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임자년(1912) 결성된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학생들은 매년 운동회와 웅변대회 등 각종 행사에서 친목을 도모하며 민족의 장래를 토론해왔다. 사진은 정사년(1917) 학우회 춘계 운동회 모습. 독립기념관
경술년(1910) 국망 이후 재일본 조선 유학생의 처지는 양가적이다.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비분강개하면서도 식민지 백성으로서 본국의 교육을 이식받아야 하니 말이다. 이제 막 댕기를 자른 참인데 서구화된 동경의 한복판에 놓이고 보면, 조선 반가의 자부심은 고사하고 당장 피착취민다운 수치심을 느끼거나 고국에서 온 몇푼어치 돈으로 향락에 빠지기 십상이다.
유학생 거개는 매판자본가나 고등관료의 자녀인데, 혹자는 식민지 본국의 실상을 파악하려 동경을 향하지만 거개는 지배계급에 편입하는 길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일단 조선땅을 떠나오기만 하면, 한층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서구 문물인 자유와 평등의 사상을 학습하며 ‘운동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 요즘의 분위기다.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학우회) 회장을 지낸 백남훈(34)씨는 “일본에 있는 우리 학생은 배우는 가운데 있을뿐더러 타국에 와 있으니 비교적 자유로운 처지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의 밀정을 피해가면서 토론도 하고 방법론에 대한 의견 교환을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오죽하면 일제가 일본 유학생을 ‘민족해방운동의 저수지’라고 했겠는가. 일본 경찰이 감시하는 재일본 요시찰 조선인 현황을 보면 무오년(1918) 기준 요시찰인 179명 가운데 147명이 학생층이다. 동경 유학생이 600~700명 수준이니 학생 4명 중 1명은 일경의 감시를 받고 있단 뜻이겠다.
임자년(1912) 조직된 학우회와 병오년(1906) 조직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YMCA)는 조선 유학생 반일투쟁의 구심점이다. 갑인년(1914) 학우회가 발행하기 시작한 기관지 <학지광>은 강제병합 이후 조선인에 의해 한글로 편집된 최초의 사상교양잡지로서 ‘사상의 장’ 구실을 해왔다. 경시청이 번번이 발매금지 처분을 하지만 일본 열도를 넘어 국내에까지 반입되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같은 해 신축한 기독교청년회관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는 유학생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마저 ‘일본 재주 조선인의 정황’에 대해 “고참 학생은 신도래 학생(새로 온 학생)의 환영회를 개최하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는데 그 석상에서의 고참 학생의 환영사 또는 감상담 같은 것은 거의 다 배일사상의 선전 고취를 주로 하였고 기타 모든 기회에도 배일화에 노력한 결과 신도래 학생으로서 이의 감화 영향을 받지 않는 자는 희귀한 상황”이라고 보고하고 있으니 조선인 유학생이 골칫거리는 골칫거리인 모양이다.
△참고문헌
-김인덕, ‘일본지역 유학생의 2·8운동과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1999)
-오노 야스테루, ‘1910년대 전반 재일유학생의 민족운동’, <숭실사학>(2011)
-백남훈, <나의 일생>(백남훈선생기념사업회·1968)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