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 19:46
최종 업데이트 20.07.0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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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채시험 고사장 2019년 10월 모 지상파 방송국 공채 필기시험 고사장 | |
ⓒ 이민호 |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논란을 보면서 느낀 감정은 숨 막히는 답답함이었다. '또 시험장으로 수많은 경쟁자를 몰아넣겠다'라는 예감. 지난해 가을, 모 지상파 언론사 공채시험을 보러 갔었다.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 한 대학에 마련된 고사장에 도착했다. 강의동이 시험 응시생으로 빼곡했다. 이 언론사는 서류전형을 두지 않아 원서를 내면 모두 시험을 볼 수 있게 했다.
전형에 응시한 수백 명 중에, 필기-역량면접-다면심층면접-최종면접의 문을 거쳐 한 손에 꼽히는 몇 명만 정규직 방송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응시생들의 뒤통수를 보고 있다가, 그 생각에 이르니 가만히 앉은 내 주변 강의실 벽이 빙빙 몇 바퀴 도는 것 같았다. 어질하고 답답해 복도에 나가 정수기 물로 목을 축이고, 숨도 크게 들이쉬고 정신을 차렸다.
자리에 앉아 1교시 '종합교양 및 분야별 직무 관련 지식' 시험을 치르고, 2교시 논술 시험을 봤다. 1교시는 숨 가쁘게 지문을 읽고 답을 찍어 내리는 전형적인 객관식 시험이었다. 2교시는 두 개의 주제를 주는 작문 시험이었다. "커밍아웃과 함께 동성 결혼을 부모님께 설득하는 편지쓰기", "질병 혹은 철학적 이유로 안락사 동의를 자녀에게 부탁하는 편지쓰기".
둘 중 하나를 골라 원고지를 채워야 했다. 두 번째 지문을 골랐다. 시지프 신화와 소크라테스를 불러내 '쳇바퀴처럼 도는 삶 속에서 너희를 만난 기적에 감사하며,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내용의 편지로 원고지를 채우자 시험이 끝났다.
시험은 공정한가
지상파 방송사들의 광고시장 점유율이 점점 감소하는 추세고 장래가 어둡다지만, 많은 언론계 취준생들은 여전히 기를 쓰고 이곳에 입사하려 한다. 침몰하더라도 화려하고 덩치 큰 타이타닉에 올라타면 구조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데 서면 다른 살길이라도, 월급 몇 푼이라도, 거인에 올라탔었다는 후광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일 것이다. 무엇보다 '괜찮은 언론인이 되겠다'는 그 꿈 때문일 테다.
그래서 언론인 지망생들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논술과 작문 스터디를 하며 글을 쓰고, 상식 공부를 하고, 한국어능력시험을 치고, 이런저런 자격증을 따며 공채시험을 보러 다닌다. 인턴이나 대학원, 학보사, 마이너 언론 등 경험치를 차곡차곡 쌓는 것도 흔한 일이다. 이와 비교하면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신입직원 채용 전형은 웬만한 언론사들 이상으로 복잡하고 요구하는 것도 많다. 사무직을 기준으로, 경험과 경력을 본다는 자기소개서, 어학과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 등을 요구한다. 변호사나 회계사와 같은 전문직 자격증은 난이도로 3단계 등급을 나누고, 등급마다 꼼꼼하게 가점을 붙여 놨다.
공기업이 흔히 보는 전공 NCS 전형에 직무적합도를 묻는 AI면접, 직무역량면접, 인문학 논술시험과 심층면접 등 6단계를 거쳐야 한다. 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공부하고 준비할 것도 많고, 시간도 적잖게 걸린다. 이런 공부를 하려면 비용도 많이 든다. 시험 잘 보는 요령을 배우려면 학원은 필수다.
여기서 묻고 싶다. "공기업 '정규직'이 되려면 6단계 시험을 통과하는 길 만이 적합하고, 공정한 과정인가? 언론인이 되는 길이 공채 전형을 통과하는 것이라면, 이런 과정은 언론인이 되는 데 적합한가?"라고 말이다.
