기 싫으면 안만나면 그만 아닙니까. 지난 85년도에 남북교류한다고 여기와서는 돌아갈 때 방의 벽지를 칼로 북북 그어 찢어놓고 냉장고 안에다가 방뇨를 해놓고 갔지요. 아이들끼리 싸운다고 해도 차마 그러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면 멸공통일 하는 겁니까.》
내가 확인할 수 없는 일이라 뭐라고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곁에서 다시 나선다.
《그렇다고 황선생한테 따지면 어떡하오.》
나는 사실의 진위를 가리기 전에 남과 북이 서로 공개적으로 만났을 때마다 상대방 사회에 대한 양쪽의 보도 태도가 올바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내가 잘 아는 남쪽 어느 시인이 이런 시를 썼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은 두 절름발이다. 그들이 서로 온전해지려면 남은 왼발로 딛는 연습을, 북은 오른발로 딛는 연습을 해야 제대로 걸을 수가 있다. 뭐 그런 시였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전후 세대들은 역사가 남겨준 증오와 불신의 유산을 수십년 동안의 분단교육을 통해서 주입식으로 물려받아 왔습니다. 지금 당신이 얘기한 사건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우리가 민족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늦지 않았으나 서로가 다른점은 인정하고 나아가서 같은 점들을 찾으려는 노력을 급히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정말 통일을 원하지 않는 세력은 한줌도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사실이 아니거나 이와 같은 오해를 사게 될 소지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내가 동경에서 우리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을 때 일부 기자들의 질문의 구태의연함과 진지하지 않은 방관적인 태도가 짜증이 났으니까. 이르테면 북한에서는 저녁마다 토론을 하지 않았느냐고 하기에 《그렇지 않다.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어떻게 매일 눈 부릅뜨고 정치사상적 토론만 하겠는가. 때로는 음담도 하고 술주정도 한다.》라고 진술하고 나면 그 다음 신문에는 《북에서는 음담패설이 성행중》이라고 쓰는 판이 아니던가. 이래 가지고야 언제 민족의 동질성이니 공동체적 확인이니 해볼 수 있겠는가.
정말 사고의 구조가 그렇게 굳어져 버렸다는 것일까. 실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일정한 정도의 편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할 경우에도 《객관성》을 내세우면서도, 남북문제에 대해서만은 《객관적》으로 말할 자세조차도 안되어 있으니 그것은 직업과 신변의 안전을 위협받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객관적》 사고를 안전화 일반화시키지 않고는 남과 북의 만남이 아무리 거듭되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분단을 전제한 애국심은 진정한 애국심이 아니며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른 애국심이겠다.”
황석영 소설가가 이 글을 쓴지도 2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남북교류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던 2000~2007년에는 북의 무엇이 좋더라고 말해도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이제 와서는 맥주맛까지 공격대상으로 되니,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겠는가!
커다란 상처를 입은 신은미 선생이 언제 다시 글을 쓸지는 누구도 모른다. 몇 해 째 흥미롭게 선생의 방북기를 기다리면서 보아왔던 필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손실이다. 경색된 남북관계 때문에 신은미 선생 부부의 여행을 통해 정신적인 이북관광을 즐겨야 했던 이남사람들은 더욱 아쉽겠다. 신은미 선생 부부의 체험이야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만, 여기서는 그나마 신은미 선생이 가본 지역에 위치한, 신은미 선생이 가보지는 못했을 경물을 하나 소개하련다.
지역은 함경북도에 위치한 칠보산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금강산, 백두산 등과 더불어 “6대명산”의 하나로 승격시킨 관광명승지로서 여러 해째 대외관광의 중점으로 부각되었다.
대외관광이 활성화되기 훨씬 전인 1998년에 나온 책 《명소에 깃든 전설(칠보산)》(박사, 부교수 문성렵, 김경호 집필.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8년 9월 출판발행, 도합 206쪽)에서 명물 신의대전설은 이미 [통일문화 만들어가며] 224편( 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5760)에서 소개했고, 이번에는 128~ 134쪽에 실린 “새길령”이라는 전설이다. 군더더기일지 모르겠다만, 필자는 워낙 자연경관에 붙여진 전설보다는 인간의 자취가 깃든 경관에 대한 전설이나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바, 설명과 전설을 책에 실린 그대로 아래에 인용한다.
