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나누는 한-미 방위비협상 대사 지난 2018년 6월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에서 열린 한미방위비협상 제4차 회의에서 장원삼 우리측 한미방위비협상대사와 미국 측 티모시 베츠(Timothy Betts) 한미방위비협상대사가 회의 시작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
ⓒ 사진공동취재단 |
미국이 2019년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억 달러를 제시했다. 이 금액으로 1년 계약을 체결하자고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지난 2018년 12월 28일 최후통첩을 보냈다는 사실을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
10억 달러면, 작년보다 15% 인상된 금액이다. 우리 돈으로는 1조 1천억 원을 넘는다. 한국 재정에 부담을 주는 금액이다. 거기다가 1년 계약을 체결하게 되면, 2019년도 분담금을 확정하자마자 2020년도 분담금 협상을 곧바로 신경 써야 한다. 자칫 분담금 문제로 1년 내내 골머리를 앓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한국의 상황이 필리핀인들한테는 이해하기 힘든 광경일 수도 있다. 필리핀은 1976년부터 미군이 철수를 선언한 1992년 전까진 주둔 비용을 분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군 기지 사용료를 받은 바 있다. 그런 필리핀인들의 눈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불리한 조건으로 주한미군 방위비를 분담하는 한국인들이 쉽게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송영선 전 의원이 국방관리연구원 연구원 시절에 기고한 논문 '미국의 서태평양 기지정책: 필리핀과 한국'은 필리핀이 1976년부터 "기지에 대한 주권 회복"을 이루고 "주권국가로서 기지 사용료를 받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 본문에 인용된 논문의 일부. | |
ⓒ 한국국제정치학회 |
1947년 3월 14일의 군사기지협정을 통해, 필리핀은 자국 내 군사기지를 99년간 무상 사용할 수 권리를 미국에 부여했다. 99년간이면 2046년까지다. 이 협정대로라면, 아직도 필리핀은 자국 땅을 미군에 무상 대여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협정을 개정해 기지 사용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돌리고 1976년부터 미군 철수한 1992년 전까지 사용료를 받았다.
한국은 종전에 내지 않았던 분담금을 1991년부터 부담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필리핀은 그보다 훨씬 전에 기지 사용료를 받은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군사 지원까지 얻어낸 바 있다. 송영선 논문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아래의 FMS(Foreign Military Sales)는 '대외군사판매'란 의미로, 미국이 동맹국이나 우방에 대한 안보 지원 차원에서 무기를 판매하는 제도다.
"향후 5년(1980~1984) 동안 미국은 필리핀에 5억불을 지불(5천만 불: 군사원조, 2억 5천만 불: FMS 차관, 2억 불: 안보지원 원조)"
-한국국제정치학회가 1987년 발행한 <국제정치논총> 제27권 제1호에 수록.
▲ 본문에 인용된 논문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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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이 돈을 받아내기 시작한 1976년 무렵, 한국은 기존에 받던 군사지원을 거의 삭감 당하는 일을 겪었다. 유석춘 연세대 교수와 김인수 육사 교수의 공동 논문 '한국과 필리핀의 반미·친미 운동 비교 연구: 안보환경의 변화와 동맹관계의 불평등 개선 요구를 중심으로'에 나오는 구절이다.
"1960년대 한국의 총 군사비에서 83.4%를 차지하던 미국의 군사원조는 1974년에는 10%로 감소하였다가 1977년에는 거의 중단되었다."
-한국동남아학회가 2005년 발행한 <동남아시아연구> 제15권 제1호에 수록.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원조는 한국이 방위비를 분담하기 시작한 지 6년 뒤인 1997년에는 0원으로 떨어졌다. 반면, 필리핀은 과거 기지 사용료를 받은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군이 기지를 반환하고 철수한 1992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군사원조를 받았다. 무상군사원조(MAP)는 1993년까지 받았고, 해외군사차관(FMF)은 1994년에 끊어졌다가 1999년부터 다시 받았다. 국제군사교육 및 훈련 제공 프로그램(IMET)은 그 후로도 계속 받았다. 한국과 너무나 비교되는 장면이다.
미군 주둔의 '본질'을 직시한 필리민 국민들
▲ 본문에 인용된 논문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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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필리핀에 대한 처우가 이렇게 판이한 것은, 미국이 한국인은 싫어하고 필리핀인은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이가 생기게 된 결정적 원인이 있다. 유석춘·김인수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필리핀의 정치 지도자들이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던 것과 달리, 필리핀 국민들이 인식하는 안보 현실에서 미군의 역할은 미미한 것이었다. (중략) 필리핀 국민들은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 대해 특별한 고마움을 느낄 까닭이 없었다. 미군은 다만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자,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불평등한 조항이 포함된 미국과의 군사기지협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 필리핀 국민들 대부분이 공감하게 되었다."
