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할린 한인들 지구촌동포연대가 제작해 선물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들고 포즈를 취한 사할린한인 | |
ⓒ 변영숙 |
올해도 어김없이 달력 한 부가 배달됐다. 연말연시, 참 흔한 게 달력인데, 이 달력은 일반 달력과 다른다.
'1월이 1일부터 8일까지 다 빨간색이네?'
'한 주가 월요일부터 시작되네?'
'이게 어느 나라 글자지?'
'설 명절인데 검정색이네?'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만히 보니 음력 날짜도 있고, 한글로 한국 국경일과 절기, 명절 등도 표기돼 있다. 또 한국의 절기나 국경일에 대한 러시아어 설명도 있다. 가령, 소한은 'слабые морозы', 추석은 'Чусок, день благодарения', 이런 식이다. 도대체 이 달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고마워
▲ 2019년도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제작되는 음력 달력. 구정을 전후해 사할린 한인들에게 전달된다. | |
ⓒ 변영숙 |
이 달력의 이름은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이다. 러시아 달력을 기본으로 해서 음력일과 절기와 국경일 등을 한글로 표기한 달력인데, '지구촌 동포연대'(아래 킨)라는 시민단체가 사할린 거주 한인들을 위해 2013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제작된 달력은 사할린 한인들에게 전달된다.
"사할린에 갔을 때 나이드신 동포들은 음력으로 일상생활을 챙기더라고요. 사할린 한인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부터 이주해 1938년 이후 강제동원 당한 후 남게 된 분들인데, 1~2세분들은 가족의 생일이나 제사 등을 음력 날짜로 세고 계시더라고요. 근데 사할린에는 음력 달력이 귀한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만들기 시작했죠."
달력 제작 배경에 대한 킨의 최상구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달력을 만들고 전달하는 일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간단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제일 큰일이죠. 포털 사이트 '다음'의 '같이가치'를 통해 제작비를 모금하지만, 목표액을 달성한 건 딱 한 번뿐이었어요."
해마다 모금액이 줄어들다 보니 점점 제작 부수도 적어지고, 내년에도 달력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란다.
달력에 들어가는 사진이나 그림은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조달한다. 2018년 달력에는 생명과 삶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민중예술가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이 사용됐다.
완성된 달력 500여 부는 화물편으로 미리 사할린으로 보내지고, 일부는 구정 즈음에 '킨 방문단'이 직접 들고 가서 사할린 한인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전달한다.
사할린의 한인동포들은 누구인가
재외동포재단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세계 170여 개국에 대한민국 인구 10%를 상회하는 740만 명가량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처지는 남다르다. 사할린 한인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 이후에 강제동원된 사람들과 그 후세들인데,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과 소련 및 남북한의 복잡한 셈법과 무관심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게 됐다. 더욱이 사회주의 체제하의 소련과는 수교는커녕 민간차원의 교류조차도 허용되지 않아 고국에 있는 부모자식의 생사도 모른 채 70년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북위 50도 이남을 일본에게 넘김으로써 북사할린은 소련이, 남사할린은 일본이 통치하게 된다. 그러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남사할린은 다시 러시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남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한인들은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1930년대에 사할린섬에는 1700여 명의 한인들이 살았는데 자발적으로 이주한 북쪽 지역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사할린에 거주하던 한인들 대부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극동지역 전체에서는 약 17만 명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한편, 일본령인 남사할린 지역의 한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사할린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높은 임금'을 주는 '좋은 일자리'를 구해준다는 브로커들에게 속아서 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30년대 말 석유·가스·석탄 등 자원개발을 위해 사할린섬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과 정부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사할린 이주를 부추겼는데, 한국인 브로커들이 앞장서서 조선인들을 모집하고 사할린으로 이주시켰다.
사할린 이주는 초기에는 민간 주도의 모집 형태가 주를 이루다가 1930년대 말이 되면 모집을 빙자한 강제동원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1938년 '국가총동원령'으로 모든 물적·인적 자원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제는 1939년 7월 '조선노무자 모집요강'을 통해 1942년 2월까지는 '모집'으로, 그 이후에는 '관의 알선'으로 강제동원을 실시했다. 1944년 9월부터는 아예 '징용령'을 시행했다.
거짓 모집요강에 속거나 강제징용된 한인들은 기차나 트럭으로 부산항까지 실려가 일본의 시모노세키항행 배에 태워졌다. 그곳에서 다시 사할린 최남단 코르사코프항으로 실려가 사할린 각지로 보내졌다.
