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교육·청소년 등 각계각층 참여…정부 규탄하며 ‘연대의 힘’ 강조
- 조한무 기자 chm@vop.co.kr
- 발행 2023-09-23 18:46:31
23일 서울 세종대로에서 ‘923 기후정의행진’이 열렸다. 지난해에 이어 3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조직위원회에 참여한 단체도 500곳 이상에 달한다. 단체 면면을 보면, 기후·환경뿐 아니라, 노동, 교육, 동물권, 의료, 청소년, 여성 등 사회 제 분야를 망라한다. 현장에는 엄마, 아빠 품에 안긴 아이부터 중장년층까지 남녀노소가 함께 했다. 전동휠체어에 탄 시민이 지나갈 때면 북적이는 인파가 갈라지며 길이 생겼다.
한국에서의 기후행동은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 활동을 계기로 지난 2019년부터 시작됐다. 올해 슬로건은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이다. 응집된 연대의 힘으로 기후위기를 넘자는 취지다.
무대에 오른 권우현 923기후정의행진조직위원장은 “기후위기가 일자리와 거주 공간을 위협하고 생명의 위기로 닥쳐오는 동안 정부는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했다”며 “위선과 모순의 보수 정치가 아닌 우리의 힘으로 위기를 넘어서려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조직위는 5대 요구안으로 ▲기후재난으로 죽지 않고,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라 ▲핵발전과 화석연료로부터 공공 재생에너지로,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전환 실현하라 ▲철도 민영화를 중단하고 공공교통 확충하여, 모두의 이동권을 보장하라 ▲생태계를 파괴하고 기후위기 가속화하는, 신공항 건설과 국립공원 개발사업 중단하라 ▲기업과 부유층 등 오염자에게 책임을 묻고,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등을 제시했다.
원전 고집하며 환경단체 탄압하는 정부 규탄
기후정의에 역행하는 정부를 향한 비판 목소리가 나왔다. 권우현 위원장은 “2021년 만들어진 탄소중립 시나리오부터 올해 만들어진 탄소중립 기본 계획까지 정부의 요란한 탄소중립 타령은 전부 거짓이었다”면서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온실가스를 뿜어대며 미국까지 나아가서는 유엔 기후목표 비정상회의에는 참석도 안 했다”고 비판했다.
윤 대통령은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이른바 ‘CF(카본 프리) 연합’을 제안했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 에너지에 원전을 더한 플랫폼이다. 원전을 인정하지 않는 ‘RE(재생에너지) 100%’ 운동의 대안 성격인데, 세계적인 추세와 동떨어졌다는 시각이 많다. 조직위원회는 전날 성명을 통해 “윤 대통령은 결코 기후위기의 해법이 될 수 없는 핵발전 확대에만 골몰하고 있다”면서 “국내 핵발전 유지와 확대로도 모자라, ‘기후위기 취약국’에 핵발전을 확대하고 수출하기 위한 속셈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환경운동에 대한 표적 수사 대상이 된 정규석 녹색연합 사무처장은 “당장의 요구와 결의가 현실이 될 수 있게 소리를 높여야 한다”며 “더 큰 대오로 어긋난 정부 정책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6일, 경찰은 ‘4대강 보 존치를 위한 물관리기본계획 변경안’ 공청회에서 단상을 점거하고 해산명령을 거부한 혐의로 정 사무처장 등 5명을 현행법으로 체포했다. 이후 정 사무처장과 문성호 대전충남녹색연합 상임대표, 박은영 대전충남녹색연합 사무처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에서 기각됐다.
정 사무처장은 정부의 왜곡된 정책으로 심화되는 환경 오염에 대한 위기감을 드러냈다. 그는 “국토는 무수히 파헤쳐지고, 바다의 회복 탄력성은 어느 때보다 취약하고 위험한 지경”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돌려세우지 않으면, 변화시키지 않으면, 역전의 가능성은 영영 없다”면서 “변화와 저항의 최전선을 지켜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잇따른 기후재난에도 복지부동 정부…“비민주주의 체제가 비극 만들어”
일본 탈핵 운동가, 오염수 방류 사과…“원전, 차별·불평등 심화시켜”
올해 잇따라 발생한 기후재난을 상기시키며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지난여름 서울에서 일어난 수해 참사로 동작구와 관악구 반지하에 살던 이웃들이 목숨을 잃었다”면서 “단지 기후위기가 아니라 불평등한 이 사회가 재난의 순서를 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와 서울시는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겠다고 공언했지만, 전수조사는 표본조사로 변경됐고 각종 대책의 선정 기준은 말할 수 없이 까다로웠다”면서 “정부는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5조원이나 삭감했다”고 짚었다.
