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9년 11월 3일 일요일

지금 놓치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곳

19.11.04 09:55l최종 업데이트 19.11.04 09:55l


 2018년 11월 대한민국 명승 제114호로 지정된 무등산 광석대와 규봉암. 규봉암 뒤쪽에 지공너덜이 ‘돌의 강’을 이루고 있다
▲  2018년 11월 대한민국 명승 제114호로 지정된 무등산 광석대와 규봉암. 규봉암 뒤쪽에 지공너덜이 ‘돌의 강’을 이루고 있다
ⓒ 무등산 국립공원공단

광주, 화순, 담양에 걸쳐있는 호남의 명산, 무등산은 시대에 따라 그 이름과 의미를 달리 했다. 백제 때는 무진악(武珍岳), 통일 신라 때는 무악(武岳) 또는 무돌이라 불렀다. 무돌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뜻이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서석산(瑞石山)이란 이름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렀다.

이밖에도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 등 여러 가지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광주사람들은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이 평등한 산'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무등산(無等山)'이라는 이름을 제일 좋아한다. 무등식당, 무등일보, 무등카센터, 무등시장, 무등산아파트, 무등산막걸리, 등등. 무등은 곧 빛고을 광주의 또 다른 이름이다.

광주의 진산, 무등산은 국내는 물론이며 세계적으로도 그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1000m 이상 고산지대에 위치한 주상절리대, 입석대와 서석대는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어 국가문화재로 보호를 받고 있다.
 
 규봉암 가는 길, 무등산 원효사 입구에도 단풍이 곱게 내려앉았다
▲  규봉암 가는 길, 무등산 원효사 입구에도 단풍이 곱게 내려앉았다
ⓒ 임영열

2018년 4월, 유네스코는 무등산의 지리적 경관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제주도 한라산과 청송의 주왕산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전 세계가 인정한 산이 되었다.

낙엽도, 인생도... 가을이란 떨어지는 계절

2018년 11월에는 서석대, 입석대와 더불어 무등산의 3대 주상절리대(柱狀節理帶)중의 한 곳인 '광석대와 지공 너덜'이 대한민국 명승 제114호로 지정됐다. 광석대는 무등산 삼대 석경(三大石景)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돌기둥이다. 8천만 년 전, 자연의 신이 만들어낸 돌기둥 아래에 무등산에서 가장 높은 하늘 끝 암자, 규봉암(圭峰庵)이 포근히 안겨 있다.

예로부터 "규봉암을 보지 않고 무등산에 올랐다 말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풍광이 빼어난 절경 중의 한 곳이다. 광석대와 규봉암은 사시사철 아름답지만, 특히 무등산에 단풍이 드는 10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룬다. 규봉암으로 향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원효 계곡에도 단풍이 곱게 내려 앉았다
▲  원효 계곡에도 단풍이 곱게 내려 앉았다
ⓒ 임영열

규봉암으로 가는 길은 크게 3개의 코스가 있다.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에서 오르는 탐방로와 가장 많은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증심사 코스, 증심사 반대편에 있는 원효사 지구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화순에서 가는 길이 가장 짧지만 접근성이 좋지 않아 이용객들은 많지 않은 편이다.

세 코스 중 늦가을의 단풍이 아름다운 원효사 코스를 추천한다. 정상 부근에 있는 입석대와 서석대와는 달리 반대편에 있는 광석대와 규봉암을 가려면 무등산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 무등산을 일주하는 코스라서 6시간 이상 걸어야 한다.

원효사에서 규봉암까지의 거리는 약 6km 남짓이다. 원효 계곡을 지나 1960~1970년대 신혼 여행지로 각광받았던 옛 산장 호텔에 이른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비밀 회동을 했던 곳이다. 엄혹했던 시절, 광주 민주화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낙엽을 수북이 뒤집어쓰고 있는 옛 호텔은 길손들에게 '폐허의 쓸쓸함'을 온몸으로 설하고 있다.
 
