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칼럼]
해괴한 풍경이다. 여러 조사에서 가장 불신 받는 신문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의제에 내로라하는 정객과 논객들이 줄줄 놀아나고 있다. 더욱이 그 신문 논설위원과 TV조선 앵커가 금품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주필 송희영의 비리가 드러나자 돌연 방대한 윤리규범을 만들었다며 한국 언론의 품격을 높이겠노라 호들갑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문제의 논설위원은 ‘윤석열 대변인’으로 직행도 했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다음날이다. 조선닷컴은 오전 11시에 “대한민국, 친일세력·美점령군 합작…깨끗하게 출발 못해” 제목으로 그의 발언을 큼직하게 머리로 올렸다. 기사는 그 발언으로 “대선 과정에서 역사 논쟁이 불거질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그때까지 어떤 신문도 그 대목을 부각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딱히 기사 쓸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고향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해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독립운동으로 옥사한 이육사 시인에 충분한 예우나 보상을 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방점은 ‘독립운동가 충분한 예우’에 있다.
조선닷컴에 이어 조선일보가 다음날 ‘친일·미 점령군이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제목을 1면에 내걸었다.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이 합작해 지배체제를 유지했다’는 발언을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으로 깜냥껏 몰아갈 의도였다. 조선일보와 TV조선에 나오고 싶은 정객들이 너도나도 나섰다. 윤석열까지 등판했다. 이재명이 “상식을 파괴하는 세력”이자 “역사 단편만 부각해 맥락을 무시하는 세력”이란다. “용납할 수 없다”고 으름장 놓았다. 공안검사 뺨치는 천박한 인식이다.
뒤늦게 중앙일보도 “대선 역사전쟁”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사설 제목도 “이재명의 위험한 인식이 촉발한 역사 논쟁”이다. 최장집 교수까지 끌어왔다. 인터뷰에서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가 “조야한 역사의식”과 함께 “현대사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다시 불러들인 것은 진정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최 교수의 진의를 담지 못했으리라 믿으면서도 궁금하다. 대체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 이재명인가, 조선일보인가.
이참에 또박또박 묻는다.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해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는 말에 문제가 무엇인가. 그 말에서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가.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제대로 예우하지 못했다며 배경을 설명하는 말이 “조야한 역사인식”이란 말인가.
친일파가 미군정과 손잡고 지배체제를 유지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누구 감히 부정하려는가. 다름 아닌 조선일보의 어제와 오늘이, 백범 김구의 암살이 생생한 증거다. 대체 누가 상식을 파괴하는가. 누가 단편적 지식으로 맥락 잃은 인식을 자랑하고 있는가. 누가 ‘극우 신문이 공직자의 사상을 검증’하는 놀이에 용춤 추는가. 오해 없도록 명토박아둔다. 이는 특정후보에 대한 찬반이나 호오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공론장 문제다. ‘과거 농단’은 과거 문제도 아니다. 미래 문제다.
깨끗하지 못했던 출발을 4월혁명, 5월 민중항쟁, 6월 항쟁, 촛불혁명으로 지며리 가꾸어 온 것이 대한민국 정통성이다.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친일반민족 언론’이던 신문의 불순한 의도에 들꾀어선 안 된다.
가장 불신 받는 언론이 작심하고 덤벼든 ‘대선 놀이’를 경계해야 할 섟에 되레 숱한 정객과 논객이 놀아나고 심지어 명망 있는 학자까지 동원하는 언론 행태는 단순히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살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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