이 질문에 "확실히 공정하고 적합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취준생들은 모두 주말마다 열리는 각종 고시와 자격시험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각급 학교를 거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험을 보았던가? 시험 결과로 나를 판단 받다 보니, 이제 시험 결과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판단할 기준도 잃어버린 것인가?
모든 인국공 입사자들은 시험을 봐야 하는 걸까? 그래야 취업준비생들의 박탈감과 상실감은 채워질 수 있는가? "시험이 어쨌든 공정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자리를 놓고 다투는 수많은 취준생의 아수라장은 계속되어야 한다. 공채 시험, 자격증 시험을 놓고 재수와 삼수를 거듭하는 이들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정규직'이라는 성취를 위해서라면 돈과 시간과 젊음을 바치는 것이 당연한가?
언제쯤 이 나락에서 구원될 수 있을까
▲ 인천국제공항공사노동조합 소속 조합원들이 25일 오후 서울 청와대 인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비정규직 보안검색 요원들의 정규직 전환 관련 입장을 발표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 |
ⓒ 연합뉴스 |
어떤 사람들은 인국공 정규직화를 반대하며 '취준생은 기회를 박탈당했고, 누군가는 쉽게 지위를 얻는다'며 상실감을 운운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떤가? <매일노동뉴스>에 게재된 노승식 인천국제공항보안검색 노조 사무처장의 글을 간단히 옮긴다.
(보안검색 노동자는) 경호나 보안 관련 학과를 나온 경우가 많고, 208 시간 교육을 수료해야 하고, 국토교통부 주관 인증평가(필기와 실기)를 합격해서 보안검색 인가증을 받는다. 그 자격이 있어야 근무에 투입된다. 모니터 판독 업무를 하려면 1년이 걸리고, 1년 지나야 기본 업무를 하는데 수많은 장비 교육을 받는다. 위탁수하물 검색, 폭발물 탐지시스템, 단층촬영 기반 검색, 액체 폭발물 탐지, 비디오 행동탐지 기법 등 수개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알바가 할 수 있겠나.
우리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일한다. 하루 12시간 근무가 많다. 연봉 3300만원은 야간·연장근로수당을 포함한 것이다.
이런 경력을 쌓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자기 직무의 정규직이 될 자격이 충분치 않다는 것일까.
SBS 등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18년 12월 인천국제공항공사 제2기 노·사·전문가협의회 합의 사항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이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약속한 2017년 5월 12일 이후 입사자들은 경쟁채용 과정을 거치게 됐다. 친인척 채용 등 불공정 채용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또, 뉴시스는 2017년 5월 12일 이전 입사자 1000여 명은 서류와 인성·적성검사 그리고 면접을, 그 이후 입사자 900여 명은 인성검사, 필기전형, 면접 등을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상당수 인국공 비정규직 보안검색 직원들은 다시 책상 앞에, 시험장에 앉게 됐다. 이것으로 충분한 공정성이 충족되지 않았는지, 인국공 정규직 노조는 올해 2월 3기 노·사·전문가협의회 합의 사항으로 보안검색 직원들을 직고용 청원경찰이 아니라 '별도회사(자회사)'로 채용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노조는 '사측이 합의를 지키지 않는다'며 헌법소원과 감사원 공익감사를 준비하고 있다.
공기업 정규직이라는 자리를 놓고, 이미 수성한 정규직과 '비'자를 때려는 비정규직 - 심지어 서로 다른 직무 - 간에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그만큼 벽이 높아진 정규직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일 테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정규직이 될 자격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우리는 결국 모두를 시험장에 앉히고 줄을 세워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시험으로 누군가를 판별하는 것이 업의 본질과는 상관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것이다.
인국공 정규직 전환 논란에서 '정규직이 될 자격'이란 직원이 갖춰야 할 업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시험 점수가 본질이며, 점수로 사람을 판단해야 한다는 오래된 관습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성을 본다.
이런 관습이 직종과 직무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숨 막히는 경쟁의 나락으로 이끌어간다. 이 나락을 벗어나는 소수만 정규직의 세계로 간다. 우리는, 언제쯤 이 경쟁의 나락에서 구원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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