 규봉암 가는 길의 초입에 60~70년대 신혼 여행지로 각광받았던 옛 산장 호텔이 폐허의 쓸쓸함을 설하고 있다
▲  규봉암 가는 길의 초입에 60~70년대 신혼 여행지로 각광받았던 옛 산장 호텔이 폐허의 쓸쓸함을 설하고 있다
ⓒ 임영열

텅 비어 있는 폐허의 옛 터. 처연하게 물들어 가는 단풍과 발밑에 떨어져 바스락 거리며 뒹구는 낙엽에게서 초라해진 나를 반추해 본다. 문득, 꽉 차 있는 줄 알았지만 텅 비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세월무상, 인생무상이다. 혹자는 말한다. 가을이란 그렇게 떨어지는(fall) 계절이라고. 낙엽도 인생도.

갓 돋아난 새싹처럼 파릇파릇했던 청춘시절, 불면의 가을밤에 흐릿한 백열전등 아래서 암송했던 이양하의 수필, <페이터의 산문> 한 구절이 떠오른다.
 
잎, 잎, 조그만 잎. 너의 어린애도, 너의 아유자도, 너의 원수도, 너를 저주하여 지옥에 떨어뜨리려 하는 자나, 이 세상에 있어 너를 헐고 비웃는 자나, 또는 사후에 큰 이름을 남긴 자나, 모두가 다 한 가지로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세 무지개가 뜨는 '시무지기 폭포'

상념일랑 잠시 접어 두고 어여 가자. 갈 길이 멀다. 길은 다시 '꼬막재'로 이어진다. 한때 이 길은 등산객들로 붐볐지만 서석대로 직행하는 '무등산 옛길 2구간'이 개통되고 나서는 한산해졌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길보다는 온전하게 만추의 서정을 만끽할 수 있어서 더욱 좋은 길이다.
 
 옛 선조들이 나들이할 때 지름길로 이용했던 꼬막재. 꼬막재는 말 그대로 꼬막처럼 처럼 밋밋하고 완만하게 엎드린 고개다
▲  옛 선조들이 나들이할 때 지름길로 이용했던 꼬막재. 꼬막재는 말 그대로 꼬막처럼 처럼 밋밋하고 완만하게 엎드린 고개다
ⓒ 임영열

일 년 내내 푸르름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편백 나무숲과 조릿대길 지나 꼬막재에 이른다. 꼬막재는 말 그대로 꼬막처럼 밋밋하고 완만하게 엎드린 고개다. 옛 선조들이 나들이할 때 지름길로 이용했던 길목으로 보부상들도 이 고개를 이용했다고 한다.

고개를 넘어서자 옛 보부상들이 목을 축였을 샘터가 나온다. 이쯤 해서 나그네들도 '무등산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인다. 무등산에서 먹는 무등산 막걸리의 맛은 극대 만족이다. 이제부터 규봉암까지는 오르막이 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멍석이 깔린 푹신하고 편안한 가을길이 무등을 감싸고 휘돌아 나간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이어진다. 우리 가는 인생길이 이 길만 같다면 오죽 좋겠는가. 억새가 아름다운 신선대 억새 평전을 지나자 '시무지기 갈림길'이 나온다.
 
 우리 가는 인생길이 이 길만 같다면 오죽 좋겠는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이어진다
▲  우리 가는 인생길이 이 길만 같다면 오죽 좋겠는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이어진다
ⓒ 임영열

여기서부터 규봉암 까지는 온화한 사람들이 사는 곳, 화순(和順)의 땅이다 . 규봉암이 멀지 않았다. 갈림길에서 약 600m 정도 내려가면 시무지기 폭포를 볼 수 있다. '시무지기'라는 말은 전라도 방언으로 세 무지개라는 뜻이다. '시'는 세 개를 뜻하고 '무지기'는 무지개를 말한다. 비가 그치고 물보라가 햇살에 비추면 세 개의 무지개가 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약 70여미터의 물줄기가 세 갈래로 완만하게 내려오다가 하단 약 10m 지점에 이르러서 급전직하 수직으로 낙하하며 장관을 이룬다. 무등산 심마니들이 드나들던 길로 원시림 속에 숨겨진 비경 중의 한 곳이다.
 