강제징용된 한인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 30대 장성한 남성들로 주로 탄광이나 도로 및 항만건설, 목재사업장 등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당시 사할린에는 미쓰이, 미쓰비시, 오지제지 등 일본 전범기업들이 다수 진출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의 수가 50여 개가 넘었고, 일본 최대 제지회사인 오지제지가 남사할린에서 운영하는 제지공장도 9개나 됐다.
1945년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은 한인들은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코르사코프항으로 몰려들었지만 귀국선에 오를 수가 없었다.
1946년 2월 체결된 '소련지역에서의 철수에 대한 미·소 협정'에 따라 사할린 거주 일본인 29만2600명이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포츠담선언'에서 조선인은 일본인의 범주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당시 귀환하지 못한 한인의 수는 4만3000여 명에 달한다. 1956년 10월 9일 '소·일 공동선언'에 의해 일본인 아내와 조선인 남편 및 그 자식 200~300명만이 사할린에서 귀환했을 뿐이다.
일제에 의해 고통받던 사할린 한인들은 이번에는 소련사회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귀환만을 손꼽으며 '무국적자'로 살다 죽거나, 통일이 되면 귀환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북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다수였다고 한다.
다행히 1990년대 시작된 '영주귀국사업'으로 사할린 한인 1세들이 뒤늦게나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한인 1세 550여 명은 아직도 사할린에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그냥 달력이 아니다
킨 일행을 맞이하는 한인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하다. 그분들에게는 달력도 달력이지만 '고국에서 사람이 온 것'이 더 반갑고 고맙다고 한다. "우리를 잊지 않고 먼 곳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분들도 있다.
한인들이 차려 내오시는 밥상에는 어김없이 김치가 있다. 고명을 얹은 잔치국수와 잡채도 모두 한국식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해 주신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자랐고, 또 먹어본 대로 만들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사람이 한국음식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들 하신다.
역사 시간에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 발음도 잘 안 되는 먼 타국땅에서 만나는 주름진 얼굴들 앞에서 죄스러움과 부채의식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는 발길은 언제나 무겁다.
사할린의 겨울은 몹시 춥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도 허다하다. 바다까지도 꽁꽁 얼어붙는다. 산처럼 쌓인 눈과 눈보라는 기본이다. 사할린 한인회가 제공한 낡은 일본제 봉고차를 타고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예닐곱 시간을 달려 한인들을 찾아가는 길은 고단하다.
여행의 낭만, 설레임 같은 것은 애시당초 없다. 그래도 해마다 찾아가는 이유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며 반기는 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킨은 어김없이 1월 말에 '2019년도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들고 사할린에 계시는 한인들을 방문할 계획이다.
* 지구촌 동포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kin.or.kr
달력 제작 배경에 대한 킨의 최상구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달력을 만들고 전달하는 일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간단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제일 큰일이죠. 포털 사이트 '다음'의 '같이가치'를 통해 제작비를 모금하지만, 목표액을 달성한 건 딱 한 번뿐이었어요."
해마다 모금액이 줄어들다 보니 점점 제작 부수도 적어지고, 내년에도 달력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란다.
달력에 들어가는 사진이나 그림은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조달한다. 2018년 달력에는 생명과 삶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민중예술가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이 사용됐다.
완성된 달력 500여 부는 화물편으로 미리 사할린으로 보내지고, 일부는 구정 즈음에 '킨 방문단'이 직접 들고 가서 사할린 한인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전달한다.
사할린의 한인동포들은 누구인가
▲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강제동원된 한인들이 처음 도착한 코르사코프항 전경 | |
ⓒ 변영숙 |
재외동포재단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세계 170여 개국에 대한민국 인구 10%를 상회하는 740만 명가량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처지는 남다르다. 사할린 한인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 이후에 강제동원된 사람들과 그 후세들인데,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과 소련 및 남북한의 복잡한 셈법과 무관심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게 됐다. 더욱이 사회주의 체제하의 소련과는 수교는커녕 민간차원의 교류조차도 허용되지 않아 고국에 있는 부모자식의 생사도 모른 채 70년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북위 50도 이남을 일본에게 넘김으로써 북사할린은 소련이, 남사할린은 일본이 통치하게 된다. 그러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남사할린은 다시 러시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남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한인들은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1930년대에 사할린섬에는 1700여 명의 한인들이 살았는데 자발적으로 이주한 북쪽 지역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사할린에 거주하던 한인들 대부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극동지역 전체에서는 약 17만 명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 사할린 한인 방문단 매년 겨울 "하나뿐인 달력을 전달하기 사할린을 방문한 킨방문단 일행 | |
ⓒ 변영숙 |
한편, 일본령인 남사할린 지역의 한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사할린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높은 임금'을 주는 '좋은 일자리'를 구해준다는 브로커들에게 속아서 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30년대 말 석유·가스·석탄 등 자원개발을 위해 사할린섬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과 정부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사할린 이주를 부추겼는데, 한국인 브로커들이 앞장서서 조선인들을 모집하고 사할린으로 이주시켰다.