필리핀 정치인들은 미군에 대해 우호적이었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그에 아랑곳없이 미군의 본질을 똑바로 직시했다. 미군이 주둔하는 목적이 필리핀 보호보다는 미국 국익 증진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들의 눈에는 미군이 필리핀 땅을 무상으로 사용하는 것이 불합리한 일로 비쳐졌다. 그래서 그들은 행동에 나섰다. 이것이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행동을 촉구하고 나아가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이 한국과 필리핀을 차별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필리핀 국민들은 '우리는 필리핀을 지켜주려고 이곳에 왔다'는 미국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미국도 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필리핀 국민들을 기만하고 미군 주둔을 빌미로 금전적 이익까지 얻으려 했다가는 자칫 쫓겨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미국 측이 그에 맞게 행동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필리핀 국민들이 싫어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미국은 필리핀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다. 서태평양 방어 정책을 통해 미 본토를 지키자면 필리핀과의 동맹이 절실했다. 그래서 기지 사용료도 내고 군사원조도 하는 방법으로 필리핀 국민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킨다는 사실을 필리핀에서만큼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뒤 1986년 필리핀 시민혁명 뒤에 증폭된 반미운동의 결과로 미군은 1992년 필리핀에서 철수했다가, 1999년 방문군 협정을 통해 최장 14일간 합동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필리핀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2014년에 방위협약 확대협정을 통해 미군을 재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으며 지금은 재주둔을 준비 중이다.
10억 달러의 방위비 분담을 한국 정부에 요구한 뒤인 지난 1월 17일,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조선일보>에 특별기고문을 실었다. '한미 동맹, 방위비 분담 고비도 넘어야'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해리스 대사는 "21세기 경제문화 강국인 한국은 세계 11위 경제대국이자 6위 무역강국이다"라며 한국의 경제력을 높이 평가한 뒤 이렇게 말했다.
'주한미군은 한국을 지켜주기 위한 군대이므로 한국이 주둔 비용을 부담하는 게 당연하다'는 1991년 이래의 논리가 담겨 있는 글이다. 이런 글을 주필리핀 미국대사는 필리핀 신문에 섣불리 기고하지 못할 것이다. 미군 주둔 비용을 분담해 달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미군이 미국이 아닌 필리핀을 위해 주둔하고 있다는 말도 감히 꺼내지 못할 것이다.
주필리핀 미국대사는 '미군은 필리핀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말을 주한미국대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면서 분담금 이야기까지 자신 있게 거론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한국 국민과 필리핀 국민을 달리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핀 국민들이 싫어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미국은 필리핀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다. 서태평양 방어 정책을 통해 미 본토를 지키자면 필리핀과의 동맹이 절실했다. 그래서 기지 사용료도 내고 군사원조도 하는 방법으로 필리핀 국민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킨다는 사실을 필리핀에서만큼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뒤 1986년 필리핀 시민혁명 뒤에 증폭된 반미운동의 결과로 미군은 1992년 필리핀에서 철수했다가, 1999년 방문군 협정을 통해 최장 14일간 합동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필리핀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2014년에 방위협약 확대협정을 통해 미군을 재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으며 지금은 재주둔을 준비 중이다.
10억 달러의 방위비 분담을 한국 정부에 요구한 뒤인 지난 1월 17일,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조선일보>에 특별기고문을 실었다. '한미 동맹, 방위비 분담 고비도 넘어야'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해리스 대사는 "21세기 경제문화 강국인 한국은 세계 11위 경제대국이자 6위 무역강국이다"라며 한국의 경제력을 높이 평가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동등한 파트너로서 이 위대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훨씬 더 큰 분담을 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는 주한미군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도 포함된다. 한국을 지킨다는 우리의 공약은 굳건하다."
▲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韓·美 동맹, 방위비 분담 고비도 넘어야>, 2019.01.17 | |
ⓒ 조선일보 갈무리 |
'주한미군은 한국을 지켜주기 위한 군대이므로 한국이 주둔 비용을 부담하는 게 당연하다'는 1991년 이래의 논리가 담겨 있는 글이다. 이런 글을 주필리핀 미국대사는 필리핀 신문에 섣불리 기고하지 못할 것이다. 미군 주둔 비용을 분담해 달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미군이 미국이 아닌 필리핀을 위해 주둔하고 있다는 말도 감히 꺼내지 못할 것이다.
주필리핀 미국대사는 '미군은 필리핀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말을 주한미국대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면서 분담금 이야기까지 자신 있게 거론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한국 국민과 필리핀 국민을 달리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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