 규봉암 가는 길에 있는 시무지기 폭포. ‘시무지기’라는 말은 전라도 방언으로 세 무지개라는 뜻이다
▲  규봉암 가는 길에 있는 시무지기 폭포. ‘시무지기’라는 말은 전라도 방언으로 세 무지개라는 뜻이다
ⓒ 임영열

무등산의 가을이 빚어낸 천상의 경관

내려왔으면 올라가야 하는 게 세상사 이치다. 다시 시무지기 갈림길로 원점 회귀다. 여기서 규봉암까지 남은 거리는 1.5km 남짓이다. 이 거리는 평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1.5km로 기억될 것이다. 무등산이 품고 있는 길에는 가을 나무들이 토해내는 색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무등산이 품고 있는 길에는 가을 나무들이 토해내는 색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  무등산이 품고 있는 길에는 가을 나무들이 토해내는 색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 임영열

붉다 못해 검붉어진 나무들의 가슴앓이. 노랗고 붉은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투명한 가을 햇살. 눈이 부시게 파란 쪽빛 하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소나무의 푸르름이 환상적인 그라데이션을 이룬다. 무등산 규봉암 가는 길의 가을 풍경은 한 동안 액자처럼 뇌리에 박혀 긴 여운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지상의 속세(俗世)에서 천상의 선계(仙界)로 들어온 느낌이다. 규봉암이 가까이 있음이다. 눈을 돌려 오른쪽 가파른 돌계단을 올려다보니 계단 끝에 극락의 문이 걸려 있다. 규봉암 일주문이다. 바로 옆에 거대한 규봉 사이에 바위돌 하나가 위태롭게 걸쳐 있다. 삼존석(三尊石)이라고 부르는 돌기둥이다. 옛날에 이곳을 다녀 갔던 인사들의 관등성명이 새겨져 있다.
 
 규봉으로 둘러친 돌병풍 아래에 소박한 암자, 규봉암 관음전이 양반집 규수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  규봉으로 둘러친 돌병풍 아래에 소박한 암자, 규봉암 관음전이 양반집 규수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 임영열
 
 규봉암은 송광사의 말사로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문헌에 기록된 것은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625~702년)가 창건했으며, 798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순응대사가 중창했다고 알려져 있다
▲  규봉암은 송광사의 말사로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문헌에 기록된 것은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625~702년)가 창건했으며, 798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순응대사가 중창했다고 알려져 있다
ⓒ 임영열
경내로 들어서는 순간, 동공이 저절로 확대되고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는다. 100여 개의 돌기둥이 깎아지른 듯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듯 하늘 끝에 아찔하게 매달려 있다. 규봉으로 둘러친 돌병풍 아래에 소박한 암자, 규봉암 관음전이 양반집 규수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고봉 기대승, 삼연 김창흡 등 옛 시인 묵객들도 규봉암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고려 말 문신, 김극기(1379~1463)는 그의 시에서 "저 기괴한 돌들을 무어라 이름 붙이기 어렵더니, 올라와 보니 만상이 공평하구나. 돌 모양은 비단으로 말아낸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라고 노래했다.
 
 비단을 잘라 세운 듯... 저 기괴한 돌을 무어라 이름하리
▲  비단을 잘라 세운 듯... 저 기괴한 돌을 무어라 이름하리
ⓒ 임영열
 
 무등산의 가을이 빚어낸 천상의 경관, ‘광석대'
▲  무등산의 가을이 빚어낸 천상의 경관, ‘광석대"
ⓒ 임영열

규봉암은 송광사의 말사로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문헌에 기록된 것은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625~702년)가 창건했으며, 798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순응대사가 중창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6· 25 동란으로 불탔고, 1957년에 관음전과 요사채를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ad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