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열 칼럼] 국가정훈부, 얼마나 멋진 신세계인가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3.09.09. 05:43:15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 마치 갓 부임한 정훈장교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정훈교육 시간에 빳빳한 군복을 입고 병사들의 정신 무장 상태를 탓하며, 병사들의 소지품 속 불온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 뒤지던 스테레오 타입의 초임 정훈장교 말이다 .
군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정신 전력'이다. 국방부에는 장관 직속으로 국방정신전력원이라는 곳이 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폐지됐던 국방정신전력원은 2013년 보수 정권 시절에 부활했다. 천안함 사태로 인해 군 정신 전력 강화의 필요성이 대두됐다는 걸 이유로 뒀다. 천안함 하니 생각나는 건 윤석열 대통령이다. 그는 최근 부쩍 '천안함 티셔츠'를 입고 대중 앞에 노출되는 걸 즐긴다.
따지고보면 정치 개입 댓글을 달았던 군 사이버사령부도 국민을 상대로 인터넷 댓글 창에서 '정치훈련'(정훈, 政訓) 교육을 실시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 정점에 있던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은 '댓글 공작'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국방혁신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으며 백선엽기념재단 이사장도 하고 있다. 공산전체주의에 맞서는 '완벽한 자유인'에 걸맞는 윤석열 정부의 빛나는 예우다.
윤 대통령이 국가를 하나의 '병영' 쯤으로 상정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개인적 호기심이 있었는데, 이런 의심은 홍범도 흉상 철거 사태에서 확신에 가깝게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낀다.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홍범도 흉상 철거의 주요 이유가 홍범도 장군이 1920년대에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때문이라고 한다. 이 논리가 허술한 게, 홍범도 장군이 활약할 당시에는 1919년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있었다. 그의 공산당 가입 이력을 '대한민국에 도전하는 위협'으로 인식하려면 1919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또 그런 논리는 내세우지 않는다. 홍범도를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으려면 1919년 건국론을 인정해야 하고, 그러면 1948년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부정될 수 있다는 논리적 결론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윤석열 대통령, 광복절 경축식에서)는 대통령의 새 역사 해석의 교시를 완성하려면 홍범도가 임시정부를 공산주의로 물들이기 위해 대한민국을 위협했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볼 증거도 없다. 이래저래 홍범도 공산당 가입 전력을 소급 적용하려니 논리를 떠나 역사관 자체가 계속 꼬여갈 수밖에 없다.
홍범도 흉상의 문제는 '소련 공산당 군복'을 입고 있는 홍 장군에게, '공산주의' 세력을 주적으로 삼아야 하는 육사 생도들이 경례하는 것 자체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이라고도 한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밀어붙이는 배경엔 이런 심리적 장애물을 제거하고, 여기에 맞서 육사 생도, 나아가 국민적 정신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홍범도 흉상에서 소련 공산당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많지 않다. 이걸 먼저 간파한 선지적 정치 지도자들(이를테면 전광훈)은 국민에게 홍범도의 진면을 교육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가졌으리라. 그래서 전 국민의 이목을 서울 한귀퉁이의 육사 교정에 세워진 홍범도 장군 흉상에 집중시키고 있다.
일종의 정신 전력 강화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훈 교육' 내지는 '심리전'인 것 같다. 마침 윤 대통령은 올해 초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 통일부를 향해 "최근 수사 결과를 보면 국내 단체들이 북한의 통일전선부 산하 기관들의 지시를 받아 간첩 행위를 한 것이 밝혀졌는데, 북한의 통일 업무를 하는 곳에서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 통일부도 국민들이 거기에 넘어가지 않도록 홍보라든지 대응 심리전 같은 것들을 잘 준비할 필요가 있다"며 '자국민 대응 심리전'을 지시한 바 있다. 그 후속 조치로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임명됐다. 그가 "대한민국 국민 5000만이 모두 주권자로서 권력을 행사한다면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 걸 보면 '대국민 심리전'에는 적임자로 보인다.