사할린 이주는 초기에는 민간 주도의 모집 형태가 주를 이루다가 1930년대 말이 되면 모집을 빙자한 강제동원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1938년 '국가총동원령'으로 모든 물적·인적 자원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제는 1939년 7월 '조선노무자 모집요강'을 통해 1942년 2월까지는 '모집'으로, 그 이후에는 '관의 알선'으로 강제동원을 실시했다. 1944년 9월부터는 아예 '징용령'을 시행했다.
▲ 사할린 한인 묘역 킨 방문단이 무연고 사할린 한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방문하고 있다. | |
ⓒ 변영숙 |
거짓 모집요강에 속거나 강제징용된 한인들은 기차나 트럭으로 부산항까지 실려가 일본의 시모노세키항행 배에 태워졌다. 그곳에서 다시 사할린 최남단 코르사코프항으로 실려가 사할린 각지로 보내졌다.
강제징용된 한인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 30대 장성한 남성들로 주로 탄광이나 도로 및 항만건설, 목재사업장 등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당시 사할린에는 미쓰이, 미쓰비시, 오지제지 등 일본 전범기업들이 다수 진출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의 수가 50여 개가 넘었고, 일본 최대 제지회사인 오지제지가 남사할린에서 운영하는 제지공장도 9개나 됐다.
1945년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은 한인들은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코르사코프항으로 몰려들었지만 귀국선에 오를 수가 없었다.
▲ 망향의 언덕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 |
ⓒ 변영숙 |
1946년 2월 체결된 '소련지역에서의 철수에 대한 미·소 협정'에 따라 사할린 거주 일본인 29만2600명이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포츠담선언'에서 조선인은 일본인의 범주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당시 귀환하지 못한 한인의 수는 4만3000여 명에 달한다. 1956년 10월 9일 '소·일 공동선언'에 의해 일본인 아내와 조선인 남편 및 그 자식 200~300명만이 사할린에서 귀환했을 뿐이다.
일제에 의해 고통받던 사할린 한인들은 이번에는 소련사회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귀환만을 손꼽으며 '무국적자'로 살다 죽거나, 통일이 되면 귀환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북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다수였다고 한다.
다행히 1990년대 시작된 '영주귀국사업'으로 사할린 한인 1세들이 뒤늦게나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한인 1세 550여 명은 아직도 사할린에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그냥 달력이 아니다
▲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을 받아든 한인들 그들에게는 달력은 "고국이 자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징표"와 같은 것이다. | |
ⓒ 변영숙 |
킨 일행을 맞이하는 한인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하다. 그분들에게는 달력도 달력이지만 '고국에서 사람이 온 것'이 더 반갑고 고맙다고 한다. "우리를 잊지 않고 먼 곳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분들도 있다.
한인들이 차려 내오시는 밥상에는 어김없이 김치가 있다. 고명을 얹은 잔치국수와 잡채도 모두 한국식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해 주신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자랐고, 또 먹어본 대로 만들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사람이 한국음식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들 하신다.
역사 시간에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 발음도 잘 안 되는 먼 타국땅에서 만나는 주름진 얼굴들 앞에서 죄스러움과 부채의식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는 발길은 언제나 무겁다.
▲ 사할린 겨울 자작나무 숲 사할린의 겨울은 혹독하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이 허다하고 눈은 기본이다. | |
ⓒ 변영숙 |
사할린의 겨울은 몹시 춥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도 허다하다. 바다까지도 꽁꽁 얼어붙는다. 산처럼 쌓인 눈과 눈보라는 기본이다. 사할린 한인회가 제공한 낡은 일본제 봉고차를 타고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예닐곱 시간을 달려 한인들을 찾아가는 길은 고단하다.
여행의 낭만, 설레임 같은 것은 애시당초 없다. 그래도 해마다 찾아가는 이유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며 반기는 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킨은 어김없이 1월 말에 '2019년도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들고 사할린에 계시는 한인들을 방문할 계획이다.
* 지구촌 동포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kin.or.kr
▲ 사할린의 겨울 한인들을 찾아가는 킨 방문단 일행. | |
ⓒ 변영숙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없음:
댓글 쓰기