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열두 번째 특별과외] '전략 마련이 먼저'라는 산업연구원, '삽질부터 하겠다'는 정부
23.09.12 07:09최종 업데이트 23.09.12 08:52
▲ 산업연구원은 펴낸 <세계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지형과 정책 시사점> 보고서 표지 ⓒ 산업연구원
오늘은 산업연구원에서 비메모리 반도체 관련해서 내놓은 보고서 하나를 대통령께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산업연구원은 누리집 소개에 따르면 "국내외 산업과 무역통상 분야를 서로 연계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국내 유일의 국책연구기관"입니다.
지난 3일, 산업연구원은 '세계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지형과 정책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펴냈습니다. 보고서가 나온 날 언론들은 "한국 비메모리 반도체 점유율 3.3%… 주요국 최하위"(연합뉴스), "반도체 강국이라더니 이 분야는 처참… 중국 절반에 그쳐"(매일경제) 같은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반도체 전쟁' 시대에 한국 기업이 비메모리 산업 발전을 목표로 자원 투입을 확대하는 상황에 정부도 발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보고서는 세계 반도체 시장의 현황을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2022년 기준 총 6000억 달러(약 780조 원)가량으로, 이중 메모리 비중은23.88%, 비메모리 비중은 76.12%를 기록해 비메모리반도체 시장 규모는 메모리의 약 세 배 수준입니다.
비메모리반도체 매출액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시장 규모는 약 4564억 달러(약 593조 원)인데, 이중 매출 합계 및 점유율에서 미국이 54.5%로 압도적 1위입니다. 2위는 유럽(11.8%), 3위는 대만(10.3%), 4위는 일본(9.2%), 5위는 중국(6.5%)이고, 한국은 3.3%로 6위입니다. 메모리 분야인 DRAM 및 NAND 부분에서는 한국의 점유율이 각 70%, 50%로 맨 앞에 있는 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비메모리는 존재감 자체가 희미한 수준입니다.
▲ 국가별 비메모리 매출액과 점유율. 한국은 3.3%로 6위입니다. ⓒ 산업연구원
그동안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3nm GAA 공정 양산에 성공했고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에 이어 점유율이 두 번째라는 보도가 많았기 때문에 비메모리 분야에서 이 정도일 줄은 다들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점유율 3.3%라는 결과에 "처참"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거겠지요.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보고서에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들은 이 내용을 굳이 보도하지 않더라구요. 삼성과 TSMC의 공정별 매출액 비교입니다.
▲ 삼성과 TSMC의 공정별 매출액 비교표. 첨단 공정 뿐만 아니라 레거시 공정에서도 매출의 차이가 큽니다. ⓒ 산업연구원
2022년 기준 5nm 공정 매출액을 보면 삼성은 947만 달러로 TSMC에 비하면 20분의 1 수준에 불과합니다. 매출액 비중이 가장 높은 7nm/10nm 공정에서도 두 회사의 매출액 차이는 5배 이상입니다. 삼성 파운드리가 미세공정 기술이 없어서나 주문을 소화할 공장이 부족해서 이런 차이가 나는 게 아닙니다.
파운드리 반도체 경쟁은 미세공정을 누가 먼저 개발했느냐 보다는 공정의 안정성, 제품의 신뢰성 그리고 고객인 팹리스 업체와의 협업이 더 중요합니다. 보고서에서도 "비메모리의 경우 메모리와 같은 상대적으로 정형화된 접근 방식(속도 및 수율 향상 등)만으로는 시장 공략에 한계가 분명하며, 장기간에 걸친 목표 대상 분야(도메인) 실력 배양과 네트워크 형성이 필요한 분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메모리는 속도와 물량만으로 되는 분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국가별 특징,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
▲ 2022년도 세계 비메모리 주요 수요산업별 상위 10개 기업 매출액 및 점유율 현황. 소자 종류별로 3위 안에 포함되는 한국 기업은 하나도 없습니다. ⓒ 산업연구원
보고서는 세계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국가별 특징도 정리해 두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CPU 및 AP 등 범용 프로세서, 유무선 통신, 군사, 우주·항공 및 자동차와 기계 등에 투입되는 아날로그, 개별 소자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시장을 과점하고 있고,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자동차 및 산업용 로봇 등에 쓰이는 반도체와 광학·비광학 센서류에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특징은 '전략형 선택과 집중'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유럽의 주력 제품에 더해 CMOS 이미지센서와 정밀 통신소자 등 자체 및 범용 수요가 있는 분야에도 일부 경쟁우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만의 경우 '시장형 선택과 집중', 즉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투입 수요가 큰 일부 소자군에 강점을 지니고 있고, 중국은 폭넓은 제조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어 다양한 비메모리 소자 전반에 걸쳐 기업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주요 소자분류별 매출에서 1위를 차지한 분야는 없으며, 주요 기업 수 역시 타 국가 대비 매우 적습니다. 보고서는 한국의 경우 "향후 국가의 시스템반도체 전략 수립과 포지션 식별에서 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방향 모색을 위한 다각적 실태진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백지상태에서 "종합적 정보 수집과 분석"을 통해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 국가별로 비메모리반도체산업의 뚜렷한 특성이 있지만 한국은 포지셔닝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산업연구원의 평가 ⓒ 산업연구원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추상적인 구호일 뿐