국민을 상대로 한 대통령의 정훈 교육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 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속는다'는 말이 유달리 신경을 쓰게 한다.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한 세력의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에 맞서서 속지 않으려면 정치 훈련과 정신 무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린 인권 운동가로 위장한 사람을 '순수 인권 운동가'와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허위 선동'에 속지 말아야 할 의무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 개조론'까지도 제시됐다. 대통령은 국민통합위원회 행사에서 "우리 모두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완벽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애쓰고 고민하는 위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낙오자'는 공산전체주의 등 불온 사상에 물든 이들이며, '완벽한 자유인'은 대한민국에 살 수 있는 인간이 반드시 지녀야 할 조건이다. 모두를 '완벽한 자유인'으로 개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국민통합위원회'의 일이다.
새 교리가 자리잡기 위해 과거 교리는 반박돼야 한다. 대통령은 "'새가 하늘을 날려면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가 다 필요하다'고 빗대 말하는 분도 있다"면서 "어떤 새는 앞으로 가려고 하고 어떤 새는 뒤로 가려고 하는데, 오른쪽 날개는 앞으로 가려고 하고 왼쪽 날개는 뒤로 가려고 한다면 그 새는 날 수 없고 떨어지게 돼 있다"고 했다. 한때 '불온서적 제조기'(?)였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책 제목인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틀렸다며 새 교리를 내린 것이다. 조만간 '불온서적' 색출 작업이라든지, '불온흉상' 폐지 작업은 더욱 활발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홍범도 장군은 그 리트머스 시험지다. 흉상 철거가 논란이 된 후 "해군에 홍범도함도 있다"는 반박이 나오자 홍범도함 이름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대전현충원 앞에 유성구가 지정한 '홍범도장군로'가 있다고 하니 '홍범도장군로'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국민을 상대로 전 국토의 상징물을 상대로 하는 '이념 정풍 운동'은 이렇게 '우상 파괴'로 서막을 띄우고 있다. 1920년대 공산당이든, 2020년대 공산당이든 상관 없이 '모든 공산당'이 정풍 운동의 대상이 된다.
마침 국방부는 지난 7월 군 장병 정신 교육과 공보 업무를 맡은 '공보정훈(公報正訓)' 병과를 '정훈(政訓)'으로 바꿨다. 앞서 문재인 정부는 군의 정치적 중립과 바른 훈련을 강조하는 의미로 '바를 정' 자를 써 정훈(正訓)으로 바꾼 바 있다. 이 명칭을 다시 되돌린 것이다. 한자 표기도 바를 정(正)에서 정사 정(政)으로 돌렸다. 정훈은 앞서 언급했듯 정치 훈련(政治訓練)의 약자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싶다. 새로운 '정훈'의 시대를 맞이한 김에 국민을 상대로 정치 훈련을 담당하는 '국가정훈부'를 만드는 건 어떨까.
전 국민의 정신 전력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돼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에 건의하는 바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수호하느라 점점 과중해지는 국가보훈부의 업무를 덜기 위해서라도 '국민 정훈'을 전담하는 국가정훈부가 필요할 것 같다.
설립 목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 하는 공산전체주의의 흔적을 대한민국 내에서 모조리 찾아내 없애고, 모든 국민을 완벽한 자유인으로 만드는 것' 정도가 어떨까. 이 기관 산하에는 '사상 감정'을 전문으로 하는 '완벽한자유인 연구원'을 두고 홍범도를 비롯해 문제가 된 과거 인물들에 대한 조사도 본격화하면 되겠다.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위장 국민'들의 행위들, 그들의 과거 이력, 그들의 상징물을 조사하는 권한도 부여하면 좋겠다. 국가정훈부 공무원들을 각 부처에 파견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공무원에게는 의무적으로 '정훈 교육'을 해야 할 것하다. 그리고 용산 대통령실에 '국민정훈비서관'도 추가하는 게 좋다. 대통령의 정훈 교육 지침을 부처에 전달하고 대중에 알려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니까.
신설될 '국가정훈부'는 1호 과업으로 당장 전국에 '홍범도'라는 이름이 들어간 모든 것에 대한 전수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흉상, 도로, 건물, 교과서 등 모두 파악하고 철거하자. 철거가 어려우면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을 소상히 적어 후대에 알리고 윤석열 정부에서 비로소 흉상 철거와 도로명 변경, 해군 함명 변경이 이뤄졌다는 업적을 적어 넣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역사 전쟁' 속에 울려퍼진 '윤석열 독트린'의 수정 역사관을 정식 역사관으로 완성시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국가정훈부, 얼마나 멋진 신세계인가.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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