그는 지난 5년 6개월간 상위 30명의 주택 매입 건수가 8천건에 달한다고 지적하면서, “사회가 돈을 버는 방식이 빈곤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 둘이 완전히 연결되어 있고, 이 둘을 함께 변화시키는 것만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두 달 전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겪은 청주 지역 주민도 마이크를 잡았다. 오송참사시민대책위에서 활동하는 정미진 충북녹색당 사무처장은 “참사 현장은 복잡한 법과 행정 체계를 잘 알지 못해도, 그저 주민의 상식으로만 보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새벽부터 내린 홍수 경보에도 하천 바로 옆 지하차도는 통제되지 않았고, 임시 제방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고 지적했다. 이어 “참사 직후 지난 두 달은 참사의 그날만큼이나 비참했다”면서 “재난 최고책임자인 충북도지사와 청주시장은 책임 회피에 바빴고, 국무조정실의 감찰 조사 결과는 최고책임자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고 짚었다. 유가족과 시민대책위는 오성 지하차도 참사를 중대시민재해로 규정하고, 충청북도지사와 청주시장, 행복청장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고소·고발했다.
정 사무처장은 “비민주적인 정치·경제 체제가 기후재난 시대에 비극을 만들어 내고, 정치와 자본 권력이 우리 손으로 직접 기후재난을 대비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면서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 처벌을 촉구했다.
일본 시민사회도 힘을 모았다.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은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사과로 말문을 열었다. 사토 사무국장은 “일본은 오염수 해양 투기를 막지 못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했지만 이번에도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면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한다”고 말했다.
반핵아시아포럼은 지난 19일부터 이날까지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 원전이 밀집된 부산·고리·울산·경주·울진·삼척을 찾았다. 사토 사무국장은 “지난 30년간 아시아 각국 사람들은 핵발전소를 추진하는 세력과 싸워왔다”면서 “탈핵 운동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핵발전은 기후위기 대안이 아니다”라고 사토 사무국장은 힘주어 말했다. 그는 “사고 위험 핵폐기물 문제를 가진 핵발전소는 차별과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오히려 재생에너지 확대를 막는다”면서 “전 세계에서 기후정의와 탈핵을 요구하는 목소리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만에서는 2025년에 탈핵이 이뤄진다”면서 “우리도 대만을 따라가자”고 했다.
마지막 화력발전소 세워지는 삼척 주민 “탈석탄법 제정 동참해달라”
화력발전소 노동자들 “노동자·지역사회 보호하는 정의로운 전환 이뤄야”
석탄화력발전소 반대 투쟁의 현장 목소리도 전해졌다. 하태성 삼척석탄화력반대투쟁위 상임대표는 “우리 시대 마지막 석탄발전소, 우리 손으로 끝내야 되지 않겠는가”고 힘주어 말했다. 현재 강원 삼척에서 석탄화력발전소 ‘삼척블루파워’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다. 포스코 자회사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단일 호기 기준 국내 최대 규모의 1호기와 2호기가 각각 다음 달, 내년 4월 완공될 예정이다.
이 문제를 국회가 방관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하 상임대표는 “지난 1년간 우리는 탈석탄법 입법 청원 5만명 달성을 달성해 국회에 넘겼다”면서 “그러나 국회는 1년이 지나도록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류호정 의원이 대표발의한 탈석탄법은 이미 허가를 받은 석탄발전사업을 철회하고, 신규 허가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 상임대표는 “왜 삼척은 석탄과 시멘트 같은 기후위기의 주범 공해물질 속에서 악연을 끊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삼척 시민이 이등 시인도 아니고, 여러분과 똑같은 시민”이라며, 탈석탄법 제정 촉구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기후위기 대응 과정에서 노동자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송민 한국노총 공공노련 탈석탄일자리위원장은 “윤석열 정부 출범하면서 탄소중립위원회와 녹생성장위원회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정의로운 전환의 당사자인 노동계 위원은 단 한 명도 배정되지 않았다”고 짚었다. 이어 “정부는 사용자와 기업 경영을 대변하는 위원들은 참여를 보장하면서, 탈석탄으로 자신과 가족의 삶이 무너진 노동자 의견은 배제하는 차별적 구조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은 기후환경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탄소중립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면서 “하지만 발전소 폐지와 함께 사라지는 노동자들의 삶은 정부가 나서서 보호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탄소중립 기본법에 명시된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강조했다.
김영훈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전KPS 비정규직 지회장도 “석탄화력발전소가 폐쇄돼도 우리의 삶이 폐쇄될 수 없다”면서 “하지만 정부가 내놓을 대책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는 ‘산업 전환에 따른 해고는 당연하다’라는 전제를 앞세우고 있다”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 고용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떠나면 붕괴되는 지역사회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환경과 사람을 희생시키는 전환은 안 된다.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본대회 이후에는 행진이 이어졌다. 행진은 용산 대통령실로 향하는 코스와 일본대사관을 거쳐 서울정부청사로 가는 코스로 나뉘어 진행됐다. 행진 중간에는 ‘다이-인(die-in)’ 시위가 펼쳐졌다. 사이렌 소리에 맞춰 참가자들이 바닥에 드러눕는 퍼포먼스로, 기후부정의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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