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에서 빈(bin)은 '~의 아들(son of)'이라는 뜻이다. 크게 봐서 '빈' 앞에 오는 게 개인명, '빈' 뒤에 오는 게 아버지 이름(집안명)이다.
세계 최고 부호로 알려진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사진)가 지난해 11월 한국을 다녀갔다.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 불리는 그는 한국 재계와도 인연이 깊다. 지난 방한에서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평소 알고 지내던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들을 만나면서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무함마드 빈살만…살만의 아들 무함마드주목할 것은 한국 언론에서 그의 이름을 두 가지로 부른다는 점이다. 대부분 ‘빈살만 왕세자’라 칭하지만 간혹 ‘무함마드 왕세자’라고 하는 곳도 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 표기는 그가 겪은 역사적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동시에 우리 외래어 표기 정신의 특수한 측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들여다볼 만하다.그동안 살펴본 몽골과 베트남, 미얀마인명도 쉽지 않았지만 아랍인명은 이름을 구별해내는 게 유난히 까다롭다. 이들 역시 성(姓)과 이름(名)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성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일단 ‘빈’을 중심으로 가르는 게 요령이다. 이슬람에서 빈(bin)은 ‘~의 아들(son of)’이라는 뜻이다. 크게 봐서 ‘빈’ 앞에 오는 게 개인명, ‘빈’ 뒤에 오는 게 아버지 이름(집안명)이다. 가령 사우디의 현 국왕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를 보자. ‘알’은 영어의 정관사 the 같은 것으로, 부계 씨족 앞에 놓이는 말이다. 이름을 풀면 ‘사우드 가문의 압둘아지즈의 아들 살만’인 셈이다. 그러니 그를 나타낼 때 ‘살만 국왕’이라고 부르면 된다.
아랍인명 적기가 꼬인 건 기억에도 새로운 ‘오사만 빈라덴’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의 이름이 한국 언론에 본격 등장한 게 2001년 9·11테러 전후다. 그는 원래 ‘오사마 빈무함마드 빈아와드 빈라덴’이란 긴 이름을 가졌다. 이걸 당시 외신에선 가운데 이름을 빼고 앞뒤 이름만 따서 ‘오사마 빈라덴’, 즉 ‘라덴의 아들 오사마’라고 불렀다. 애초에 부름말을 오사마라고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외신에서 맨 뒤 이름을 영어권의 패밀리네임으로 쳐서 그를 ‘빈라덴’으로 불렀고 이를 국내 언론에서도 그대로 받아 적었다. 국내에서 이런 사정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언론이 일관되게 ‘빈라덴’으로 쓰고 있어서 되돌리기 어려웠다. ‘오사마’ 대신 ‘빈라덴’이 국내 표기로 자리잡게 된 곡절이다.관행표기, 외래어 적는 정신 중 하나여기서 우리 외래어 표기 기준 하나를 유추할 수 있다. ‘관행은 원리원칙을 앞선다’는 것이다. 언어생활에서 관행적으로 굳은 표기는 그대로 적는다는 뜻이다. 이는 뒤늦은 정정으로 빚어질 국어생활의 혼란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국민이 쉽고 익숙하게 여기는 표기를 모범으로 삼는 게 외래어 표기 정신에 부합한다. 20여 년이 흐른 요즘,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무함마드가 아니라 빈살만으로 불리는 배경에도 그런 사정이 있었다.
그의 이름을 좀 더 자세히 보면 ‘무함마드 빈살만 빈압둘아지즈 알사우드’다. 이를 풀면 ‘사우드 가문의 압둘아지즈의 아들 살만의 아들인 무함마드’이다. 무함마드가 본인을 가리키는 이름이니 그리 부르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이전부터 국내 언론에서 ‘무함마드 왕세자’로 부르던 이가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짧은 시간여행이 필요하다.
사우디는 초대 국왕인 압둘 아지즈 국왕의 유언에 따라 형제상속제로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에 따라 원래 왕세자는 무함마드 빈살만의 사촌형인 ‘무함마드 빈나예프’였다. 2017년 초반까지 한국 언론에선 그를 ‘무함마드 왕세자’로 불렀다. 무함마드는 예언자를 뜻하는 말로 이슬람교도 사이에 선호도 1위인 이름이다. 그해 여름 무함마드 빈살만은 무함마드 왕세자를 기습 감금하고 왕위 계승권과 함께 권력을 장악했다. 국내 언론에서는 새로운 왕세자를 나타낼 이름이 필요해졌다. 사촌형인 ‘무함마드 왕세자’와 구별하기 위해 무함마드 빈살만을 ‘빈살만 왕세자’로 적게 된 배경이다. 2019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우디를 방문했을 때는 대부분의 국내 언론에서 그를 ‘빈살만 왕세자’로 칭하면서 관행적 표기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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