외칠보 만물상구역의 궐문봉과 월락봉사이에는 새길령이 있는데 지도상에는 《신도령》으로 기록되여있다.
락선대에서 만물상절경을 보고 동쪽방향의 수림속길로 1킬로미터를 가면 새길령마루에 올라서게 되는데 여기서 북동쪽을 바라보면 조선동해바다가 한눈에 안겨온다.
새길령에는 황진에서 가전동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있는데 이 새령길이 개척된 다음부터 황진사람들은 보촌을 거쳐다니던 수립리길을 에돌지 않고 곧바로 가전동으로 오게 되였다. 만물상구역에 대한 관광로정도 바로 이 길을 리용하여 가전골의 보촌천으로 내려오게 되여있다.
새길령 서북쪽 50미터 지점에는 이 지름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황진사람 정상인의 공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세운 대리석비석인 신도령비가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새 령길개척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라는 뜻에서 《정공상인개신로기적비》라는 글이 있고 오른쪽면에는 비석을 세운것이 1881년 3월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그리고 왼쪽면에는 그의 공적을 칭송한 이런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있다.
《절벽과 수림이 들어찬 이곳에
예로부터 지름길이 없어 불편하더니
이제 사람도 말도 다니기 편리하니
첫삽을 뜬 정상인의 공로
후세에도 길이 잊지 않으리》
비문의 내용을 통하여 새길령의 지름길은 황진에 살던 정상인의 공로로 이루어진것을 알수 있다. 정씨로인이 이 길을 처음 개척할수 있게 된데는 그가 애지중지 기르던 암소때문이였다는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있다.
[령길을 낸 정상인로인과 암소]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어느해 늦은 봄날이였다.
황진서쪽골짜기인 칠선골의 기묘한 바위들과 절벽의 기슭을 연분홍색갈로 아름답게 장식해주던 진달래는 지고 시내물흐르는 골짜기와 산히리에는 생신한 연록색의 나무잎과 잡초들이 주단처럼 덮이였다.
황진의 황령마을에서 사는 정상인로인은 조반을 들기 바쁘게 산으로 갈 차비를 서둘렀다.
암소에게 새풀도 뜯길겸 발구채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정로인은 암소를 끌고 칠선골로 들어갔다.
위처럼 생겼다는 위담, 옹배기같다는 옹배기담, 소뿔처럼 생기였다는 소뿔담을 지나 골짜기를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노르끄레하고 만문한 풀이 부드럽게 덮여있는 훤한 등판이 나지였다.
정로인은 여기서 암소가 풀을 뜯도록 쥐고오던 고삐를 안으로 휘여든 뿔에 감아주었다.
풀밭에 암소를 내놓은 정로인은 허리에 찼던 도끼를 빼들고 건너편 산등으로 올라갔다. 그는 대나무처럼 꼿꼿한 참나무들이 들어서있는 숲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살피다가 발구감으로 맞춤한 나무를 골라잡고 도끼질을 시작하였다.
로인은 《헉- 헉-》 힘을 주면서 도끼질을 하였다. 그때마다 선들선들한 도끼날에 나무살이 패여서 튀여났다. 워낙 살이 굳은 굵은 참나무를 도끼로 두대씩이나 찍고 나무아지들까지 다 다듬고보니 어지간히 시간이 지나갔다.
정로인은 소가 걱정되여 발구감을 끌고 등판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풀을 뜯던 암소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아래골짜기와 맞은편 산등판을 살펴보아도 암소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나 범이 그사이에 끌어갔을것 같지도 않은데 아무래도 이놈의 소가 새 풀밭을 찾아 산등으로 오른 모양이다.)
정로인은 이렇게 생각을 굴리면서 소의 흔적을 찾다가 칠선골 막바지로 오르는 산허리에 찍힌 소발자욱을 발견하였다. 흙이 패이거나 잔돌이 부서진 소발자욱은 월락봉의 산허리를 가로질러 궐문봉의 작은 산발이 흘러오면서 이루어놓은 우묵한 잘루목쪽으로 나있었다.