보고서는 이와 같은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시사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수요산업 및 용도별 시스템반도체 소자는 매우 다양하며 개별 기업의 규모, 강점 기술 분야(도메인), 비즈니스 모델 역시 상이하다.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혹은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 등의 구호는 추상적이며, 성공 확률이 극히 낮은 무수한 개별 소자 가운데 소수 일부에 자원 투입이 편중될 우려가 있다. 반도체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신(新)수종 사업의 성공률은 높지 않으며, 다양한 비메모리 소자 부문에 대한 철저한 사전조사 및 주요 기업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다종(多種) 소자 및 기술을 포괄하는 포트폴리오 접근이 필요하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대통령님이 직접 발표한 "세계 최대 규모의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와 지난해 7월 산업부 장관이 관계부처 합동으로 내놓은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전략"이 떠올랐습니다.
ⓒ 이봉렬
국책연구기관 보고서에서 현 정부의 비메모리 분야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구호는 추상적이며, 철저한 사전조사 없이는 성공확률이 낮다고 지적한 것으로 전 보이는데 대통령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아직 잘 모르겠다구요? 그럼 보고서의 다음 문장을 더 읽어 보시죠.
"'국가첨단전략산업특별법' 등의 마련으로 한국 중앙정부는 시스템반도체산업 지원 근거 및 거버넌스를 마련하고 자원 투입 확대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국가 재원을 투입하더라도 한국 기업들의 시장 개척 가능성이 낮거나, 성공하더라도 단일 소자 시장 규모가 크지 않은 분야의 경우 예산 사용의 타당성 및 경제안보 레버리지 확보 목표와의 괴리가 우려된다.
한정된 국가 자원의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낭비 예방과 비메모리산업 발전을 위한 실체적 대안 모색을 위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시스템반도체산업의 복합적 다양성과 메모리와의 차별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국내 역량의 다각적 실태 파악이 요구된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적 전략 수립 및 해당 전략에 기반한 중장기 관점의 자원 배분 기능 강화가 필요하다."
쉽게 풀이하자면 대통령님이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자원 투입을 확대하고 있지만, "시장 개척 가능성이 낮거나" 성공하더라도 그 실효성에 의문이 든다는 겁니다. 예산을 투입하기 전에 "실태 파악"부터 하고 "전략"부터 세우라는 주문인 겁니다.
산업연구원이 보고서를 통해 이 같은 주문을 한 다음 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 겸 수출투자대책회의에서는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예타 면제"를 발표했습니다.
예타, 즉 '예비 타당성 조사'라는 게 뭔가요? 정부가 시행하는 대규모 재정사업이 경제성, 정책성, 지역균형발전, 기술성 등의 기준에 맞는지 평가하여 재정 운영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제도 아닌가요? 그런데 반도체 산단을 하루라도 빨리 해야 한다며 예타 면제를 발표했습니다.
용인에 짓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산단이 과연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는지, 실제 추진 과정에 문제는 없는지, 지역균형발전에 저해되는 건 아닌지 등을 조사하는 과정 없이 재정을 투입해도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긴 한 건가요?
국책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은 보고서에서 "한정된 국가 자원의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낭비 예방과 비메모리산업 발전을 위한 실체적 대안 모색을 위해서 시스템반도체산업의 복합적 다양성과 메모리와의 차별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국내 역량의 다각적 실태 파악이 요구된다"고 했는데, 정부는 일단 반도체 공장부터 빨리 짓고 보자는 식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럴 거면 세금 써 가며 반도체 산업에 대한 연구는 왜 하는 건가요?
대통령님은 작년에 국무위원들에게 과외교사를 붙여서라도 반도체 공부를 더 해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국무위원 이전에 대통령님부터 과외공부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굳이 과외까지는 아니더라도 국책연구기관이 공들여 준비한 보고서 정도는 국정에 참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님께 산업연구원의 보고서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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