정로인이 소발자욱을 따라 월락봉과 궐문봉사이의 우묵한 등마루를 넘어서니 천태만상의 만물상전경이 나타났다. 그가 만물상동쪽계곡의 골짜기로 난 소발자욱을 따라 골바닥에 내려서 보니 보촌천이 흐르는 가전마을이였다.
어디선지 소의 큰 숨소리가 들리는것 같아 찾아가 보니 자기 집 암소가 물황철나무에 매놓은 숫소와 쌍붙이를 하고있었다.
《엉?! 숫소생각이 간절했던 모양이지. 그 험한 등판을 넘어 이까지 오다니.》
정로인은 암소가 암내를 일으킨것을 제때에 돌봐주지 못한 자기의 잘못을 생각하며 이렇게 중얼거리였다.
정로인은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소가 일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말못하는 짐승이라고 사람들이 업신여기면서 힘든 일만 시키지만 소도 령물이다. 어쩌면 가전마을로 넘어오는 지름길이나 이 마을에 숫소가 있다는것까지 알았을가? 그놈의 암소가 생각이 멀쩡하다.》
담배대통을 바위등에 툭툭 털고난 정로인은 교미를 끝낸 암소를 앞세우고 산허리를 타고 오던 길로 되돌아섰다.
암소는 궐문과 월락봉 사이의 잘루목으로 난 자기 발자욱을 따라 조금도 헛갈리지 않고 걸어 넘어가는것이였다.
고개마루를 넘어서는 암소를 한동안 바라보던 정로인의 머리속에는 신통한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옳지, 소가 사람보다 더 좋은 궁냥을 한 셈이다.
사람들은 가전마을에서 황진으로 가거나 황진에서 가전으로 오려면 바다가로 난 보촌을 거쳐서 에돌아 난 길로만 오갈줄 알았지 지름길을 찾아볼 생각은 못했단말이야.
그런데 저 소는 거의 50리길을 줄여서 다닐수 있는 지름길을 알고있는셈이다.
그러니 우리 집 암소가 처음으로 낸 발자욱을 따라 길을 낸다면 가전이나 황진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박달령을 넘어 황진으로 오는 사람이나 황진에서 야간장을 보러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편리해하겠는가.》
정로인은 이렇게 혼자 생각을 하면서 자기에게 신통한 지름길을 깨우쳐준 암소가 대견하다고 칭찬하였다.
래일이라도 당장 동리사람들에게 알려서 역사를 해보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황평마을로 돌아와 사람들이 한창 씨붙임을 하느라고 밭이랑을 타고 오가는것을 보는 순간 정로인의 생각은 달라졌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길닦이를 하자면 농사일에서 일손에 떼야 하겠는데 그러면 농사에 지장을 줄수 있다. 그러니 소문을 내지 말고 내 혼자힘으로 해보자.)
정로인은 마을사람들의 농사일에 지장을 주지 않고 자기힘으로 소문없이 해보리라 결심하였다.
다음날 아침 정로인은 삽이며 곡괭이, 호미, 삼태기 등 길닦이에 소용되는것들을 지게에 걸머지고 산삼을 캔다면서 집을 나섰다.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칠선골로부터 만물상골안으로 넘어가는 험한 산길을 닦느라고 역사를 하고나니 저녁이면 밥술을 놓기 바쁘게 애들처럼 곯아덜어져 앓음소리까지 재면서 주무시는 아버지를 보고 아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얘야, 너는 래일 밭일을 그만두고 할아버지뒤를 밟아보아라.
할아버지가 이 늦은 봄철에 산삼을 캔다면서 매일같이 산을 타는게 아무래도 모를일이다.》
다음날 정로인의 손자는 아버지가 이른대로 칠선골로 가는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할아버지의 뒤를 멀찌기에서 따라가던 손자는 깜짝 놀랐다. 칠선골안으로부터 월락봉등마루로 오솔길이 닦아져있는것이 보이였다.
할아버지는 령길에 지게를 벗어놓더니 괭이로 힘겹게 길을 닦는것이였다.
그날 저녁 정로인의 아들은 자기 아들의 말을 통하여 비로소 늙으신 아버지가 마을사람들을 위해 지름길을 닦느라고 남모르게 혼자서 많은 일을 한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는 그달음으로 마을 좌상로인을 찾아가 이 일을 알리고 온 마을이 달라붙어 제꺽 해치우자고 이야기하였다.
《허, 고집두 원, 그런 좋은 일을 하면서 늙은 몸에 혼자힘으로 하려고 하다니.》
좌상로인은 정로인의 소행을 연방 칭찬하면서 래일로 씨붙임을 모두 끝내고 온 마을사람들이 길닦이에 달라붙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리하여 황진- 가전 사이의 길닦이공사는 온 마을 사람들의 중대사로 되여 밀고나가게 되였다. 얼마후에는 이 소식을 듣고 가전마을사람들도 길닦이에 떨쳐나섰다. 그리하여 두 마을사람들이 앞뒤로 령길을 닦아올라가게 되였고 불과 닷새도 안걸려 령길이 나지게 되였다.
령길공사가 끝난후 두 마을사람들은 고개마루에 모여앉아 한결같이 이 길을 내는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정로인을 칭찬하면서 령길과 고개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가에 대하여 그에게 물었다.
《하, 이러지들 마시우다.
칭찬을 하려거든 우리 집 암소에게 하시우다. 사실 이 길을 내도록 내 머리를 틔워준것은 우리 집 암소외다.》
이렇게 말하며 정로인은 이 고개의 이름은 새로 지름길이 닦아지면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신도령(새길령)으로, 고개길의 이름은 령을 넘으며 통하게 된 지름길이라는 뜻에서 새령길이라고 부르는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마을사람들도 정로인의 의견이 그럴듯하다면서 모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이 고개와 고개길은 신도령, 새령길로 불리워졌고 큰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먼 고장처럼 지내던 황진과 가전의 두마을사람들은 이웃동네처럼 서로 사돈을 맺으며 가까이 오가게 되였다.
오늘도 사람들은 이 령길을 넘을 때면 고개마루의 서쪽 길옆에 고요히 서있는 신도령비를 보면서 소문없이 새령길을 개척하는데 이바지한 정상인로인과 함께 암소의 공로에 대하여 전설처럼 이야기하고있다.
다른 책에 의하면 새길령의 개척과 관련되는 전설은 《소가 처음으로 열어놓은 령길》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 한다.
옛날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길을 닦고 다리를 놓는 걸 커다란 공덕으로 간주하여 비석을 세우곤 했다. 대형도로, 고속도로가 쭉쭉 뻗어나간 현대세계에서야 흙길 따위가 우습게 비칠 가능성이 높다만, 비석을 세운 사람들은 실지로 길이나 다리의 덕을 보았기에 고마운 마음을 비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극단자연보호주의자들은 산에 길을 내는 것마저 자연파괴행위로 간주하나, 자연을 절대무오류인 신으로 모시는 셈이다. 자연 자체는 완벽할리 없고 동물마저 나름대로 길을 만들어서 다니지 않는가.
글이 약간 곁으로 새니 빨리 돌아와야겠다. 정상인의 노력이 길지 않은 길이라는 자그마한 변화를 만들어내어 찬양을 받았는데, 현대조선사에서 반도 북반부 땅에서 굉장한 변화들을 만들어낸 공로자들가운데 누가 첫손에 꼽히는가? 분명 첫째는 김일성 주석이고 둘째는 김정일 위원장이다. 그리고 지금 또 김정은 제1위원장이 나라의 여기저기에서 커다란 변화들이 일어나도록 지휘하고 있다. 일부 세력들은 북의 모든 시설들을 당간부들이나 사용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매도하지만, 실지로 인민들이 덕을 보는 시설들이 엄청 많음은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체험한 바이다. 그러면 인민들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 혹은 대다수가 고맙게 여기면서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는 게 순리가 아니겠는가?
북에서 선대영도자들을 기념하는 시설들을 세우면 남의 일부 세력들은 대뜸 “우상화작업”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경직된 사고에서 조금 벗어나 신도령비를 음미해보면 북과 북 사람들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서부터 통일문화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2014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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